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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김연식/ 자연의 지문, 혹은 풍경의 지문 같은

고충환



정산 김연식/ 자연의 지문, 혹은 풍경의 지문 같은 


고충환 미술평론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같은. 수면에 반짝이는 윤슬 같은. 해일 같은. 해류 같은. 기류 같은. 태풍의 눈 같은. 토네이도 같은. 회오리 같은. 녹조 같은. 적조 같은. 수면에 번지는 기름띠 같은. 첩첩한 나무껍질 같은. 첩첩한 시간의 켜 같은. 지층 같은. 단층 같은. 등고선 같은. 협곡 같은. 계곡 같은. 소금산 같은. 항공지도 같은. 해양 지도 같은. 지질지도 같은. 원석의 단면 같은. 호박화석 같은. 대리석의 표면 질감 같은. 운석 같은. 유성 같은. 달의 표면 질감 같은. 오로라 같은. 빛에 반응하는 자개의 표면 질감 같은. 우묵한 동굴에 매달린 종유석 같은. 불덩이를 안고 타고 흐르는 용암 같은. 화산 같은. 턱턱 갈라진 논밭 같은. 바위 표면에 말라붙은 마른 이끼 같은. 빗물 자국 같은. 빗물에 씻겨 칠이 벗겨진 벽면 질감 같은. 박락되고 탈색된 시간의 흔적 같은. 비정형의 얼룩 같은. 파충류가 벗어놓은 허물 같은. 빅뱅 같은. 존재를 삼킨 블랙홀 같은. 존재를 낳는 화이트홀 같은. 카오스 같은.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의 분출 같은. 파장 같은. 파동 같은. 파문 같은. 자연의 지문 같은. 풍경의 지문 같은. 존재의 지문 같은. 에너지와 에너지가 충돌하면서 잇대어진 경계 같은. 


이것들은 다 무엇인가. 볼 때마다 다르고, 아마도 사람들마다도 다른 것을 볼, 그림 속 형상은 다 무엇인가. 사람들마다 다른 것을 본다? 사람들은 저마다 관심사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인문학적 배경이 다르다. 그래서 같은 것을 보면서도 사실은 다른 것을 본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 같은 것을 볼 때도 그렇다. 그렇다면 객관적 현실 혹은 실재는 없는 것인가. 없을 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그런 것은 왜일까. 그림 속 형상은 혹 바로 이런 질문, 그러므로 보는 행위에 담긴 의미론적인 문제를 물어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 속 형상치고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대상을 콕 찍어 특정할 수 있는 형상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oo처럼 보일 뿐인 형상들, 암시적인 형상들, 잠재적인 형상들, 이행 중인 형상들이 있을 뿐. 형상 이전의 침묵 속에 들끓는 계기가 있을 뿐. 형상을 예비하는 형상 그러므로 예비적인 형상이 있을 뿐. 모든 그림은 oo에 대한 표상일 뿐, oo 자체가 아니다. 다만 oo 자체가 되고 싶은 관념이고 헛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그림의 운명이고 형상의 숙명이다. 혹 작가의 그림은 이런, 그림의, 형상의 운명을 그려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그림은 자연풍경을 연상시킨다. 관념적인 풍경을 연상시킨다. 미시적인 풍경을 연상시키고, 거시적인 풍경을 연상시킨다. 우리가 감각적 실재라고 알고 있는 자연풍경은 사실은 적정거리에서 본 풍경, 그러므로 우리의 감각이 가닿고 의식이 미치는 한에서의 풍경이다. 거시든 미시든 그 거리를 벗어나면 추상과 형상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그러므로 추상은 형상을, 형상은 추상을 이미 자기의 한 잠재적인 본성으로서 품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 작가의 그림은 혹 이런, 그림의 그러므로 형상의 양가성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자연을 그린 것인가. 아니면 자연성을 그린 것인가. 자연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피직스)과 자연성(나투라)을 구분했다. 감각적 자연의 원천 그러므로 자연의 원인이 자연성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 식으로 치자면 기라고 보면 되겠다. 기의 운행, 기의 운동을 감각적 형태로 옮겨놓은 것이 곧 자연이다. 작가의 그림은 아마도 그런, 기의 운행, 기의 운동, 그러므로 자연성을 그려놓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우주가 막 생성되는 태초의 순간을 보는 것 같다. 자연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이 분출되는 극적 현장을 보는 것도 같다. 추상과 형상이 경계를 허무는,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가 삼투되는, 감각적 실재와 관념적 실재가 한 몸으로 섞이는 경계의 풍경을 보는 것도 같다. 형상에서 형상으로 이행 중인 풍경을 보는 것도 같고, 원초적인 풍경을 보는 것도 같고, 그렇게 세상의 모든 풍경을 보는 것도 같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형언할 수 없는 풍경, 비결정적인 풍경, 의미론적으로 열린 풍경, 오묘한 풍경을 도대체 어떻게 그렸을까. 사실 그림은 그렸다기보다는 그려졌다고 해야 한다. 그림이 그림을 그렸다고 해야 할까. 이 그림을 작가는 <컵 속의 무한세상>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수사적 표현이 아닌데, 작가는 실제로 컵 속에 물감을 담고 일거에 쏟아내 형상을 만들었다. 물감의 흐르는 성질을 이용해 그린 그림으로, 물감 자체만으로는 흐르지 않기 때문에 물감에 미디엄을 섞어서 점성을 조절했다. 

