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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 익명적인, 흔들리는, 공허한 사람들, 그리고 어쩌면 풍경마저도

고충환



문호/ 익명적인, 흔들리는, 공허한 사람들, 그리고 어쩌면 풍경마저도 


고충환 미술평론가

지금은 고전이 됐지만,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고 했다. 미디어는 다만 메시지를 실어 나르는 용기일 뿐, 미디어가 달라진다고 해서 메시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상식을 재고하게 만드는 파격이 있다. 미디어는 몸이 확장된 것, 그러므로 미디어가 곧 몸이라고도 했다. 실제로도 눈을 대신하는, 귀를 대신하는, 손을 대신하는, 그러므로 감각을 확장하는 매체들이 낯설지 않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각종 첨단의 매체로 무장한 신인류라고 해도 좋고, 디지털노매드라고 해도 좋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미디어가 달라지면 메시지 또한 달라지는, 미디어가 달라지면 감각이 달라지고, 의식이 달라지고, 형식이 달라지고, 내용 또한 달라지는, 하나가 달라지면 모두가 달라지는 매체결정론이 새로운 상식으로 통하는 시대에 우리 모두 살고 있다. 

이미지를 생산하고 재현하는 조형예술 역시 예외는 아닌데, 회화의 시대에 이미지의 최소 단위원소는 터치(붓질 그러므로 스트로크)였고, 인쇄매체 시대에는 망점이었고, 전자매체 시대에는 픽셀이었다. 그리고 이후 가상현실 시대에는 이런 픽셀에 남아있던 아날로그적인, 물질적인, 감각적인 최소한의 흔적마저 소거된 또 다른 형태의 단위원소(어쩌면 입자로 보기 어려우므로 단위원소라고 부르기조차 힘든)가 픽셀을 대신할 것이지만, 현재까지는 픽셀이 가장 강력한 단위원소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단위원소라고 했다. 픽셀 그러므로 단위원소가 모여 형태를 일구고, 단위원소가 흩어지면서 형태가 해체된다. 그렇게 한쪽에 형상이 있고, 다른 한쪽에 추상이 있다. 그러므로 형상과 추상의 스펙트럼 사이에, 그 위에 픽셀이 있다. 픽셀의 게이지를 어느 쪽으로 옮겨가느냐에 따라서 형상과 추상이 연동되고 결정된다. 

이미지의 최소 단위원소로서 픽셀을 취하면서, 동시에 아날로그적인, 회화적인, 물질적인, 감각적인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그러므로 어쩌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접점 가능성을 형식 실험하고 있는, 그 과정에서 자기만의 형식을 예시해주고 있는 문호의 그림이 그렇다.
 

그러나 정작 매체 친화적인 문호의 그림은 의외의 시작을 보여주고 있다. 소정 변관식과 함께 전통적인 한국화의 쌍벽을 이루는 청전 이상범의 그림을 패러디하고 오마주한 그림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주지하다시피 변관식은 건조하면서 깐깐하고, 이상범의 그림은 서정적인 감수성이 특징이다. 혹자는 남성적이고 여성적인 감수성으로 두 사람을 비교하기도 한다. 어느 경우이든 한국화에서 필법 혹은 준법은 그만의 작가적 혹은 회화적 아이덴티티로 여겨질 만큼 결정적이다. 이상범 역시 저만의 독특한 필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작가는 바로 그 필법에 주목한다. 특히 인상파 이후 서양화에서 터치가 작가의 개성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면 되겠다. 세부적인 차이를 도외시하고 본다면 필법이 중첩되면서 형태를 만들고, 터치가 느슨해지면서 형태가 해체된다는(그렇게 해체되면서 한국화에서는 여백이, 그리고 서양화에서는 분위기가 강조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해도 좋다. 

하나의 그림이란, 하나의 이미지란 결국 필법이라고 하는, 터치라고 하는 최소 단위원소의 집합과 해체, 응축과 확산이 불러일으키는 일루전에 지나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모더니즘 비평가 클레멘테 그린버그는 이러한 사실(엄밀하게는 터치로 나타난 평면성)에 착안해 인상파를 진정한 현대미술의 효시로 보기도 한다. 그렇게 작가는 이상범의 원화를, 그리고 이후 다른 그림들에서의 이미지를, 형태를 중첩된 입자들로 낱낱이 해체하고 재구성했다. 

