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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현/ 존재의 깊이를 짓는, 그 위에서 감각의 춤을 추는

고충환



박시현/ 존재의 깊이를 짓는, 그 위에서 감각의 춤을 추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호흡을 가다듬고 시공을 넘나들며 우주를 한 바퀴 돌아 시간 여행을 한다. 길게 바느질한 선들은 시간의 병렬 같은 것. 도대체 시간은 무엇인지. 과거는 기억들이 압축되어 다시는 떨어지지 않고 저 깊은 바닥에 침전한 채로 모습을 드러낸다. 선과 색상으로 경계 지어진 영역은 이승과 저승과의 경계이다...바다의 수평선, 구불구불한 시골길,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하천, 때로 하늘을 향해 치솟은 높고 낮은 건축물을 차용한다(그러므로 그린다)...작업은 끊임없이 나다움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다. 나다움이 살아있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춤을 추게 될 것 같다...(내 그림은) 삶에 대한 고백이다.
- 작가 노트

니체는 예술가의 내면에 두 개의 충동이 산다고 했다. 아폴론적 충동과 디오니소스적 충동. 자기 내면에 질서의 성소를 축조하려는 충동과 우연하고 무분별한 건강한 생명력이 자기실현을 얻는 충동. 그렇게 성향에 따라서 질서 의식이 강조되는 작가가 있고, 무분별한 생명력의 분출이 힘을 얻는 작가가 있다. 에토스가 강한 작가가 있고, 파토스가 지배적인 작가가 있다. 회화적 경향성으로 치자면 각 기하학적 추상과 추상표현주의로도 유형화할 수 있겠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충동이 하나의 인격 속에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코스모스와 카오스가 길항하고 부침하는, 이율배반적인, 정신분열증적인 인간 실존의 보편 조건에 대한 레토릭 혹은 알레고리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그 두 충동이 하나의 인격 속에 동거하면서 공존하는 작가가 있다. 두 예술적 충동이, 두 개의 회화적 경향성이 똑같이 자기실현을 얻는 작가가 있다. 

박시현이 그렇고, 그의 그림이 그렇다. 한쪽에 기하학적 추상이 있다면, 다른 한쪽에 추상표현주의가 있다. 한쪽에 본질(아니면 본성?)을 파고드는 회화적 경향성이 있다면, 다른 한쪽에 감각적인, 무분별한 생명력이 자기실현을 얻는 회화적 경향성이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기하 추상과 추상표현, 질서와 무분별한 생명력, 본질과 감각적인 표현 사이의 스펙트럼을 오가며 그 경계를 넘나드는 회화적 경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 그렇게 이율배반이 자기실현을 얻는 작가의 그림은 비록 작가 개인의 사사로운 예술혼에 연유한 것이지만, 동시에 마찬가지로 이율배반적인(그러므로 부조리한?) 인간 실존의 보편 조건에 대한 논평(논증?)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여기에 이율배반을 파고드는 것에, 부조리에 맞서는 것에, 그리고 모순율을 돌파하는 것에 예술의 존재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이율배반, 부조리, 그리고 모순율은 말하자면 창작 주체가 자기를 투자해도 좋을 도구, 예술혼의 도구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이 그 표상 그러므로 예술의, 그리고 동시에 삶의 표상이 되고 있다고 해도 좋고, 최소한 그 표상을 위한 실천 논리를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먼저 기하학적 추상의 회화적 경향성(다른 그림에서 정형 비정형의 색면 구성으로 확대 재생산되기도 하는)을 보자. 보통 기하 추상이라고 하면 하드에지를 떠올리기 쉬우나,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의 그림은 그 경향성과는 거리가 있다. 보통은 수평선을, 그리고 수직선을, 때로 사선을 반복 중첩 시킨다거나, 여기에 더러 수평과 수직선을 교차하는 화면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의 그림에서 기하 추상의 최소 단위원소에 해당하는 선을 반복적으로 긋는 행위(선 긋기)가 아니라면, 기하학적 추상의 회화적 경향성과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 

