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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경/ 바람, 소리, 공기, 그러므로 자연에서 건너온 것들

고충환



조연경/ 바람, 소리, 공기, 그러므로 자연에서 건너온 것들 


고충환 미술평론가

조연경의 조형 작업은 섬유가 베이스다. 섬유의 전통적인 의미 그러므로 생활 속 쓰임새보다는 조형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 섬유를 조형화, 현재화, 자기화한 것인데, 그 최소 단위원소가 실이다. 그런 만큼 실이 갖는 상징적 의미에 대한 이해가 작가의 조형 작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실은 시간을 상징하고, 인연을 상징하고, 관계를 상징한다. 존재론적인 층위에서의 의미(이를테면 시간과 같은)를 내포하는가 하면, 사회학적 의미(이를테면 관계와 같은)에도 맞닿아있다. 특히 여성의 성적 정체성과 관련이 깊은데, 전통적으로 규방 문화에서 생산된 사물들이 하나같이 실을 매개로 한 것이 그렇다. 신화적인 의미도 있는데, 자기 분비물로 실을 만들고 그 실로 집을 짓는, 그러므로 자기 몸을 재료로 집을 짓는 거미가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 그렇다. 여성 역시 자기 몸을 재료로 생명을 위한 집 그러므로 존재의 집인 자궁을 짓는 것이 거미를 닮았다. 

그렇게 실을 소재로 한 것들, 그중에는 실제로도 상당 부분 작가의 작업을 매개하는 것들, 이를테면 전통적인 자수와 퀼트와 테피스트리가, 조각보와 보따리가, 바느질과 박음질이 현대미술을 위해 소환되고 있다. 특히 부드러운 조각(소프트 스컵처)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경우에서, 부드럽고 우호적인, 부드럽고 강인한, 부드럽고 그로테스크한, 여성적이기도 하고 반여성적이기도 한, 자연의 생리를 닮은 것도 같고 일탈적인 것도 같은, 양가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미적 감성과 관련해 뚜렷한 성과를 얻고 있다. 현대미술이 발견한 또 다른 가능성의 지점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의 작업이 그렇다. 실을 매개로 조형의 집을 짓고, 시간의 집을 짓고, 존재의 집을 짓는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집을 지으면서 자기만의 형식을 얻고 있다고 해야 할까. 


조연경의 작업에 나타난 실의 용법에는 특이한 부분이 있다. 실의 소산인 직물을 소재로 도입하는 대신 실 자체를 재료(그리고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 고유의 물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과정에서 찾아진 형식적인 성질 자체를 조형 원리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무언가를 재현하기 이전의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 그리고 물성과 같은 형식요소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회화라고 본 모더니즘 패러다임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부분이 있고, 여기에 추상적인 형태로 형상화한 것도 주목해볼 부분이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추상화를 위한 형식논리를 제공한 것이라면, 은연중 작가는 그 논리를 받아들여 자기화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직물의 최소 단위원소인 실 자체를 재료로 조형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만의 추상적 형식(그리고 형태)을 얻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를 위해 작가는 철망을 도입한다. 철망을 잘라 둥근 원 형태를 만들고, 그 형태를 박음질해 하나로 연결한 것인데, 그렇게 연결된 조형을 매달아 늘어트려 놓은 것이 꼭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주렴 같다. 하나의 모나드(그러므로 조형의 최소 단위원소)가 반복되면서 패턴을 만드는 모듈 구조를 보여주고 있고, 여기에 철망 위를 가로지르는 실선이 또 다른 형태의 드로잉을 예시해주고 있다. 안과 밖이 나뉘면서 서로 통하는 철망의 구조가 주렴이나 창호 문을 매개로 경계를 나누면서 비치게 한(그러므로 안과 밖이 서로 반영되게 한) 전통적인 미적 관념을 떠올리게 만든다. 부드러우면서도 견고한 조형이, 때로 바람에 반응하기조차 하는 하늘거리는 구조가 매스(양감)를 결여한 조각 그러므로 부드러운 조각을 떠올리게도 된다. 

그렇게 작가는 같은 크기의 원형이 반복 확장되는 정형의 주렴을 만들었고, 때로 구김이 있는 비정형의 조형을 만들었다. 정형에서 시작해 비정형으로 나아간 것인데, 박음질을 받아들이는, 견고하면서 부드러운 철망의 양가성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일단 그 가능성을 본(아마도 허다한 형식실험의 과정을 거친) 연후에, 작가의 작업은 정형과 비정형 가릴 것 없이 더 자유자재해진다. 철망과 철망을 이어붙이기 위한 소극적인 박음질에서 원하는 형태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적극적인 박음질로 나아가면서 조형도 다양해지고 덩달아 드로잉도 분방한 표정을 얻는다. 그렇게 작가는 흡사 시간의 집 혹은 존재의 집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 속에 원형의 형태(생명?)를 자궁처럼 품고 있는 사각형의 집을 지었다. 

