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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빈/ 소비되는 장소, 사물, 어쩌면 사람들의 의식마저도

고충환



이윤빈/ 소비되는 장소, 사물, 어쩌면 사람들의 의식마저도 



이윤빈의 작업은 자신의 일상이 살아지는 환경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비롯된다. 자기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구체성을 얻고,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현실성을 얻는다. 한편으로 개별주체는 개인이기 이전에 한 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하므로 개인의 삶 속에 사회가 투사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비록 자기로부터 비롯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사회와 연동되고, 그렇게 자기반성적 의미와 함께 사회적 의미를 얻는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처럼 시간과 공간으로 나타난 환경적 조건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포획하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작가의 작업에 나타난 형식적인 부분을 보자. 작가의 작업에서 형식적인 특징으로 치자면 테이프와 배채법이 주목된다. 새롭다거나 신선하다고야 할 수 없겠지만, 다른 채묵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우는 아니라서 특이하고, 그 자체가 작가의 작업의 아이덴티티를 결정한다고 해도 좋다. 

주지하다시피 배채법은 그림 뒷면에서 채묵을 올리는 방법이다. 뒷면에다 그림을 그려 화면에 해당하는 전면에 그 채묵이 배어 나오게 하는 방법이다. 배 나온 것인 만큼 최초의 색채보다 흐릿한 색감을 얻을 수 있고, 여기에 한지는 불규칙한 조직을 하고 있어서 비정형적이고 유기적인 질감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얻어진 흐릿한 색감과 유기적인 질감으로 작가는 시간을 표현한다. 흐릿한 색감과 유기적인 질감은 말하자면 시간의 색감이고 질감이다. 시간이 꼭 그렇지 않은가. 시간은 흐르고, 시간이 흐르면서 색감도 흐릿해지고, 질감도 터실터실해진다. 배채법은 말하자면 시간의 아우라를 표현하기 위해 작가가 찾아낸 방법이라고 해도 좋다. 물론 그 위에 덧그리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시간의 표현과 형식논리(방법론)가 부합한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시간은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공간은 또한 어떻게 자기표현을 얻는가. 공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치자면 건축물의 구조, 골격, 뼈대가 될 것이다. 모든 복잡해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는 변하지 않는 본질(항구적인 성질)이 있고, 그 본질이 다름 아닌 구조라고 보는 구조주의의 학적 성과도 있지만, 본질 그러므로 구조를 통해 현상을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조를 통해 공간을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건물의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 테이프가 도입된다. 건물의 구조에 해당하는 부분들, 이를테면 각진 벽면과 모서리, 창틀과 기둥 부분, 바닥 타일이 접해지는 면과 철골 구조물, 그리고 여기에 때로 빨래 건조대와 기중기의 라인과 같은 오브제의 골격이 테이프를 통해서 형태를 얻는다. 테이프로 봉했다가 떼어낸 부분이 하얀 공백으로 남겨지면서 건축의 구조가, 오브제의 형태가 그 실체를 드러내면서 강조되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배채법과 테이프를 매개로 일상적인 공간을, 휴양지를, 앙상한 철근만 남은 밭을, 폐허로 남겨진 테쉬폰(곡선 형태의 이국적인 건축물)을, 사람들이 찾지 않는 빈 놀이동산을, 초현실적 풍경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단의 정경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렇게 표현된 그림을 보면, 흐릿한 색감과 비정형의 질감이, 그리고 여기에 하얀 공백으로 남겨진 구조가 더해져서 마치 시간을 기록한 것 같은, 기억을 소환한 것 같은 정서적 환기와 함께, 때로 역사적 현장을 기록한 것이란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얻는다. 

이와 함께 내용 면에서 작가는 소비되는 장소와 사물에 주제를 맞춘다. 자본주의가 첨예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페티시즘(물화, 물신) 곧 기왕에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비물질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마저 마치 물질처럼 받아들이고 소비하는 변화된 의식과 행태를 반영한다. 여기서 소비되는 장소를 위해 휴양지가, 그리고 소비되는 사물을 위해 화분과 인공정원이 소환된다. 미셸 푸코가 휴양지를 헤테로토피아 곧 일상과 일탈이 그 경계를 허무는 장소, 초장소로 정의하기도 했지만, 자연에서조차 일상의 관습을 벗지 못한 채 일상 그대로를 답습하는 사람들이 작가는 흥미롭다.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감행하기 위해 온 사람들일 텐데도 말이다. 그렇게 일상의 관습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답게 자연마저도 화분과 인공정원을 통한 간접 경험이 더 편안하고 쾌적하다. 

작가는 그렇게 일상에 맞춰 재구조화된(최적화된?) 휴양지를, 집에서처럼, 사무실에서처럼 니즈에 맞게 재단된, 휴양지를 꾸며놓고 있는 화분과 인공정원을 그린다. 그러므로 인공화된 휴양지를, 자연을, 그러므로 어쩌면 사람들의 의식을, 생활양식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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