형식주의와 환원주의에 천착한 모더니즘 패러다임과도, 그리고 모더니즘 패러다임을 지지하는 소위 차가운 추상회화의 경향성과도 사뭇 혹은 많이 다르다. 모더니즘 고유의 문법(반복적인 선 긋기)을 취하면서도 동시에 비정형의 개성적인 붓질(스트로크)에 연유한 회화적인 분위기를 다시 소환하고 있다거나, 그리고 여기에 중첩된 선 이면에 투명한 깊이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탈 혹은 비 모더니즘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모더니즘에 대한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태도며 입장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야 할까.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반복적인 선 긋기는 말하자면 회화의 형식요소에 대한 환원주의적 태도로서보다는 자기표현(그러므로 작가적 아이덴티티)을 위해 찾아낸 사사로운 형식이고 방법이었다. 개성적인 붓질이 그렇고, 회화적인 분위기가 그렇고, 투명한 깊이가 그렇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선 긋기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시간 헤아리기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 그러므로 삶의 순간순간을 몸으로 더듬어 감각하고 표현하는(그러므로 살아내는), 어쩌면 가장 원초적인 회화적 행위(그러므로 삶을 회화로 환치한 행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몸으로 더듬어 삶을 감각 하면서 기억을 불러오고, 회한을 불러오고, 원초적 자기를 불러오는 행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행위는 다분히 반복적이고 우연적일 것이다. 망아, 그러므로 자기를 잊는(그리고 잃는), 다시 그러므로 반쯤은 이미 무의식적일 것이다. 칼 융은 개인적인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원형이란 어쩌면 자기가 유래한 곳 그러므로 유년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상실한 고향에 대한, 존재의 근원에 대한 회귀 의식(아니면 회향 의식?)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이상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 이상향을 의미할 것이다. 작가에게 이상향은 말하자면 도래할 미래보다는, 이미 상실한 과거를 의미할 것이고, 그리움과 회한으로 남은 시절 감정을 의미할 것이다. 작가는 본질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화면의 이면에 투명한 깊이를 만드는 행위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므로 때로 무의식보다 깊은 자기 내면으로부터 상실된 자기, 아득한 자기, 어쩌면 억압된 자기 그러므로 자기_타자를 발굴하고 캐내는,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되새김질하는 자기반성적인 행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련의 회화적 경향성에 대해서는 자기 내부로부터 발굴된 풍경 그러므로 내면 풍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삶을 더듬어 삶의 질감을 감각 하는 행위, 시간을 더듬어 삶의 시간을 헤아리는 행위가 그 내면 풍경을 매개하는데, 때로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 행위와 함께 화면에 한 땀 한 땀 수놓는(엄밀하게는 이어붙이는) 바느질이 대신 매개하기도 한다. 시간을 선(지속)으로 더듬어 감각 했다면, 이번에는 점(순간)으로 더듬어 감각 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반복적인 선 긋기와 바느질은 삶이라는 시간을 더듬어 헤아리는 원초적 행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수직선과 수평선이 교차하는 그림이 관계를 표상한다. 삶이란 인연과 인연이 교차 되는 관계를 만드는 일이고, 그렇게 관계가 직조되는 직물 그러므로 관계의 망을 짜는 일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는 각 선과 점으로 나타난 시간을 매개로 자기 삶에 깃든 관계의 망을 짜고 인연을 맞아들인다. 기억을 소환하고, 회한을 보듬는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상실한 이상향을 그렸다. 


그렇게 비정형의 기하학적 패턴이 강한 일련의 그림들이 때로 무의식보다 깊은 내면 풍경을 그린 것이고, 작가의 표현으로 치자면 본질적인 국면이 강한 그림들(자기 내면을 투명하게 반영한 그림들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 내면에 질서로 축조된 성소를 그린 그림들)이라면, 여기에 감각의 표층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한 또 다른 그림들이 있다. 추상표현주의적인 그림이고 액션페인팅 그러므로 소위 몸그림으로 정의할 만한 그림들이다. 몸이 부르는 대로 그린 그림이고,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들이다. 반 무의식적인 그림이고, 자동기술적인 그림이고, 자유 연상기법에 연동된 그림이고,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견인되는 그림이고, 풀어 헤쳐진 의식 그러므로 반쯤 방기 된 의식으로 그린 그림들이다. 

