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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현진/ 인연의 망, 관계의 망, 어쩌면 우주를 떠도는 에너지

고충환




염현진/ 인연의 망, 관계의 망, 어쩌면 우주를 떠도는 에너지 


고충환 | 미술평론가


작가 염현진은 원래 페인팅을 전공했지만, 중도에 설치미술과 개념미술(작가의 표현대로라면 미니멀리즘)로 전향했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당시만 해도 공모전이 나름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고, 여기에 큰상까지 수상한 이력이 있어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표현을 확장하려는 욕망의 자연스러운 표출로 볼 수 있겠고, 여기에 후기모더니즘 이후 탈장르 현상이 보편화되면서 나타난 다원주의 경향성과 종 다양성 논의에 부응하는 경우로도 볼 수 있겠다. 그렇게 작가는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고, 조각과 설치의 경향을 아우르는 자기 변신을 꾀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형식실험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그렇게 매 순간 자신을 현재진행형의 실험과 모색 속에 던져넣는 것에서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찾는다고,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한 자기(예컨대 불교에서의 진아와 같은)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가 찾아낸 소재가 실이다. 웬 실? 실에는 무슨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작가의 작업에서 실이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아 그 의미를 캐는 것이 상당할 정도로 작가의 작업이 갖는 의미를 밝히는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작업을 보면 크고 작은 원형과 원반을, 때로 사각형의 형태를 모체 삼아 그 위에 밑도 끝도 없이 실을 감아 나가는데, 그렇게 감긴 형태가 마치 누에고치가 변형되고 변주된 형태 같다. 작가는 이 일련의 작업이 어릴 때 해진 털실 옷을 풀어 목도리며 장갑, 그리고 더 작은 다른 옷을 짜곤 했던 생전 어머니의 소일(그러므로 일상)에서 착상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 만큼 작가의 작업에서 실은 어머니를 상징한다고, 나아가 어머니로 대변되는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를 테마로 한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도 보면 아라크네가 직물을 관장하는 아테나 여신에게 베 짜기 경쟁으로 도전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라크네는 비록 경쟁에서는 이겼지만 여신의 분노를 싸 영원히 베를 짜는 거미로 변신하고 만다. 루이스 부르주아가 거대한 크기로 확장된 거미를 조각한 이유도 바로 이런 신화적 해석에 바탕을 둔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실은 시간과 기다림 그러므로 참을성과 인내를 상징하고, 특히 불교에서 실은 인연을 상징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실을 감기 위해서는 모체가 있어야 하고 실패가 있어야 한다. 처음에 작가는 원형의 흙덩어리를 실패 삼아 그 위에 실을 감았는데, 평생 흙과 함께 한 농부의 삶을 살았던 아버지를 상징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후 원형을 비롯한 유선형과 같은 다른 형태로 변형되고 변주된 실패가 아버지를 상징한다고 해도 좋다. 생전 아버지의 소일(그러므로 일상)에서 착상된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실은 어머니를, 그리고 변형된 실패는 아버지를 상징한다. 

그런 만큼 작가의 작업은 자기가 유래한 근원을 소환한 작업이고, 존재의 뿌리를 캐는 작업이다. 자신의 유년을 되불러 온 작업이고, 존재가 유래한 원형을 더듬는 작업이다. 자기 정체성을 주제로 한 작업이고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이 강한 작업이다.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 했고,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존재가 유래한 원형을 더듬어 찾는 작가의 작업은 비록 작가 개인의 서사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사실은 우리 모두 그 서사(성장 서사와 정체성 서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예술은 주관적인 경험을 객관화하는 일이다). 

앞서 실은 시간과 기다림 그러므로 참을성과 인내를 상징한다고 했다. 작가는 변형되고 변주된 모체를 실패 삼아 그 위로 실을 밑도 끝도 없이 감아 나간다. 실을 감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반복을 통한 수행적인 측면이 있다. 실제로도 수행에 보면 반복 수행이 있는데, 무슨 일이든 반복하다 보면 마침내 눈을 감고도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순간 그러므로 도가 통하는 순간이 온다. 몰아를 통해 무아에 이르는, 반복 수행과정을 통해 마침내 자기가 지워지고 무아지경에 이르는, 그런 순간이 온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는 자기에 몰입함으로써 자기를 잃는 역설이 있고, 자기를 잃음으로써 자기를 얻는 이율배반이 있다(어쩌면 예술은 수행을 통해 역설을 맞아들이고 이율배반을 초대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수행적인 측면이 있다. 

이런 원형적인 이미지를 바탕으로 작업은 이후 속을 파낸 변형 오브제(압축 스티로폼을 소재로 한) 작업으로 변주되는데, 변형 오브제가 실패를 대신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작업은 그렇게 실패가 두드러져 보이는 설치작업으로, 그리고 실을 감는 행위가 강조되는 평면작업으로 각각 귀결된다. 실을 감으면서 평면작업으로, 실을 풀면서 설치작업으로 풀어내는, 그렇게 평면과 설치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후 원형적 이미지는 실을 감는 행위 자체에 주목하는 경우로 방점이 옮겨가면서 그 과정에 수반되는 명상적이고 수행적이고 자기 관조적인 경험이 강조된다. 다만 실을 감는 무한 반복과정을 통해 내면화의 경향성이 강조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감긴 실 이면에 얼핏 어둠을, 깊이를 숨겨놓고 있는 것도 같다. 작업과 함께 흘렀을 시간과 망각, 노동과 번민의 표상 혹은 그 물화 된 형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저마다 고립된 섬으로 나타난 존재를 표상하기도 하고,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 항해(그러므로 삶의 여로)를 표상하기도 하고, 막막한 우주를 떠도는 고독한 존재를 표상하기도 한다. 어우러지는 혹은 이지러지는 달의 주기 그러므로 일종의 달 시계를 표상하기도 한다. 표면에 별자리를 새겨 넣은 작품도 있고, 표면에 얼기설기 망으로 연결한 작품도 있는데, 아마도 인연의 망을, 관계의 망을 상징할 것이다. 우주를 떠도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비가시적인 에너지의 파장을, 우주 에너지 간 관계와 접속을 상징할 것이다. 


또 다른 작업에서 작가는 불경을 이루는 활자 하나하나를 낱낱이 해체해 재구성했다. 그렇게 재구성된 텍스트는 불경이 무색하게 그 의미를 읽을 수가 없다. 심지어 작가는 그렇게 해체하고 재구성된 활자를 바닥에 흩뿌려 사람들이 그 위로 밟고 지나가게 했다. 물이 담긴 유리병 속에 불경을 담아 해체한 작업도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멀쩡한 불경을 해체하고 재구성했을까. 왜 그 의미를 읽을 수 없게 만든 것일까. 불교에는 불립문자가 있다. 비록 불경이 문자로 기록돼 있지만, 정작 그 진정한 의미는 문자 너머에 있다는 역설이다. 그러니 문자에 매이지 말라는 주문이다. 그린 그림으로 미처 그려지지 않은 그림을 암시하고 상기하는, 예술이 꼭 그렇지 않은가(예술은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기술이다). 그렇게 작가는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예술의 됨됨이 그러므로 예술의 본성을 건드린다. 

그리고 작가는 현재 사회적기업의 조합원이기도 하다. 지역 커뮤니티와 연계해 산림치유지도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수년 전에 필수 과정을 이수하면서 관련 자격증도 취득했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예술에는 치유하는 힘이 있다. 예술과 자연이 매개된 치유는 실제로도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위한 유의미한 아이템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그런 만큼 그 자체가 작가의 작업의 폭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또 다른 한 계기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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