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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내면으로의 여행, 식물에서 존재로 가는 길

고충환



김지영/ 내면으로의 여행, 식물에서 존재로 가는 길 


고충환 미술평론가


길에 핀 들풀의 생명력과 작은 존재의 가치를 생각한다. 바람결에 스치듯 길가에서 마주한 그들. 그곳에 남겨진 기억 속에서, 그곳을 지나 나 자신과 함께한 기억을 맞이하며 내 작업은 시작된다. 자연의 유기적인 형상을 찾아가는, 사물이 가진 존재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존재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여행으로부터 내 작업은 비롯된다.
- 작가 노트

곰브리치는 재현과 표현이 상호적이라고 했다. 재현적인 그림은 어느 정도 표현적이기도 하고, 표현적인 그림은 어느 정도 재현적이라고도 했다. 그러므로 재현적이기만 한 그림도, 표현적이기만 한 그림도 없다고 했다. 여기서 재현은 사물 대상의 객관적 존재를 향하고, 표현은 사물 대상에 대한 주관적 해석의 형태로 나타난다. 모든 창작 그러므로 예술은 유형무형의 소재를 전제로 한 것이고, 그 소재에 대한 사사로운 해석의 산물이다. 사사로운 해석? 여기서 작가는 표현의 주체가 되고, 해석의 주체가 된다. 그리고 그림에서 표현은 작가가 개입하고 매개된 질량이 된다. 모든 그림은 자기표현을 전제로 한 것이고, 그러므로 어느 정도 자화상이기도 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사물 대상에 자기를 투사하는 행위와 과정을 통해서 세계를 자기화하는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감정이입이라고 해도 좋고, 공감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공감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 세계가 자기를 열어 보이는 사건에 대한 순간 포착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 

그렇다면 작가 김지영은 세계와 어떻게 공감하는가.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는가. 세계에 어떻게 개입하고 매개하는가. 그러므로 세계에 숨은 자기, 그러므로 자기_타자를 어떻게 발굴(발견)하는지 볼 일이다. 


작가 김지영은 목 가구디자인을 전공했다. 이 베이스로부터 세 가지 갈래의 작업이 유래한다. 전공(생활예술)에 충실한 작업이 있고, 목조 작업이 있고, 페인팅 작업이 있다. 가구디자인의 두 축이 구조와 칠(옻칠)이라고 할 수가 있고, 목조 작업과 페인팅 작업은 바로 이 축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세 갈래의 작업이 각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그 이면에서 하나로 통하는, 상호 보완적인, 그런 작업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전공이라고 해서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작업에 대한 자기 확장성이 없으면, 자기 확장성에 대한 자의식이 없으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에 대한 욕망(파토스? 내적 필연성?)과 함께 자기반성적 사유와 실천이 없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목조를 보면, 각 부조와 환조가 있다. 목판에 판각으로 새김질한 연후에 채색을 입힌 부조가 그림과 조각 사이 그러므로 일종의 그림 조각이라고 한다면, 아예 작정하고 조각을 한 경우가 환조에 해당한다. 형태 위에 채색을 입힌 것이므로 채색조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소재로는 화초와 화분을 들 수가 있을 것인데, 식물 특유의 유기적인 흐름을 포착한, 포개진 잎맥의 섬세한 곡선을 살린, 나무 고유의 목질과 결을 강조한 군더더기 없는 형태가 단아하고 정감 어린 느낌을 준다. 관찰한 그대로라기보다는 식물의 생명력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생명력을 표현한 것이고,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인 생명력을 가시적인 형태를 빌려 표현한 것일 터이다. 대개 화분과 화초가 쌍을 이룬 경우들이지만, 더러 화분이 없이 추상화된 형태와 화초가 한 몸을 이룬 조각도 있다. 

이 일련의 조각을 통해 작가는 아마도 땅(각 화분과 추상화된 형태로 표상된)에 뿌리를 내린 화초를 통해 대지의 생명력을 더 가까이 더 직접적으로 느껴보고 싶었을 것이다. 가장 일상적인 소재 그러므로 자기와 일상을 같이하는 자연 소재를 통해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위안을 선물하고 싶었을 것이다. 휴식의 순간을, 쉼의 계기를 선물하고 싶었을 것이다. 


화초를 소재로 한 작가의 조각은 섬세하고 정적이고 여성적이다. 자연의 유기적인 형태에 여성의 성적 정체성이, 아니면 미적 감수성이 부합한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제작 과정에서 자기표현을 억제하고 절제했을 것이다. 특히 생명력을 표현할 때 갑갑했을 것이다. 생명력은 자연의 본성인데도 말이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페인팅 작업에서는 이런 자연의 건강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이 자기표현을 얻는데 거침이 없다. 
조각과 마찬가지로 화초를 소재로 한 것이지만, 나무라고 해도 좋고, 잠정적인 숲이라고 해도 좋고, 길에서 마주친 이름 없는 들풀이라고 해도 좋다. 그저 식물의 형태를 한 암시적인 형태라고 해도 좋다. 실제로 관찰한 그대로라기보다는 머릿속에 이미 들어있는 형태와 마음속에 간직된 느낌을 좆아 그린, 그러므로 몸이 부르는 대로 그리고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것임이 분명해 보이는 그림인 만큼 식물의 얼굴을 한 존재를 그린 것 그러므로 존재의 메타포라고 해도 좋다. 그만큼 조각과 비교해 볼 때 자연의 본성에 가깝고 존재의 본성에 가깝다. 자연의 그러므로 존재의 본성이란 건강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의 분출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고, 그 생명력이, 그 본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건강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의 분출이라고 했다. 작가의 그림은 마치 이러한 생명력을, 생명력을 내장한 자연 그러므로 존재의 본성을 실현하기라도 하듯 춤추는 불꽃 같고, 춤추는 사이프러스 나무 같고, 춤추는 측백나무 같다. 아마도 식물의 형태를 빌려, 실상은 내적 파토스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작가는 작업을 존재의 의미(그러므로 존재하는 이유)를 찾아 나서는 여행에 빗대는데, 아마도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을 의미할 것이다. 그 끝에서 자기_타자와 만나는 여행을 의미할 것이다. 그 여로에서 작가는 한 줄기 빛을 길잡이 삼는다고 했는데, 바로 자기 내면에 이글거리는 파토스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작가에게 작업이란 존재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것이고, 자기_타자와 만나는 것이고, 자기 내면의 파토스와 대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억압된 자기와 맞닥트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억압된 자기와 화해하는 것이다. 여전히 식물의 형태가 남아있지만, 조각과 비교해볼 때 현저하게 우연하고 무분별하고 암시적인 형태가 이런 읽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 중 조각은 어쩌면 남에게 주는 선물이고, 회화는 자기에게 주는 선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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