그렇게 재구성된 그림은 이중적인데, 가까이서 보면 무분별한 입자로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형태가 보인다. 가까이서 보면 추상이 보이고, 멀리서 보면 형상이 보인다. 그렇게 하나의 그림 속에 형상과 추상을 하나로 품는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다. 인상파에서 짓이겨진 물감 덩어리가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어떻게 그런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바로 심적 거리 혹은 미적 거리의 개념이 여기서 생겨나고 적용된다. 원래 사물을 잘 보기 위해서는(그리고 사태를 잘 파악하기 위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지만, 이는 그림 보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렇게 가까이서 보면 추상이 보인다. 추상에 대한 의미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계기로 클로즈업(그리고 탈맥락 그러므로 맥락 밖에서도 형상은 추상이 된다)이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그 자체 추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형태가, 형상이, 이미지가 자기의 잠재적인 한 본성으로서 추상을 품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 속에 형상과 추상을 하나로 품고 있는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러한 회화적 사실을 주지시킨다. 

하나의 형상을, 하나의 이미지를 최소 단위원소로 해체하고 재구성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필법과 터치는 요새 식으로 치자면(달라진 미디어 환경을 반영해서 보자면) 픽셀이 된다. 그렇게 작가는 자연과 풍경,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과 도시를 오가는 사람들과 같은 일상적인 장면을 사진으로 찍고, 그렇게 채집된 최초 이미지를 컴퓨터 그래픽(포토샵)을 통해 픽셀로, 자잘한 평면들의 집합으로 변환한다. 그 과정에서 형태뿐만 아니라 색 지정을 통해 처음의 자연색(혹은 고유색)이 변환되기도 한다. 일차 이미지가 이차 이미지로 전환된 것인데, 기계(카메라와 포토샵)와 작가의 감각이 협력으로 일궈낸 결과로, 그러므로 그 자체 최초 이미지에 대한 해석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렇게 가공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그림으로 옮기는데, 실제 그림에서의 분위기를 봐가면서 재차 해석하는, 그러므로 재해석하는 과정이 수반된다. 
그렇게 최초 이미지는 해석과 재해석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실로부터 멀어진다. 현실성을 상실하고 익명성을 얻는다. 누군가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누구라도 무방할 사람들(익명적인 군중?)의 그림으로 전환된다. 자기만의 거리두기가 이런 식으로 수행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최초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찍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여기에 기계적인 프로세스가 매개되고 가공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결과만 놓고 본다면 결국 익명적인 사람들에 주목하고 사람들의 익명성을 재현한 것이 된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만의 거리두기를 통해 상실했던 현실성을 다시 얻는다. 

무슨 말인가. 군중 속의 고독이 실존주의 인간을 대변한다면, 익명적인 주체는 실존주의 이후 현대인의 흔들리는 정체성, 공허한 자기 인식(그러므로 자의식)을 대변한다. 풍경에 가려, 기계적인 이미지(사실은 기계적인 이미지를 물질적인 차원으로 변환한 것이므로, 기계적이면서 감각적인 이미지)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은 작가가 부지불식간에 실현한, 어쩌면 처음부터 겨냥했을 주제(그리고 주제 의식)라고 해도 좋다. 

여기에 작가의 그림 속 모티브는 유학 시절, 그리고 이후 휴양지와 같은 일상으로부터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에서 왔다. 사진을 재현하고 각색한 것인데, 최초 사진을 찍은 시점과 그림으로 재현한 시점 사이에 거리가 있다. 기억을 매개로 그때와 지금 사이의 거리감을 그리는 것인데, 이로부터 마치 빛바랜, 색바랜 사진에서 와도 같은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고 멜랑콜리를 자아낸다. 기계적인 이미지(카메라와 컴퓨터, 디지털과 포토샵, 그리고 픽셀이 연동된)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기계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물질만이 자아낼 수 있는 감성이고 그림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기계적인 이미지와 물질적인 이미지,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묘하게 관계하는 긴장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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