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무비 無比/ 미니멀리즘, 공간과 장소 특정성

고충환



무비 無比/ 미니멀리즘, 공간과 장소 특정성 


고충환 | 미술평론가

무비(無比). 아주 뛰어나 비교할 것이 없다. 특히 불교에서 강조되는 의미다. 그 말이 불교에서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뛰어나다는 것, 그것은 가치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추구하는 가치는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비교할 수가 없다. 다시 그러므로 무비 곧 비교할 수 없는 가치는 종교적이다. 정신적이다. 관념적이다. 현실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초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이다. 인간은 현실을 넘어서는 것, 인간의 인식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멀고 아득한 것을 지시하기 위해 종교를 발명했고 정신을 발명했다. 칸트는 그것을 물 자체라고 불렀고, 루시앙 골드만은 숨은 신이라고 불렀고, 칼 융은 원형이라고 불렀고, 발터 벤야민은 아우라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번 전시가 지향하는 미니멀리즘과도 통하는 색면 화가 바넷 뉴먼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마크 로스코는 우회적으로 저마다 자신의 그림을 숭고라고 불렀다. 
그렇게 인간은 초현실을 그리고 비현실을 지시하기 위해 종교를 발명하고 정신을 발명했다. 그리고 예술을 발명했다. 흥미롭게도 예술을 매번 매 순간 재현 불가능한 일회적인 사건으로 정의한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역시 예술을 숭고라고 불렀다. 그렇게 예술은 숭고를 추구한다. 최소한 숭고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무비 곧 비교 불가능한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 가치는 예술에서, 특히 조형예술에서 어떻게 현실화하는가. 비례를 매개로 현실화한다. 그러므로 다시, 무비 곧 비례가 없다. 비례가 없는 것은 없으니 세상에 없는 비례다. 세상에 없는 비례인 만큼 황금비율(비례)이고 신성 비례다. 고대 그리스에서 비례는 수학을 의미했고, 신으로부터 유래했다. 그 신성한(그러므로 어쩌면 숭고한) 비례를 최고의 예술(가장 수학적인 예술)인 음악에서 음률 곧 리듬으로, 그리고 조형예술에서 각 조화와 균형으로 풀었다. 플라톤식으로 말하자면 예술에서의 음률이, 조화가, 균형이 신성한 비례를, 그러므로 어쩌면 신성한 존재를 상기시킨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가 추구하는 무비의 의미는 사실은 무한 확장되는 비례, 무한 변주되는 비례, 그렇게 열린 비례, 경계가 없는 비례, 그리고 마침내 무한에 가닿는(무한을 상기시키는) 비례, 종래에는 스스로 무한이 된(그러므로 신성이 되고 숭고가 된) 비례가 될 것이고, 그 비례를 예시하기 위해 미니멀리즘 작가들이 초대된다. 주지하다시피 미니멀리즘의 형식적인 문법은 반복과 구조로 나타나고(그런 점에서 미니멀리즘은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최말단에 있다), 그 자체가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져 보이는 형식적인 특징이랄 수 있는 정사각형의 변주와도 통하고, 다시 그 자체가 무비 곧 무한 변주되고 확장되는 비례를 예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제와 형식이 부합하는 면이 있다. 


그렇게 초대 전시된 작가들을 보면, 우선 도널드 저드는 반복과 구조를 매개로, 하나의 모나드를 반복하는 모듈 구조를 매개로,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최소한의 구조를 매개로 사실상 미니멀리즘을 창시했다고 해도 좋다. 즉물적인 오브제와 익명적인 작품과 장소 특정성이 이러한 최소한의 구조 그러므로 겨우 예술이 되게 만드는 최소한의 조건이 되어 준다. 공장에 주문 생산해 만든, 공장에서의 재질(물성) 그대로 만든, 그리고 여기에 공산품과 구별되지 않는 외관마저 그대로인, 조각도 아니면서 회화도 아닌, 조각도 아니면서 공산품도 아닌, 그러므로 어쩌면 비 혹은 탈조각으로 조각의 경계를 넘어서는 즉물적인 오브제가 매개 되면서 공간을 장소를 재설정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초대되지는 않았지만, 솔 르윗 역시 팩스로 설계도를 보내주면 누가 시공을 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과정을 통해 창작 주체가 모호해지는, 이후 저자의 죽음 논의로까지 이어지는 익명적인 작품을 실현한다. 

