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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규/ 기억의 집, 그러므로 어쩌면 정체성의 집을 짓는

고충환



송신규/ 기억의 집, 그러므로 어쩌면 정체성의 집을 짓는 



여기에 바퀴가 달려있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세로로 곧추선 봉 위에 사방으로 전개된 가로대가 가설된 설치물이 있다. 일종의 거치대를 생각하면 되겠다. 가로대에는 그 이면이 훤히 비쳐 보이는 고운 망사로 직조된 천이 위에서 아래로 길게 드리워져 있어서 불어오는 바람에 반응하며 하늘거린다. 깃발의 변형된 형태 같기도 하고, 모빌에서 착상된 유기적 구조물 같다고 해야 할까. 반투명한 하얀 망사 때문이기도 하겠고, 바람에 반응하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천의 움직임이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바람에 파르르 떠는 하얀 천이며, 바람결에 반응하는 꿈결 같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꿈의 집이며, 기억의 통로 같은 생각을 해 보게도 된다. 

그리고 작가는 하늘거리는 하얀 천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린 종이를 오려 붙였다. 그림을 그렸다고는 하나, 알만한 형상보다는 먹물을 흩뿌려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을 그렸다. 흩뿌린 먹물이 튀겨나가면서 정착된 흔적을 그리고, 천 위로 한껏 번져나가다가 맺힌 먹물 자국을 그렸다. 자국과 흔적과 얼룩을 그린 그림일까. 그런데, 무슨 자국? 무엇의 흔적? 어떤 얼룩? 자국을, 흔적을, 얼룩을 만든 원인(숨겨진 의미)이 있을 것이다. 그 원인, 그러므로 그 숨겨진 의미를 밝히는 일이 곧 작가의 작업을 읽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천 위에 붙인 종이 그림을 보면 자잘한 알갱이가 연쇄를 이룬 것이 개구리알 같다. 작가의 말 그대로 옮기자면 세포라고 했다. 원자라고 했고, 존재의 최소단위 원소라고 했다. 일종의 모나드며 모듈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최소단위 원소가 모여 풀이 자라고, 나무가 되고, 숲을 일구는, 그런,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지는 자연의 생사 순환 원리와 구조를 그린 것으로 보면 되겠다. 알에서 개구리가 유래한 것이니 개구리알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한편으로 그 의미는 자연 대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알갱이 하나하나를 생각의 씨앗이며 기억의 최소단위 원소로 본다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기억에 기억이 연이어지는 생각의, 그리고 기억의 연쇄를 표현한 알레고리가 된다. 

천 위에 부착된 종이 그림에는 또 다른 알 수 없는 형상들이 있는데, 지금은 소실되고 없는, 다만 터만 남은, 작가가 유년 시절을 보낸 옛집을 찾아 돌이며 나무며 아직 남아 있는 부수물 같은 오브제의 표면 질감을 떠낸(연필로 프로타주 한) 흔적이고 조각들이라고 했다. 그 종이 조각들은 거치대 위 천에만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전시장의 내외 벽면에도, 전시장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돌출된 유리창(아마도 윈도갤러리?)에도 붙어있어서 건물 전체를 작업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느낌이고, 전시장 자체를 작업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전시를 위한 장소와 작업이 운명을 같이하는 장소 특정적 작업이고, 작업을 공간으로까지 확장한 공간설치작업이라고 해야 할까. 회화를 설치로까지 확장한 것이란 점에서 보면 설치회화라고 해야 할까. 


불현듯, 지금까지 오리무중으로만 보였던 작가의 작업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작가의 작업의 실체에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작가는 다름 아닌 기억의 집을 짓고 있었다. 단절하면서 통하는 망사 천이 부각 되고, 희미해지고, 마침내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때로 왜곡되기조차 하는 기억의 속성을 닮았고, 기억의 양가성을 닮았다. 이처럼 안과 밖이 통해 보이는 망사 천은 기억이 지나가는 통로며, 기억이 기숙하는 몸이다. 그 몸이 마치 자석처럼 기억의 조각들을 불러들이고, 그렇게 기억의 편린들이 그 몸을 숙주 삼아 기생한다. 그렇게 기억이 머문 자리에 봄바람 같은, 살랑, 바람이 분다. 살랑, 이라고는 했지만, 기억을 되불러오는 과정에 회오리도 일었을 것이고, 존재를 온통 흔들어놓는 돌풍도 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봄바람 같은, 때로 돌풍 같은 바람이 흔들어놓다가 지금은 잠잠해진 기억의 집을 짓고 있었다. 

