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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리뷰: 빛의 질감과 풍경을 보는 눈

고충환



포커스 리뷰: 빛의 질감과 풍경을 보는 눈

허수영, 학고재 갤러리, 10.14-11.19. 
박민하, 갤러리 휘슬, 11.18-12.31. 

고충환 | 미술평론가


허수영은 매일 아침 정원에서 물을 주면서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본다. 이슬방울 하나하나 안에는 비록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외계가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들어있다. 그토록 이나 작은 방울 속인 데도 말이다. 비록 반영된 상이지만, 큰 우주가 작은 우주 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큰 우주와 작은 우주가 하나로 통하는 가슴 벅찬 순간을 지금 보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큰 우주와 작은 우주가 서로 반영하고 반영된다는 사실이 그저 수사적 표현이 아님을 지금 자신이 증언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간혹 바닷가에 간다. 그리고 백사장에 모래를 보면서 유리구슬을 떠올린다. 영롱한 유리구슬을 보고 있으면 꼭 그 속에 행성이 들어있는 것 같다. 그렇게 유리구슬은 행성이 된다. 행성들이 모여 우주가 된다. 역순으로 보면 우주 속에 행성이 들어있고, 행성 속에 유리구슬이 들어있고, 유리구슬 속에 헤아릴 수도 없는 모래알이 들어있다. 그리고 모래알 속엔 물거품을 일으키며 수면에 아롱거리는 윤슬이, 물비늘이, 빛 알갱이가 들어있다. 그렇게 다시, 큰 우주 속에 작은 우주가, 작은 우주 속에 큰 우주가 들어있다. 

상상력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진즉에 자연 속에 들어있었던 것을 그저 투명하게, 순수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관찰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고, 그러므로 관념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을 통해서 확인한 결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모래알처럼, 풀잎처럼, 빛 알갱이처럼, 별빛처럼 헤아릴 수 없는 자연이 좋다. 그 말이 꼭 인간의 인식으로는 가닿을 수도 없고 가늠할 수조차 없다는 말처럼 들려서 좋다고, 아마도 작가는 생각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어떤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아마도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는, 이런 자연적 사실을 의미하고, 또한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다. 진실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하이데거는 예술적 진실이 과학적 진실이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 대해서는 과학 그러므로 논리로서보다는 예술 그러므로 감각으로 가 닿은 진실이고, 감각으로 열어놓은 비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그 진실에 어떻게 가닿고, 또한 그 비전을 어떻게 열어놓는가. 꽃 하나하나를 그리면서 꽃밭을 그리고, 풀잎 하나하나를 그리면서 풀더미를 그리고, 버섯 하나하나를 그리면서 버섯밭을 그리고, 곤충 하나하나를 그리면서 곤충 떼를 그리고, 나무 하나하나를 그리면서 숲을 그린다. 그렇게 작가는 많이 그리고, 겹쳐 그리고, 오래 그릴 것을 염두에 두고 그릴 수 있는 대상을 선택해서 그린다. 그렇게 그리다 보면 꽃밭이 되고, 풀더미가 되고, 버섯밭이 되고, 곤충 떼가 되고, 숲이 그려지는 것이 맞지만, 사실은 다만 논리적으로만 그렇지 실제로는 전혀 다른 그림이 되어버린다. 부분과 전체는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지 않다. 다만 부분은 부분이고, 전체는 전체일 뿐. 부분이 전체를, 전체가 부분을 서로 반영하고 반영되는 것은 맞지만, 이러한 사실은 다만 논리적 사실(혹은 관념적 실재)일 뿐 감각적 현실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질 들뢰즈는 반복이 차이를 생성시킨다고 했다. 자크 데리다는 모든 의미(이미지 또한 하나의 의미소이다)는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계속 미끄러질 뿐 궁극적인, 최종적인, 결정적인, 바로 그 의미는 끝내 붙잡을 수 없다고 했다. 동일성이 자신의 한 본성으로서 비동일성을 내장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자신의 본성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비동일성 그러므로 차이를 실현한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꽃 하나하나를 그린다고 해서 꽃밭이 되지는 않는다. 나무 하나하나를 그린다고 해서 숲이 되지는 않는다. 부분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라고 해야 할까. 유기적인 전체와 단순한 집합은 다르다고 해야 할까. 동일성을 반복하다 보면 실제로는 비동일성이 열린다고 해야 할까. 재현을 반복하다 보면 마침내 재현을 넘어서 버린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재현에서 시작한 그리기가 탈재현으로 넘어가고, 반복에서 유래한 그리기가 차이를 파생시키고, 현실에 바탕을 둔 그리기가 비현실 혹은 초현실을 열어놓는다. 자연적 사실에 바탕을 둔 그리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문득 관념적 사실(큰 우주와 작은 우주가 하나로 통한다는)이 열리는, 그리고 감각적 현실(그리기가 때로 생성시키기일 수도 있다는)이 열리는 각성의 찰나를 맞이했다고 해야 할까. 이 모두가 집요한 그리기, 편집증적 그리기를 통해 맞이할 수 있었던 현실이다. 작가의 그림은 집요한 그리기, 편집증적 그리기가 그저 수사적 표현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고, 때로 세계의 본성 그러므로 진실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도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모든 일 그러므로 그림은 이슬방울에서 반짝이는 빛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유리구슬의 표면에서 영롱하게 발하는 빛에 대한 감각적 반응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무수한 이슬방울들과 함께, 허다한 유리구슬들과 함께 빛 천지다. 더욱이 근작에서는 우주를 주제로 한 것인 만큼 화면은 온통 빛의 질감으로 넘친다. 춤추는 빛들의 향연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여기에 빛을 그리는 또 다른 작가가 있다. 박민하 작가다. 표면적으로 빛을 소재로 한 것이란 점에서 유사하지만, 빛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빛에 대한 다른 질감과 정서적 반응을 예시해주는 두 경우가 비교된다고 해야 할까. 다른 점은 또 있는데 허수영 작가가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있다면, 박민하 작가는 도회적이고 도시 친화적이다. 