푸어링 혹은 플루이드로 알려진 기법으로, 정통 회화에서는 물과 기름의 반발 작용을 이용해 그린 마블링 기법, 물감을 흘려 그린 드리핑 기법, 물감을 흩뿌려 비정형의 얼룩을 만드는 타시즘이 모두 유동성 그러므로 물감의 흐르는 성질을 이용해 그린 그림들이다. 푸어링 혹은 플루이드 기법의 변주 혹은 변종이라고 해야 할까. 물감의 성질이 유동적인 탓에 어떤 형상이 그려질지 알 수가 없고, 같은 형상을 두 번 그릴 수 없다는 점이, 그러므로 매번 새로운 형상을 생성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생성 중인, 소멸 중인, 이행 중인, 그래서 반복이 없는(반복이 없으므로 재현도 없는) 자연의 그것과도 통하는 성질이다. 

다시, 작가는 이 그림을 <컵 속의 무한세상>이라고 불렀다. 작가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마치 신이 세상을 창조하는 것과 같은 희열을 느낀다. 실제로도 곧잘 예술가는 창조주에 비유되기도 한다. 정통적으로 예술은 말하자면 미증유의 세상을 창조하는 행위의 표상 혹은 알레고리로 여겨졌다. 실제로도 하이데거는 예술을 세계를 여는 일, 세계를 개시하는 일이라고 불렀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예술을 매번 재현 불가능한(그러므로 반복 불가능한) 일회적인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정통적인 예술을, 예술가상을 소환한다. 

컵 속에 세상이 담겨있다? 세상이 컵에서 유래했다? 여기서 물감이 담긴 컵이 존재가 생성되는 근원으로서의 점을 상징한다면, 물감을 쏟아내 일거에 만들어진 우연한 형상은 하나의 점으로부터 유출되는 존재의 생성원리에 해당한다. 그렇게 컵은 세상이 유래한 점에 유비된다. 세상은 하나의 점에서 유래했다. 세상은 이데아로부터 유래했다(플라톤의 이데아 모방론). 세상은 일자로부터 유래했다(플로티노스의 일자 유출설). 세상은 로고스 그러므로 신의 말씀으로부터 유래했다(기독교의 유일신 사상과 창조설). 기독교에서는 로고스를 신의 말씀이라고 부르고, 불교에서는 법(혹은 법문)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불교는 세상의 기원을 묻는 대신 세상의 환원을 묻는다. 만법귀일 일귀하처,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가. 여기서 존재가 유래한 점과 존재가 돌아가는 점은 하나다. 

그렇게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풍경, 비결정적인 풍경, 의미론적으로 열린 풍경, 오묘한 풍경은 세상의 기원을 묻고 존재의 환원을 묻는다. 예술은 질문의 기술이다. 그리고 선불교는 화두의 기술이다. 그렇게 우연이 그린 작가의 그림과 예술의 기술이, 그리고 선불교의 화두가 하나로 통한다. 그렇게 존재를 묻는 작가의 그림은 거대 담론이 죽은 시대에 새삼 거대 담론(존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묻는)을 재소환한 것이기에 그만큼 더 의미가 있고 울림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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