자기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내향적이고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그림과는 비교되는, 그렇게 자기 내면에 투명한 깊이를 만들어 질서의 성소를 짓는 그림과는 비교되는, 건강한 생명력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분출이 여실한 그림들이다. 의식이 그린 절제된 그림과는 비교되는, 작가보다 앞질러 무의식이 그린, 그렇게 그렸다기보다는 그려진 그림들이다. 작가보다 앞질러 무의식이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때로 작가 자신에게마저 낯선 자기_타자가 그린 그림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회화란 매 순간 재현 불가능한 일회적인 사건이라고 했다. 그리고 질 들뢰즈는 작가의 매개로 인해 비로소 감각으로 등재된, 그러므로 작가의 매개가 없었더라면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그리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라고 했다. 

그렇게 선이 춤을 추는, 드로잉이 여실한, 분방한 색채감정이 들뜬 기분(리듬감? 바이오리듬?)을 자아내는 작가의 또 다른 그림들이 미증유의 감각 지평을 탐색한다. 미증유라고 했다. 그러므로 어쩌면 아직은(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여전히) 미답인 자기_타자를 탐색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그리기는 살기와 동격이 된다. 작가에게 그리기란 말하자면 삶의 질감을 더듬어 찾는(시간을 거슬러 추억하는? 원형적 자기를 찾아가는?) 행위이며 과정이다. 바로 삶의 질감 그러므로 생활감정과 생활철학이 질료적인 형식을 얻어 체화되는 과정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 생활 오브제가 들어온다. 의도적이고 체계적이고 계획적이라기보다는 임시방편의, 임시변통의,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밟히는 대로 작가에게 포획된, 그렇게 붙잡혀 그림이 된 오브제들이다. 작가가 드로잉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종이 작업이 그렇다. 

타블로 작업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종이 작업에서 콜라주의 경향성이 뚜렷하다.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편집과 재구성이 뚜렷한데, 현대미술의 브리콜라주와 브리콜레르의 경향성과 통하고, 후기구조주의의 탈맥락과 재맥락의 경향성과도 통한다. 맥락이 달라지면(일상에서 그림으로, 레디메이드에서 오브제로, 기능에서 정서적 환기로)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렇게 의미는 맥락을 옮겨 다니면서 자기를 항상적으로 비결정적인 상태, 가역적인 상태, 유보적인 상태, 열린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 예술의 존재 의미는 뻣뻣하게 죽은 의미를 해체해 처음 의미, 원래 의미를 되찾는 것에 있고, 그런 예술의 존재 의미와도 통한다. 

한편으로 콜라주로 나타난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편집과 재구성의 경향성은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으로 나타난 후기구조주의의 주체와도 통한다. 그 주체 감정이 한편으로 불안하고 불안정하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미증유의 지평으로, 미답의 영토를 향해 무작정 열려 있다. 그렇게 콜라주에 바탕을 둔 작가의 종이 작업이 임의적이고, 잠정적이고, 비결정적이고, 움직이는(스스로도 움직이고, 사람들의 마음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작업은 끊임없이 나다움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다. 나다움이 살아있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춤을 추게 될 것 같다. 나에게 그림은 삶에 대한 고백이다, 라고 작가는 고백한다. 그 고백이 하이데거의 존재다움을 상기시킨다. 삶이란 어쩌면 존재가 존재다움을 상실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존재다움이란 바로 이런, 위급상황에 대한 처방으로서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때로 예술은 존재가 존재다움을 회복하는 길이며 방법일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고백이, 그리고 그 고백을 실천한 작가의 작업이 존재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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