작가는 그 기억의 집을 오랫동안 잊혀진(그 자체 근작의 주제이기도 한), 이라고 부른다. 오랫동안 잊혀진, 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기억의 집을 짓는 행위와 과정은 다만 근작에만 한정된다기보다는 그동안 작가의 전 작업의 이면에서 면면히 작동되고 있었던 경우로 보아야 한다. 비록 매번 그 드러나 보이는 양상은 사뭇 다르지만, 사실은 이처럼 옛집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반추하는 행위가 표현 위로 밀어 올린 다른 지점 지점들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이 샘솟는 원천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옛집에서 채집된 그때의 흔적을 재구성해 보여주는 작가의 작업은 사실은 조각난 기억을 재구성해 온전한 기억을 복원하는 일이고, 파편화된 기억을 재구성해 상실된 정체성을 되찾는 일이다(기억이 곧 정체성일 것이므로).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럿 있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잃어버린 원형을 되찾는 일이다. 프로이트는 어른이 유년(유년에 억압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고, 자크 라캉은 상징계(언어를 사용하는 어른들)가 상상계(무분별한 그러므로 전인적인 유아)에 붙잡혀 있다고 했다. 모더니즘 소설의 효시로 알려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 프루스트 역시 끊임없이 자기를 유년으로 소급시킨다. 결정적으로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곧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대인은 그 원형을, 그 원형에 대한 기억을 상실했다. 그러므로 자기를 상실했고, 정체성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의 상실이 소외를 부른다. 그렇다면 상실과 소외가 왜 어떻게 현대적 현상인가. 섣부른 답을 하자면, 경제 제일주의 원칙으로 견인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소외는 피할 수 없다.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이면 건물도, 도시도, 사람도, 자연도 다 소외된다. 그렇게 파헤쳐진 채 벌건 속살을 드러낸 산허리에는, 포크레인 소리만 요란한 재개발 현장에는 소외된 사람들, 자연들, 도시들, 건물들의 보이지 않는 혼령들이 부유한다. 그렇게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리어왕의 절규). 여기에 경쟁사회에서 나는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분리된다. 사회에 내어준 주체와 그 주체 뒤에 숨은 주체로 분리된다. 그렇게 숨은 주체, 억압된 주체, 소외된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불교에서는 그 주체를 진아, 그러므로 진정한 주체라고 부른다). 

도대체 작가가 어떤 종류의 상실감을 앓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아마도 상실된 유년을 혹독하게 앓고 있을 것이라고 다만 추정해볼 뿐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하는 징후이고 증상인 시대에 작가는 살고 있고, 또한 실제로도 그렇게 상실한 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그렇게 내가 상실한 것들, 그러므로 원형은, 그리고 원형적인 기억은 결국 나의 유래 그러므로 존재의 기원이라는 거대 담론에 연결된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을 끌어모아 집을 짓는, 기억의 집을 짓는, 정체성의 집을 짓는 일로 정의할 수 있겠고, 그 일은 유년을 상실한, 고향을 상실한(특히 게오르그 짐멜과 하이데거에서 고향의 상실은 단순히 지정학적 장소의 상실을 의미하기보다는 존재론적 의미의 상실을 의미한다), 원형을 상실한,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그렇게 상실된 기억의 조각들이 기생하는 기억의 몸 위로, 정체성의 집 위로 바람이 분다. 그렇게 바람이 불면서, 당신의 마음속, 그러므로 기억 속엔 어떤 바람이 부는지, 작가의 작업은 물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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