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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결수, 농부 되기와 노동의 의미를 생각하다

고충환



김결수, 농부 되기와 노동의 의미를 생각하다 


고충환 | 미술평론가



노동과 효과. 다르게는 노동의 효과라고 해도 좋을, 작가 김결수가 작가에 입문한 이후 지금까지 줄곧 일관되게, 고집스럽게 천착해오고 있는 주제고 주제 의식이다. 추상미술에서처럼 특별한 주제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주제는 작가의 작업을 의미론적으로 함축하고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이 되고 있고, 그런 만큼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자체 예술을 매개로 풀어야 할 화두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작가는 이 주제에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그리고 실천 논리)라도 담고 있는 것인가. 

예술이 무익하고 무용한 노동이라는 입장에 저항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름 아닌 바로 그 무익하고 무용한 노동이야말로 예술의 존재 의미이며 미덕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술을 매개로 한 철저하게 실패한 노동만이 줄 수 있는 뭔가가 있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예술의 존재 의미는 크게 진리와 진실 그리고 감각을 향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여기에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존재론적 질문이 진리와 관련된다면,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었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현실 인식과 실천 논리가 진실에 매개되고, 감각적 쾌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예술은 감각과 연결된다. 각각 종교적인, 현실 참여적인, 그리고 여기에 몸적인 경향성의 갈래들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이 가운데 예술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노동의 의미를 묻고 그 존재 가치를 묻는 작가의 작업은 특히 진리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하이데거는 진리를 과학적 진리와 예술적 진리로 구분한다. 그 자체 증명의 대상이면서 실제로도 증명이 되는 종류의 진리를 과학적 진리에, 그리고 처음부터 증명의 대상이 아닌 만큼 억지로도 증명이 안 되는 부류의 진리를 예술적 진리에 결부시킨다. 그러면서 예술적 진리는 과학적 진리가 해명할 수 없는 부분을 파고드는 만큼 더 깊고 심오하다고도 했다. 예술적 진리를 존재론적 질문이며 가치에 연루시키는 것도 그 때문이다(우리는 과학적 사실에 대해 진리를 묻지도 찾지도 않는다). 

여기서 다시 개인적인 생각을 말해도 된다면, 무익하고 무용한 노동, 철저하게 실패한 노동이야말로 예술의 유일한 존재 의미이며 가치라고 말하고 싶다. 예술의 윤리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진다. 바위를 굴리고 밀어 올리기를 반복하는 시지프스의 노동이나, 언 땅을 파고 도로 묻기를 반복하는 시베리아 수인의 노동에는 합리를, 상식을, 정상을, 그러므로 인간을 넘어서는(그러므로 어쩌면 인간이기를 부정하는) 신성한 뭔가가 있다. 

세상에는, 삶에는, 그리고 존재에는 합리로, 상식으로, 정상으로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고, 바로 그 해명되지 않는 부분을 밝히는 것에 예술의 의미가 있고, 예술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노동의 가치가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비록 감각적 현실을 닮았을 때조차 감각적 현실 자체보다는 혹 감각적 현실이 간과하고 있을지도 모를 행간읽기와 이면 읽기를 수행하고 실천하는 것에 그 의미와 가치가 있다. 작가의 작업이 그렇고, 굳이 예술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노동을 고집하는 이유가 그렇고, 그러므로 어쩌면 이로써 예술의 존재 의미와 정의(혹은 재정의)를 묻는 것(찾는 것)이 그렇다. 

마르크스는 물신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소외시킨다고(인간을 도구화한다고) 했고, 반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미학을 인간의 보편 소양이며 자질이라고도 했다. 그러므로 작가는 삶의 질에 부합하는 노동, 소외되지 않는 노동, 그 자체 삶의 의미이기도 한 노동, 자족적인 노동, 그러므로 어쩌면 철저하게 실패한 노동, 실패함으로써만 비로소 의미를 얻는 노동, 다시 그러므로 역설적인 노동의 가능성을 예술에서 찾고 실천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감각적 현실을 닮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감각적 현실 자체보다는 감각적 현실이 숨겨놓고 있는 행간읽기와 이면 읽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도 했다. 어떻게 그런가. 작가는 주먹만 한 크기의 모종에서 볍씨가 자라는, 그런 모종 수천 개가 한데 모여 전체를 이루는, 그런 스케일의 설치작업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끝에 볏짚을 쌓아 만든, 사각형 형태의 거대한 볏짚단을 만들었다. 그 자체 집(그리고 대지)의 변형되고 변주된 형태라고 해도 좋을 볏짚단 구조물 위에 전시 기간 내내 물을 뿌려 싹을 키우고, 마침내 바람이 불면 제법 흔들릴 정도로 풀이 웃자라게 했다. 물을 뿌리면 짚단 위로 김이 무럭무럭 나면서 생명이 자라는 것(생명이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시간의 경과(흐르는 시간)를 확인해볼 수도 있다. 

모판을 조성하고, 싹을 틔운 모종을 논(볏짚단) 위에 옮겨 심고, 그 위로 햇빛이 비치고 비가 내리면서(인공환경을 조성하면서) 벼가 자라는 과정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농사 그대로다. 그렇다면 작가는 농사를 짓는 것인가. 농사를 짓는 것이라면 왜 굳이 전시장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농사를 짓는가. 왜 굳이 전시장이라는 낯선 환경 속에 농사를 끌어들이는가. 혹 무슨 기발한 농법이라도 실험하고 연구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만약 작가의 행위를 농사로 본다면, 그야말로 실패한 농사이며 무모한 노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한정된 전시 기간으로 당연히 중도 하차할 것이고, 그러므로 소출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고 해도 도대체 전시장이 농사짓기에 좋은 환경일 리가 없다. 

