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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재는 일, 그러므로 세계를 어떻게 잴 것인가, 하는 문제

고충환



길이와 넓이와 두께에 관한 시간/
세계를 재는 일, 그러므로 세계를 어떻게 잴 것인가, 하는 문제 


고충환 미술평론가


윌리엄 브레이크는 컴퍼스로 세상을 재는 하나님을 그렸다. 알브레히트 뒤러 역시 컴퍼스로 세상을 재다가 낙심한 천사를 그렸다. 그리고 우울이라고 불렀다. 세상을 재는 일에 실패했으니 낙심할 만하고 우울할 만도 하다. 엄밀하게 말해 실패했다고 할 수도 없다. 그가 재는 것은 감각적 실재가 아닌, 감각적 실재를 빌려 사실은 관념적 실재, 그러므로 헛것을 재는 일이므로. 헛것에 정답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므로. 도처에 정답이 있을 것이므로. 열린 의미(움베르토 에코)를, 차이를 생성시키면서 반복되는 의미(질 들뢰즈)를, 차이를 만들면서 미끄러지는 의미(자크 데리다)를 재는 일일 것이므로. 의미 바깥에 의미를 세우는 일(모리스 블랑쇼)일 것이므로. 발화되지 못한 채 죽은, 혀끝에 맴도는 이름, 그러므로 어쩌면 그리움을 부르는 일(파스칼 키냐르)일 것이므로. 여기서 하나님과 천사와 예술가는 동격이다. 아마도 세상을 재는 일에 실패한 하나님과 천사는 예정된 실패를 수행하는 예술가의 우울한 초상이고, 알레고리일 것이다. 

전시 주최 측은 이번 전시의 제목을 <길이와 넓이와 두께에 관한 시간>이라고 불렀다. 왜 그렇게 불렀을까. 길이와 넓이와 두께는 세계를 재는 도량이고 단위다. 아마도 감각적 실재를 빌려 관념적 실재를 재는, 그러므로 헛것을 재는, 다시 그러므로 예정된 실패를 수행하는 예술가의 일을, 그 일이 갖는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일에, 그 의미에 부합하는 작가들을 초대 전시한 것이 아닐까. 


이인현은 자신의 작업을 회화의 지층이라 부르고, 옆에서 바라본 그림이라고 부른다. 왜 그렇게 불렀을까. 작가의 작업에서 결정적인 것으로 치자면 두께를 갖는 변형 캔버스와 번지고 스며드는 기법이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면, 물감이 캔버스의 여백을 향해, 모서리를 넘어, 때로 보이지도 않는 캔버스 안쪽으로 번지고 스며든다. 그렇게 안쪽과 바깥쪽 할 것 없이, 정면과 측면과 아래 윗면 할 것 없이,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 할 것 없이 물감이 번지고 스며든다. 그림은 그렇게 번지고 스며들다가 멈춘 얼룩을 보여준다. 아마도 전시 타이틀에서 시간이란 그렇게 물감이 번지고 스며들면서 멈추는데 소요되는 과정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이 그림을 그리는 데 걸리는 시간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충분히 번지고 스며들어 몸통을 이루는 회화의 과정을 체화하고 있는, 두께를 갖는 캔버스를 작가는 회화의 지층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렇다면, 옆에서 바라본 그림은 또한 무슨 의미인가. 작가의 그림에는 딱히 정면이라고 부를 만한 정면은 없다. 마찬가지로 그런, 측면도 없고, 윗면도 없고, 아랫면도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정면은, 측면은, 윗면과 아랫면은 그림 도처에 있다. 작가의 그림은 지층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심지어 보이지 않는 그림 안쪽에도 있다.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도처에서 그림을 볼 수 있는 그림, 도처에 그림이 있는 그림, 심지어 보이지 않는 안쪽에 마저 그림이 있는 그림을 의미할 것이다. 그림을 보는 눈에도 관성이 있어서 우리는 저절로 그림의 정면을 찾게 된다. 그러므로 작가는 따로 정면이 없는 그림(그러므로 모두가 정면인 그림)으로 정면성의 관성을 도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비록 그림이 시작될 수 있는 최소한의 계기는 작가에 의한 것이지만, 정작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물감이고 번지고 스며드는 물감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그림의 시점에 작가가 있고, 그림의 종점에 그림이 있다. 그렇게 작가는 그림 스스로 그림을 그리도록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박기원은 자신의 작업을 넓이라고, 때로 수평이라고 부른다. 이런 부름이 암시하듯 작가는 공간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실제로도 작가는 공간설치작업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공간설치작업은 여타의 설치작업과 구별되는데, 공간 자체를 주제화한 것이 다르다. 감각적이고 비 감각적인(그러므로 어쩌면 관념적인), 자연적이고 인공적인 재료를 질료로 다른 공간 경험을 유도하는 것인데, 공간 자체를 대상화한 것이란 점에서, 때로 텅 빈 공간을 전시한 것이란 점에서 사건이 매개되는, 사건에 방점이 찍히는 장소 개념과는 다르다. 

작가는 진즉에 이런 공간설치작업과 함께 평면 작업을 병행해왔는데, 상보적인 관계, 상호 호환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면 되겠다. 평면 작업은 말하자면 바람, 공기, 질감, 색감, 빛깔, 온기, 습기, 분위기, 그리고 사사로운 기억과 같은 감각적이고 비 감각적인 질료를 매개로 한 공간 경험 그대로를 평면 위에 옮겨놓았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림 속에는 벽과 벽이 맞닿아있는, 벽과 천장이 맞닿아있는, 벽과 바닥이 맞닿아있는, 수평과 수직, 사선과 사선이 맞닿아있는 공간이 있다. 공간이 있다기보다는 공간이 암시되는데, 작가는 아마도 공간설치작업에서도 역시 이런, 암시적인 공간을 의도했을 것이다. 

그렇게 암시적인 공간 위로 시간이 흐르고, 기억이 흐르고, 빛깔이 흐르고, 온기가 흐르고, 질감이 흐른다. 이처럼 흐르는 질료, 어쩌면 흐르는 감각을 표출하기에 한지가 제격이다. 그래서 작가는 한지에 주로 모노 톤의 채색을 올리는데, 부드럽고 은근하면서 빛을 머금은 것 같은 색감을 얻을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한지는 (반) 투명성을 가지고 있고, 그 위에 색을 칠하면 색을 먹는다. 그렇게 같은 색이라도 짙은 부분을 삼키고 엷은 부분을 뱉어낸다. 그렇게 작가는 진즉에 공간설치작업에서부터 추구해왔던 공간의 질감, 색감, 빛깔, 분위기 그대로를 한지 채색작업에 옮겨놓기 위해 지난한 형식실험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공간설치작업과 평면 작업이 부합하는 분위기에 도달했을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실제로는 아득한 것, 먼 것인데 마치 지금 여기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아우라라고 했고, 우리 말로 옮기면 분위기라고 했다. 작가 이인현과 박기원은 흔적, 얼룩, 상기, 그리고 암시와 같은 불구의 언어, 불완전성의 언어를 매개로 각자 이런 회화적 분위기를 추구해왔고, 마침내 그 두 분위기가 상호적이라고 해도 좋을 지점에 도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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