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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선/ 색과 결이 열어놓은 몰아, 망아, 무아지경의 판타지

고충환



박일선/ 색과 결이 열어놓은 몰아, 망아, 무아지경의 판타지 


고충환 미술평론가

단청 산수화는 단청과 회화의 접목을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적 산수화, 특히 겸재의 진경산수 중 금강전도와 단청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장르의 실험작업이다. 장르를 넘나드는 뒤섞임의 문화 또는 탈장르의 문화, 크로스오버와 퓨전이 추구하는 방향과 비슷한 발상에서 시도하였다...나의 작업은 수없이 많은 일관된 반복과 몰입의 연속이다. 힘들고 고되지만 희열을 느끼는 노동의 중독과도 같은 작업이다...오방색을 칠하노라면 그야말로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내 작품의 핵심은 색과 결이다) 결이란 말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움이 내재 된 느낌을 준다. 색의 결을 가장 잘 표현한 예술이 단청이라고 생각한다. 
- 작가 노트

비평가도 그렇지만 창작 주체(그러므로 어쩌면 작가 박일선)의 눈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한다. 두 눈 중 한 눈은 변하는 것을 보고, 다른 한 눈은 변하지 않는 것을 본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 항상적이고 항구적인 것, 그러므로 미의식의 궁극적인 가치를 예술작품은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자체 본질이라고 해도 좋고, 원형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칼 구스타브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사회적 합의에 이른, 문화적으로 정착된 기호(그러므로 상징)를 전형이라고 한다면, 원형은 그 층위가 전형보다 깊다. 전형의 무의식적 모태라고 해야 할까. 체질적으로 물려받은(그러므로 의식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문화적 유전자이며 DNA라고 해야 할까. 예술작품은 이런 원형적 미의식 그러므로 미의식의 원형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연후에라야 비로소 자기도 감동하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처럼 원형적 미의식을 담보할 때조차 그 작품이 원형적 미의식 그대로를 반복하거나, 그 양식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게 한 눈이 원형적 미의식을 볼 때, 다른 한 눈이 시대를 본다. 시대적 양식, 시대적 감성, 시대적 이념을 본다. 그리고 지평 융합(가다머)이 일어나는 것인데, 원형적 미의식을 시대적 양식과 감성과 이념에 맞게 재해석하고 각색하는, 자기화하고 현대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원형적 미의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양식에 대한 감각적 이해가 있어야 한다.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 원형적 미의식과 변화무상한 시대 감정(혹은 시대정신) 간 상호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라야 비로소 변증법적 합일(지난한 형식실험의 과정을 통해 긍정과 부정이 투쟁하는 과정)을 통한, 또 다른 시대양식의 제안도 가능해질 수 있는 일이다. 단청을 재해석하고 각색하는, 자기화하고 현대화하는 과정을 통해 단청을 또 다른 시대양식으로 제안해놓고 있는, 그러므로 어쩌면 단청 이후를 예시하고 있는 박일선의 작업이 그렇다. 


박일선은 전통적 소재인 단청을 회화와 접목한 단청 회화라는, 단청을 산수와 접목한 단청 산수(화)라는 자기만의 시대양식을 열었다. 그동안 전통과 현대와의 관계와 관련해, 전통의 현대적 각색과 재해석의 과정과 관련해 한국적 미의식의 원형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시도가 있었지만, 작가의 경우에서처럼 뚜렷한 형식화에 성공한 사례를 별로 본 적이 없다.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자기만의 각색에 성공한 것인데, 이를 위해 작업 과정을 간략히 스케치해 보면, 먼저 한지에 아교포수를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 바탕재를 만드는데, 내구성과 탄성 그리고 발색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첩첩한 봉우리와 계곡, 사찰과 하늘 같은 소재를 반복해 밑그림 곧 초를 그린 연후에, 바탕재에 초를 겹쳐 본을 뜬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채색 작업이 이루어지는데,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수도 없이 반복되는 채색 작업으로 화폭을 메워나간다. 처음엔 한지에 단청 안료로 그리다가, 이후 점차 캔버스에 단청 안료를 올리는 것으로 변했지만, 바탕재가 달라진 것 말고 그림 자체가 눈에 띄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일단 형식실험에 성공한 연후에는, 그렇게 얻어진 새로운 양식을 일관성 있게 가져가면서 심화 변주해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을 보면, 가히 집요한 그리기, 노동집약적인 그리기, 편집증적인 그리기를 떠올리게 된다. 시작도 반복이요 끝도 반복인, 시종 반복적인 작업과의 싸움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자신과의 지난한 싸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전통적인 방법에 따른 것인 만큼 정해진 틀과 규범이 있고, 그 규범에서 벗어나선 안 되기에 오롯이 자기를 집중해야 한다. 몰아다. 그렇게 자기를 집중해 그리다 보면, 불현듯 자기는 지워지고 그림만이 오롯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림이 자기의 빈자리를 채우고, 세상이 온통 그림이 된다. 무아다. 그렇게 작가는 몰아로 입문해서 무아를 얻는다. 그러므로 다시, 무아를 통해서 또 다른 자기(거듭난 자기?)를 얻는다. 자기를 비워서 자기를 얻는다고 해야 할까. 

