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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진오/ 얽히고설킨 관계로부터 분절된, 파편화된, 일그러진 초상으로

고충환



복진오/ 얽히고설킨 관계로부터 분절된, 파편화된, 일그러진 초상으로 


고충환 미술평론가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 조각가들은 흙으로 형상을 빚고 형상 그대로 주물로 떠내는 전통적인 방식으로부터 조각을 시작한다. 추상이 아닌 형상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작가 복진오 역시 그랬다. 그리고 그동안의 작업을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일부 용접해 만든 철조를 포함해서, 이런 전통적인 형상 조각에 관한 한 작가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전통적인 형상 조각의 미덕으로는 사실적인 재현을, 그리고 그 본질로 치자면 양감(매스)을 들 수 있고, 작가의 조각은 이 미덕과 본질 모두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불현듯 선조로 갈아탄다. 불현듯이라고는 했지만, 아마도 그동안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그 고민은 말할 것도 없이 자기만의 형식에 대한 것일 터이고, 그 가능성을 선조에서 발견했을 것이다. 선조는 선으로 만든 조각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사실 선은 생리적으로 조각보다는 회화에 가깝고, 소묘에 가깝고, 드로잉에 가깝다. 그러므로 평면이 아닌 입체로 구현한, 선을 이용해 허공에 그린 공간 드로잉이라고 해야 할까. 전통적인 조각의 본질이랄 수 있는 양감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탈조각이, 선으로 나타난 회화의 주요 형식요소를 빌려오고 있다는 점에서는 회화적인 조각이 실현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주조(혹은 소조)로부터 선조로 넘어오면서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그렇게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기만의 형식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에 작가는 가녀린 구리 선을 뭉쳐서 형태를 만들었다. 주지하다시피 구리 선은 유연하고 부드러워서 원하는 대로 형상을 만들 수가 있었다. 그리고 스테인리스스틸 소재로 갈아탄다. 아마도 표면에서 번쩍이는 빛에 반응하는 성질이나 차가운 금속성의 질감이 구리 선보다 더 현대적인 소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테인리스스틸 소재는 탄성이 있어서 구리 선에서처럼 원하는 대로 형상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작가는 가녀린 실 형태가 아닌, 일정한 폭을 가진 가녀린 띠 형태로 자른 금속판(그러므로 금속 띠)을 소재로 하는 것인 만큼 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이겠지만, 그렇게 찾아낸 방법이 엮음이다. 띠 혹은 줄을 엮어서 형태를 만드는 전통적인 방식에 착안한 것인데, 그러나 그 방식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탄성과 함께 날카로운 표면 질감을 가지고 있는 소재를 일일이 손으로 엮어서 지금처럼 원하는 형태를 만들 수 있게 되기까지 말로 다 할 수 없는 노동집약적인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시행착오와 함께 지난한 형식실험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과정이 뒷받침되어서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자유자재한, 자연스러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는 스테인리스스틸 띠를 엮어서 사람 얼굴을 만들고, 몸통(토르소)을 만들고, 해골을 만들고, 사물 형상을 만든다. 엮는 방식은 적어도 외적으로 보기에 불규칙적이고 비정형적인데, 마치 무수한 비정형의 선이 모여 형상을 만들고 볼륨을 암시하는 연필소묘에서처럼 베이스로 가지고 있는 해부학적 지식을 믿고 감이 이끄는 대로 그린 것 같은(그러므로 만든 것 같은)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왜 엮음인가. 엮음에 무슨 의미라도 있는 것인가. 여기서 엮음은 관계를 의미한다.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선 내가 있어야 하고, 네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나와 네가 어우러져 나를 만든다. 무슨 말인가. 너와의 관계가 나를 만들고, 타자와의 관계가 나를 형성시킨다. 후기구조주의에선 주체를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라고 본다. 그렇게 작가가 빗어놓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타자와의 관계망으로 빼곡하다. 여기서 나는 동시에 너이기도 하고, 주체는 잠재적인 타자이기도 하다. 그렇게 양가적인 주체를 작가는 잊힌 초상이라고 부른다. 익명적인 초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누구랄 것도 없는, 그러므로 현대인의 초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엮이고 섞인 관계를 내재화하고 있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놓고 있었다. 