그렇게 철망에 의지해 박음질 된 실은 이후 점차 철망에서 벗어나 철망 없이 스스로 조형을 일구기에 이르고, 여기서 비정형의 형태, 유기적인 형태, 우연적인 형태는 더 강조된다. 그 조형 그러므로 비정형적이고 유기적이고 우연한 형태가 평면을 벗어나 벽면 위로 돌출되면서, 가변설치를 통해 공간으로 확장되면서 그림자가 생긴다. 오브제와 그림자가 실물(감)을 놓고 다투면서 또 다른 허구적 일루전을 만들고(연출하고), 바이브레이션 그러므로 일종의 내적 울림을 암시하면서 조형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그렇게 작가는 정형과 비정형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렇다면 왜 정형이고 비정형인가. 정형과 비정형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에는 어떤 의미심장한 의미라도 있는 것인가. 자연이다. 자연의 본성이 그렇고, 자연의 섭리가 그렇다. 자연에는 주기와 패턴, 규칙과 규율 그리고 질서(코스모스)와 같은 정형의 규준이 있다. 그리고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카오스)의 분출과도 같은 비정형의 기(그러므로 에너지)의 흐름이 있다. 이런 정형과 비정형의,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상호작용이야말로 항상적으로 이행 중인 자연, 운동하는 자연, 변화하는 자연의 작동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자체 자연이 품고 있는 생명의 비의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조형 원리와 자연의 작동원리를 일치시키는 것에서 작업을 위한 당위성을 찾는다. 그 자체 자연의 섭리에서 조형의 이유를 찾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신에 잠재된 자연성을 캐내는(그러므로 자신이 또 다른 자연임을 인식하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합과 컵과 받침대(도자의 감아올리기 기법에서처럼 노끈을 돌돌 말아 올려 만든) 그리고 브로치(실과 이후 닥 섬유로 만든 비정형의 우연한 형태)와 같은 쓰임새를 넘어 자연에서 조형 가능성을 탐색하는 부분이 있고, 자연(성)에 부합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자기반성적인 부분이 있다. 

그리고 이후 닥 섬유를 만나면서 비정형적인, 유기적인, 그리고 우연한 형태는 극대화되고, 작가의 작업은 또 다른 전기를 맞는다. 주지하다시피 닥 섬유는 한지의 원료로서 균일한 조직을 가진 양지와는 다르게 그 조직이 균질하지 않고, 그 불안정성이 오히려 비정형적이고 유기적이고 우연한, 그러므로 어쩌면 자연(성)에 부합하는, 다시, 그러므로 작가가 추구하는 작업의 생리에 부응하는 면이 있다. 자연의 본성 그러므로 생명력이 오롯한 경우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도 사람들은 한지를 살아 숨 쉬는 종이라고 부르는데, 그저 수사적 표현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 작가는 생명력이 오롯한 자연을 매개로 살아 숨 쉬는 조형을 만든다고 한다면, 그 역시 그저 하는 말만은 아닐 것이다. 

보통은 닥나무를 빻아 삶으면 조직이 해체되면서 부드러워지고, 그것을 물에 풀어 채로 떠내는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한지를 얻는다. 여기서 작가는 한지로 가기 전 단계에서 상대적으로 더 거친, 닥나무의 질료가 살아있는, 그러므로 어쩌면 자연의 본성이 여실한 조직을 건져 올려 원하는 조형을 만드는데, 단품의, 때로 중첩된, 크고 작은 형태를 만든다. 비록 조형이 가능한 계기는 작가가 제공한 것이지만, 정작 조형을 완성한 것은 자연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므로 반쯤은 자연이 만든 작품이며, 작가와 자연의 합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그저 수사적 표현으로 보기보다는, 그만큼 자연의 생리에 충실하고 자연의 본성에 귀 기울이는, 작업에 임하는 작가의 태도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여기에 알록달록한 색깔이 덧입혀지면서, 때로 부분적으로 옻칠과 금박으로 장식되면서 작업은 생기를 얻고 활력을 얻는다. 자연에서 건너온 것들, 그러므로 바람이 부는 것도 같고, 하늘거리는 것도 같고, 숨을 쉬는 것도 같고, 수런거리는 것도 같고, 들뜬 것도 같고, 봄을 맞이하기라도 하듯 화사한 것도 같고, 만개한 꽃잎이 자기를 활짝 열어 생명력을 마구 발산하는 것도 같다. 그렇게 자연이 봄의 제전 그러므로 생명의 제전에 초대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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