작업을 매개로 자기가 무화되는, 작업이 오롯해지면서 자기도 덩달아 오롯해지는 역설적인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기, 또 다른 자기,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마저 잊힌 자기, 아득한 자기, 자기_타자, 그러므로 어쩌면 불교에서의 진아를 얻는 자기반성적이고 수행적인 부분이 있다. 실제로도 수행에 보면, 반복 수행이 있다. 무슨 일이든 한 가지 일을 반복하다 보면 그 일에 도통한다는 말이다. 안 보고도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으려면 내가 지워지고 일 자체가 오롯해져야 한다. 그때쯤이면 이미 내가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논리이다. 반복을 통해 내가 지워지고 세상이 오롯해지는, 무아를 통해 진아를 얻는 이 일련의 과정이 질 들뢰즈의 차이를 생성시키는 반복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을 보면 형형색색의 색띠들이 만든 산봉우리가 첩첩하고(준법의, 준봉의 변주?), 산세의 가장자리를 따라 빛을 발하는 아우라가 선연하고(광배의, 광휘의 변주?), 회오리라도 몰아치는 듯 하늘이 총총하고(반 고흐의 변주?), 크고 작은, 길고 짧은 색띠들이 어우러져 춤이라도 추는 것 같다. 중첩된 색띠들이 결을 이루고, 파장(파동)을 만들면서 무한확장되는 그림이 바로크(화면 외부로 확장되는 그림이 극적인 효과를 주는)의 추상화 버전을 보는 것도 같고, 화면이 미세하게 일렁이는 것이 옵아트적인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같다. 
더러 모노 톤 화면의 그림이 없지 않으나, 대개 다채로운 화면에서 작가는 오방색을 도입해 그리는데, 주지하다시피 전통적으로 오방색은 우주를 상징하고 존재를 표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시, 작가의 자기반성적인 표상의 도상학을 엿보게 된다. 색 자체만 놓고 보자면, 색채의 마술사 마티스에 견줄 만한 색채의 향연을, 색채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 엿보이는 추상화의 경향성은 또 다른 버전의 그림에서 또 다른 형식을 얻는다. 단청 산수에서 색띠들이 어우러져 산수를 그려놓고 있다면, 이번에는 문자도를 그려놓고 있다. 단청 문자(도)라고 해야 할까. 색띠들이 어우러져 효, 꿈, 봄, 사랑, 땅과 같은 한글을 그려놓고 있는 것인데, 전통적인 문자도(문자 속에 그림이 갇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글자 자체(그리고 전체)가 패턴을 이루고 그림을 일군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단청 산수(화)도 단청 문자(도)도 채색(화)과 수묵(화)의 경계를 허문, 그림과 문자의 경계를 넘나든, 정통의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전통을 연 민화의 정신세계를 이어받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포스트 민화(민화 이후)를 예비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는 어린아이의 그림에서처럼 자유분방한 표현이며 정신을 추구한다는 작가의 말과도 통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근작에서 작가는 또 다른 형식실험을 하고 있다. 기왕의 단청 산수와 단청 문자를 그대로 가져가면서, 이번에는 화면을 채우지 않고 여백을 주는, 색띠 부분에서 발원한 파장(파동)이 여백을 통해 울림을 주는, 그렇게 색띠와 여백이 상호작용하는, 그리고 여기에 마티에르를 통해 회화적 물성을 강조한 그림을 형식실험하고 있다. 기왕의 단청 산수와 단청 문자에서 자기만의 형식을 성취한 것처럼 또 다른 형식을 기대해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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