단색화를 떠올리게 하는 절제된 색채감정으로 나타난 모노톤의 화면과 함께, 은회색이나 펄 성분을 포함한 안료로 바탕을 칠해 화면 자체가 은근한 빛을 발하거나 머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처럼 이미 그 자체 빛의 질감을 밀어 올리고 있는 바탕화면과 함께, 그림 속에서 빛은 화면 속 크고 작은 사각형들로 변주되면서 가볍게 경쾌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때로 만화처럼 아니면 폭죽처럼 터지기도 하고, 가장자리가 희뿌옇게 흐려진, 빗속이나 안갯속 헤드라이트 불빛이 꿈처럼 아롱거린다. 여기에 부분적으로 도입된, 가로 혹은 세로로 놓인 색띠가 빛의 스펙트럼을 상기시킨다. 

그림은 직선과 사선으로 구조화돼 있는데, 도시의 기하학적 구조를 연상시키고, 사선들이 만나는 소실점을 경계로 나뉘는 화면이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기하학적 구조와 함께 격자무늬가 또 다른 도시의 기하학을 위해 도입되는데, 큰 격자 속에 작은 격자가 포개지기도 하고, 아예 바탕화면을 이루기도 한다. 화면 위 크고 작은 사각형과 함께 빛의 질감 혹은 빛의 모나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밑칠이 은근하게 배어 나오는 중첩된 화면이나 때로 화면의 가장자리를 정의하는 틀이 도시의 감정과 함께 도시의 구조를 표상한 것일 터이다. 

낮에도 빛이 있지만, 도시에서 빛을 보려면 아무래도 밤이 더 어울리고, 그래서 인공적이다. 다시, 그래서 도시적인 밤의 정서와 인공적인 빛의 질감이 그림의 분위기를 감싼다고 해야 할까. 보통 도시의 밤을 밝히는 인공불빛을 도시가 어둠 속에 숨겨놓고 있는 욕망에 비유하지만, 작가의 그림에서 빛의 질감은 욕망보다는, 도시를 제2의 고향으로 둔 사람들에게 멜랑콜리와 같은, 노스탤지어와 같은, 부드럽고, 우호적이고, 살짝 우울한 어떤 정서적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빛의 질감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환기로 인해 소위 도시 회화(어반아트 혹은 시티스케이프)로 정의할 만한 경향성의 회화를 떠올리게도 된다. 

작가는 주제를 터널이라고 했는데,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통로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래서 현실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제의적 공간이라고도 했다.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 그러므로 다공성의 도시 감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보들레르로 치자면 플라뇌르 그러므로 도시 산책자의 감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두 작가를 이어주는 계기로 빛의 질감과 함께, 풍경을 보는 눈 그러므로 원근법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허수영의 경우에 원근법이 거시적이고(우주적인) 미시적인(이슬방울에 맺힌 우주를 보는) 그러므로 줌인(내면마저 파고드는)과 줌아웃(우주로까지 확장되는)이 교차 되는 형태로 나타난다면, 박민하에게서 원근법은 상대적으로 평면적이고 모던한 느낌의, 그래서 도시 산책자의 감정에 더 잘 어울리는 경우로서 현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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