그렇다면 뭔가. 왜 이처럼 무모한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 것인가. 농부 되기다. 주지하다시피 oo 되기는 질 들뢰즈에 유래한 개념으로서, 자본주의인 척하면서(자본주의를 흉내 내면서) 사실은 자본주의의 전복을 꾀하는 실천 논리로 제안된 것이다. 자본주의의 자체 모순으로 스스로 무너지게(내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농부인 척하면서 사실은 농사 스스로 자체 모순으로 망하게라도 한 것인가. 그렇게 보이고, 또한 바로 여기에 작가의 예술에 대한 실천 논리가 있다. 

작가는 농사로 대변되는 노동이 경제 제일주의 원칙과 효율성 극대화의 법칙으로 견인되는 자본주의의 욕망으로 환원되는 틀을 깨고 싶고, 그 틀에 가려지고 왜곡된 노동의 본래 의미를 발굴하고 싶다. 노동 자체의 신성한 의미를 되살리고 싶다. 최초 노동에 결부되었을 생명 사상을 일깨우고 싶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흔들리는, 그런, 순리대로 사는, 자연의 섭리를 닮은 삶의 행태를 복원하고 싶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생명 사상과 생태 담론, 그리고 여기에 최근의 인류세 담론과도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 농사를 짓는 척하면서(실제로도 무모한, 어쩌면 성실한 노동을 투자하면서), 농사를 살짝 비틀어 보이면서(낯설게 하면서), 농사에 가려진 노동의 본래 의미(그 자체 흐르는 시간과 생명의 자기실현으로 나타난 자연의 섭리에 부합하는)를 발굴하고 복원한 것이다. 
그렇게 전시장 한쪽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거대한 철제 구조물 탱크(기름통) 또한 농촌에서 석유를 공동 구매해 비축해 두는(비축유) 용기란 점에서 잊힌 공동체 사상을 일깨우는 제스처로 읽고 싶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예술은 노동이다. 삶이다. 그리고 정체성이다. 노동과 삶과 정체성이 예술의 이름으로 호명되면서 그 경계를 허무는,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는, 그런, 경향성의 작업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정체성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작가는 이 일련의 영상설치작업과 함께 집을 소재로 한 평면작업을 오랫동안 해왔다. 

여기서 집은 정체성을 표상한다. 자기에게 집은 숨어있기 좋고, 타인에게 집은 욕망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란 점에서 이중적이다. 또한 집은 세계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주면서 단절시킨다는 점에서 양가적이다.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캐니(아늑한)와 언캐니(때로 폭력적인)가 동거하는 집이다. 그렇게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정체성이 기거하는 집이다(정체성이 꼭 그렇지 않은가). 집의 메타포로 치자면, 언어로 축조된 집도 있다.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한 하이데거를 인용한 것인데, 이 인용은 그대로 예술과 예술가의 정체성이 혼연일체가 된 예술의 경우에도 그대로 부합하는 면이 있다(예술도 언어다). 

그렇게 평면으로 나타난 집 그림을 보면, 텅 빈 화면에 최소한의 라인으로만 구축된, 그러므로 집의 구조를, 골격을 드러내는 선으로 축조된 집들이 평면화의 경향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하나의 모나드가 반복 변주되는 모듈 구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그리고 형태를 최소한의 구조로 한정한다는 점에서는 구조주의적 환원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 비록 페인팅이지만 거침없고 활달한 붓질이 드로잉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드로잉적인 페인팅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배경 화면으로 비정형의 얼룩과 자국이, 가녀린 희미한 선들이, 흔적이, 스크래치가 중첩돼 있다. 그 자체 아마도 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그러므로 어쩌면 일상의 소회를, 감정을, 때로 상처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렇게 희미한 흔적 중에는 때로 집 형태도 있어서, 그러므로 집에 또 다른 집이 포개져 있어서 집과 함께 흘렀을 시간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에 아크릴과 숯가루를 혼합해 만든 안료로 그린 그림이 시각적 이미지와 함께 촉각적인 질감을 전해준다. 아마도 집에 대한 감정을 시각으로 그리고 질감으로, 그러므로 공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여기에 알루미늄 캔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들이 있는데, 알루미늄 캔을 해체해 평평하게 편 다음, 조각을 화면 위에 오리고 붙인 작업이다. 대개는 은박으로 드러난 속이 전면을 향하도록 붙이지만, 때로 캔 표면의 정보와 기호를 포함하고 있는 전면이 부분적으로 도입되기도 한다. 정형 비정형의 사각형 조각을 잇대어 붙인 것으로, 집의 변주된 또 다른 한 경우와 버전으로 보면 되겠다. 이 작업에서도 역시 작가는 평면을 두들기고, 찌르는, 그리고 여기에 우연을 가장한 스크래치를 통해 노동을 투사하면서 집의 사연과 사건과 같은, 집에 대한(그러므로 어쩌면 정체성에 대한) 감정의 질감을 옮겨 놓는다. 


발터 벤야민은 새로운 모든 것이 등장과 함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향수의 대상으로 전이될 운명에 있다고 했고, 그 운명을 오래된 미래라고 불렀다. 그 운명으로 세계는 멜랑콜리를 불러일으키고 노스텔저를 자아낸다. 그러므로 어쩌면 정체성이 혼성되는, 그러므로 짓고 허물기가 교환되면서(여기서 다시, 노동이 소환된다) 지층처럼 쌓이는 집이야말로 이런 오래된 미래의 표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오래된 집을, 기억을, 향수를, 그리움을 불러오고 싶은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벤야민은 예술이 망가진 세상을 수선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망가진 세상을 오래된 집에 대한 그리움으로 치유하고 싶은지도 모를 일이다. 망가진 노동의 의미를 회복하고 복원하는 것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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