그렇게 미니멀리즘이 작가의 개성을 지우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개성을 얻는 역설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다면, 아그네스 마틴은 감각적인 선을 매개로, 서정적인 선을 매개로, 그러므로 어쩌면 전통적인(그리고 정통적인) 미학을 바탕으로 다시금 개성을 소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후기 미니멀리즘으로 분류된다. 부드러운, 감각적인, 희미한 색상으로 선이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는데, 그리고 여기에 선과 면이 구별되지 않는데,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물체도 방해도 장애물도 없는 세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선과 그리드로 나타난 내적 질서를 표현한 것이고, 현실 너머의 초월적이고 정신적인 세계를 표현한 것이고, 작가의 이상세계를 표현한 것이고, 그러므로 어쩌면 숭고를 표상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신수혁은 캔버스 위에 가로 선과 세로 선을 겹쳐 그린다. 수도 없이 겹쳐 그리면서 첩첩한 레이어를 만들고, 그 레이어의 이면에 투명한 깊이를 만든다. (반)투명한 깊이는 은근한 청색 조의 모노톤으로 치환된 색채감정과 함께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느낌을 준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순간의 감정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관계를 그린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삶이란 어쩌면 관계의 망을 짜는 일일지도 모른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에게 그림이란 관계 위에 관계가 중첩되는, 관계로부터 파생된 순간순간의 감정을 그린, 그러므로 관계로 표상되는 삶의 알레고리를 그린 것일 터이다. 

그리고 윤상렬은 샤프펜슬로 촘촘하고 엄격한 직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 위에 디지털 프린트로 표현된 또 다른 선을 얹는다. 그림과 프린트가 구분되지 않는데, 진실과 거짓의 근원을 탐구한 것이라고 했다. 그림과 이미지, 감각적 실재와 허구적 이미지(허상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이미지, 그러므로 어쩌면 이미지의 이미지?)의 경계와 차이를 묻는 작업일 것이다. 가느다란 직선 위에 또 다른 가느다란 직선이 포개진 그림이 얼핏 검은 화면을 보는 것 같고, 제목처럼 침묵을 보는 것 같고, 심연을 보는 것 같고, 어둠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고, 어둠 자체를 보는 것도 같다. 연필로 그린 것이란 점에서 최근 회화의 한 경향으로 회자 되는 펜슬리즘과도 그 맥을 같이 하는 한편, 태도와 관련해서는 절제된 그리기(기억 속 잔상을 엄격한 직선으로 환원한 것이란 점에서), 강박적인 그리기, 편집증적인 그리기, 집요한 그리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김이수는 자신의 그림을 앵프라맹스 랜드스케이프, 끝도 없고 경계도 없는 풍경, 그러므로 무경계를 그린 것이라고 했다. 사실 풍경 그러므로 자연은 원래 경계가 없었고, 처음부터 무경계였다. 그렇게 무작정 열린 경계, 경계 밖으로 열린 경계를 인간이 인식의 자장 속으로 불러들이면서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금을 긋고 경계를 한정한 것일 뿐이다. 그렇게 사실은 인식할 수 없는 경계를 그린 것이고, 인간의 인식이 가닿을 수 없는 경계를 그린 것이란 점에서 어쩌면 경이의 풍경을 그린 것이고, 숭고의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경이로운 풍경과 숭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은 아무래도 옆으로 긴, 수평이 강조된 그림에서 실감 나게 와닿는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그림을 수직으로 세웠다. 그래서 밑도 끝도 없는 느낌, 아득하고 막막한 느낌보다는 정제되고 절제된 느낌, 자연보다는 내적 질서를 표상한 느낌을 준다. 색다른 경험이었고 독해였다. 

이처럼 같은 그림이지만, 어떤 그림들은, 어쩌면 모든 그림이 다 연출(공간연출)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고 읽힐 수도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실제로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그만큼 공간연출이 결정적이고, 또한 쉽지 않은 일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전시공학과 관련된 문제일 것인데, 이번 전시에서 빛을 발하는 것인 만큼 따로 주목해볼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장소 특정성, 하나의 오브제가 들어서 공간을 재설정하는 것(공간을 긴장하게 만든다거나 움직이게 만든다거나 성소에서처럼 숭고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지금 여기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음을(그리고 일어나고 있음을) 증명하고 보존하는 것, 그러므로 어쩌면 장소를 공간으로 치환하는 일, 그러므로 공간연출은 미니멀리즘에서 결정적이다. 공교롭게도 큰 사각형 속에 작은 사각형이 배열되고 배치되는, 그 과정에서 음률이, 조화가, 균형이 작동하는, 그리고 그렇게 개별 작품과 전시 공간과의 유기적인 관계가 감각적 쾌감(그리고 어쩌면 숭고)을 자아내는 미니멀리즘의 형식적인 그리고 구조적인 성질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또 다른 성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