스테인리스스틸 띠를 엮는 방식이 불규칙적이고 비정형적이라고 했다. 이후 작가는 엮는 방식을 다르게 시도하는데, 방법이 다른 만큼 형식이며 분위기 또한 다른 작업을 내놓고 있다. 이번에 띠를 엮는 방식은 규칙적이고 정형적이다. 패턴이 두드러져 보이는데, 주지하다시피 패턴이 성립하기 위해선 하나의 모나드(단위원소)가 반복 확장되는 모듈 구조가 전제되어야 한다. 격자구조가 반복되면서 패턴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로 볼 수 있겠고, 날실과 씨실이 교직 되면서 직조되는 직물 구조를 생각해봐도 좋을 것이다. 

방법이 정형화된 것인 만큼, 그 방법을 통한 결과물 또한 마치 직물에서의 그것처럼 평면적인 화면으로 도출된다. 입체에서 평면으로 옮겨왔다고 해야 할까. 회화적 평면이 강조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금속 띠 자체가 탄성을 가지고 있는 탓에 띠와 띠가 교직 되는 접 면에 굴곡이 생기고 틈새가 드러나 보인다. 현저하게 평면에 가까운 것이지만, 이런 굴곡과 틈새로 인해 화면은 섬세한(혹은 미세한) 저부조처럼 보인다. 그리고 작가는 일부 작업에서 화면 뒤에 LED를 장착해 조명을 부가하는데, 굴곡진 틈새로 은근한 빛이 새 나오면서 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기도 하다. 조명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사뭇 다른, 감각 혹은 시각 경험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이런저런 오브제를 부가하는데, 이로 인해 화면은 마치 회화에서의 그것과도 같은, 배경 화면이 된다. 물고기를 풀어놓으면 바다가 되고, 사자를 풀어놓으면 사파리가 되고, 나무를 풀어놓으면 숲이 되고, 도롱뇽을 풀어놓으면 습지가 되고, 유성을 풀어 놓으면 밤하늘이 된다. 그 위에 오는 오브제 여하에 따라서 배경 화면이 달라지는, 마치 움직이는 그림책과도 같은, 가변적인, 상황 논리가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조각의 형식논리를 넘어, 조각에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서사 조각 혹은 풍경 조각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가 직접 주조해 만든 오브제들인데, 이로써 기하학적 패턴이 강조돼 보이는 추상적인 화면과 사실적이고 재현적인 오브제가 대비돼 보이는, 그리고 여기에 평면과 입체, 회화와 조각이 그 경계를 넘나들면서 합치되는, 그리고 여기에 이야기마저 함축된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조각(아니면 작업)이 예시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로써 작가가 자기만의 형식과 방법론으로 조각을 확장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부가적인 어떠한 오브제도 없이,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패턴이 강조돼 보이는 화면 자체만으로 마감한 작업도 있다. 이번에는 오브제 대신 폴리싱 기법이 동원된다. 주지하다시피 금속은 빛에 반응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성질에 착안한 것이다. 광택 마감 처리한 부분과 별도의 마감 없이 최초의 질감 그대로인 부분을 대비시켜 차이를 강조한 것인데, 그 내용으로는 그 의미를 알만한 문자와 숫자와 기호들(이를테면 꿈과 같은)이 동원된다. 향후 작업이 더 섬세해지고 확장이 된다면 특정의 메시지를 함축한, 좀 더 긴 문장과 텍스트 작업도 가능할 것이다. 자신의 작업에 개념적인 장치며 의미론적인 측면을 도입하고 강조한 경우로 봐도 좋을 것이다. 

금속은 빛에 반응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일종의 거울효과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작가의 작품 앞에 서면, 더욱이 광택 마감 처리한 부분 앞에 서면 작품을 쳐다보는 사람을 되비쳐 보여준다. 여기서 작가의 작업은 굴곡진 격자 모양의 모나드가 반복 확장되는 구조를 하고 있어서 전체적인 형상 그대로를 보여주는 대신, 절단된, 분절된, 부분과 부분이 잇대어진 불완전한 모습을 되돌려준다. 그 불완전한 모습이 우연한, 이질적인, 무분별한 타자들의 집합으로 구조화된 현대인의 초상을 보는 것 같다. 타자와의 얽히고설킨 관계로 구조화된 잊힌 초상에 이어, 또 다른 층위에서 현대인의 징후와 증상을 표상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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