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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욱, 치열한 정원을 넘어 치유하는 자연으로

고충환



하종욱, 치열한 정원을 넘어 치유하는 자연으로 


고충환 미술평론가

환경이 달라지면 의식도 달라지고 양식 또한 달라진다. 환경이 양식에 영향을 미치고, 때로 그 영향은 결정적이라고 보는 것이 환경 결정론의 입장이다. 예외가 없지 않겠지만, 양식사와 관련해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는 입장이다. 그동안 작가 하종욱의 환경은 크게 도시에서 자연으로 달라진 만큼 변화된 환경에 걸맞게 그림 또한 다르다. 그러므로 각 도시를 한 축으로, 그리고 자연을 또 다른 한 축으로 그림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비록 작가 개인의 층위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대개 도시와 자연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는 현대인의 삶의 행태를 생각하면, 작가의 경험에는, 그리고 그 경험을 표현한 그림에는 우리 모두 공감하고 공유할만한 부분이 있다. 문제는 표현에 있다. 사사로운 경험치를 객관화하는 것에서 보편화의 가능성이 비롯되는 것이며, 그 관건이 표현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사사로운 경험치를 객관화하고 있는지, 그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자기표현을 얻고 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어떻게 공감하고 공유할 만한 여지를 마련해놓고 있는지를 살필 일이다. 


여기에 전형과 원형이 있다. 전형이 공공연한 합의에 이른 사회적 기호를 의미한다면, 원형은 그 층위가 전형보다 깊다. 전형이 충분히 사회화된 기호 그러므로 사회적 기호를 의미한다면, 원형은 존재론적 기호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원형은 잠재적인 기호들의 집(아니면 저장고)이며, 전형은 원형에서 길어 올려진 기호 그러므로 잠재적인 기호 중 마침내 자기표현을 얻은 기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사사로운 기호를 의미하는 푼크툼과 비교되는 공적 기호)이 전형에 해당한다면, 칼 융의 전언은 원형에 대해서 말해준다. 즉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 하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융은 원형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작가는 어쩌면 도시를 축으로 한 일련의 그림들에서 전형 그러므로 도시의 전형성을, 그리고 자연을 소재로 한 또 다른 그림들에서 원형 그러므로 자연을 넘어서 자연과 존재를 아우르는 존재의 본질을 그려놓고 있는 것도 같다. 


그렇다면 도시의 전형적인 국면(혹은 마찬가지 의미지만 도시의 성질 그러므로 도시성)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견될 수 있는가. 흔히 욕망 도시라고 했다. 좀 극적으로 말하자면 도시는 욕망의 도가니다. 그리고 그 욕망은 낮보다 밤에 더 잘 드러나 보인다. 낮에 잠자던 욕망이 밤이 되면 춤을 춘다. 쇼윈도와 네온이 발하는 불빛들이 도시의 욕망을 숨기면서 드러낸다. 빛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어둠 속에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이렇듯 욕망과 소외야말로 도시의 전형적인 기호 그러므로 도시의 전형성, 다시 그러므로 도시의 아이콘(심리적 징후? 그러므로 심리적 표상?)이랄 만하다.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아이콘이 있다. 반영성이다. 도시는 서로의 욕망을 반영하고 소외를 되비친다. 여기서 작가는 도시의 꽃이랄 수 있는 마천루의 외장을 뒤덮고 있는 거대한 유리 벽에 주목한다. 얼핏 유리 벽은 상대편 건물을 반영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도시를 투명하게 되비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굴절되는 빛의 성질로 인해, 그리고 보는 사람의 시점 여하에 따라서, 그리고 여기에 작가의 심리(그러므로 해석)가 더해져 현실 그대로가 아닌, 왜곡된 현실을 보여준다. 도시의 욕망을 반영하는 거울, 도시의 일그러진 욕망이 상영되는 거대하고 냉소적인 스크린이라고 해야 할까.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산다고 했다. 그렇게 타자들이 사는, 혹은 출몰하는 거울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는 그렇게 마천루에 비친 사람들, 거리를 지나가는 유령 같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그렸다. 도시의 일그러진 욕망을, 욕망이라는 괴물을 그려놓고 있었다. 


그렇게 작가는 도시를 소재로 한 일련의 그림들에서 일그러진 욕망과 소외로 나타난 도시의 전형성을 그리고 도시 감정을 그렸다. 그리고 이후 자연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그림의 주제며 소재 또한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러나 자연은 그 생리가 도시와는 사뭇 다르다.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모티브를 특정해 그리는 식의 재현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자연의 생리는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 도시의 생리가 욕망과 소외로 대변된다면, 자연의 생리는 무엇일 수 있는가. 생명력일 수 있고, 에너지일 수 있다. 자연성(나투라) 그러므로 감각적 자연(피직스)의 원인일 수 있다(아리스토텔레스). 샤머니즘과 토테미즘, 물활론과 범신론으로 나타난 영적 기운일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자연이 함축한 생명력, 에너지, 자연성, 그리고 영적 기운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여기에 자연에서의 경계는 흔히 불투명하고 불분명하다. 그렇게 경계를 넘어 유기적인 덩어리로 다가오는 자연의 실체에 대해서는 또한 어떻게 조형으로 옮길 것인가. 

여기서 작가는 전면 회화를 생각해낸다. 아마도 유기적인 전체로 다가오는 자연의 실체에 착안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림에 대팻밥을 재료로 도입한다. 주지하다시피 대팻밥은 그 형태며 질감이 가루로 나타난 톱밥과는 달라서 균일한 화면을 얻을 수가 없다. 그렇게 균일하지 않은 화면 위에 산에서 채집한 자잘한 나뭇가지를 덧붙여 비정형을 강조하면서 마치 저부조와도 같은 화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여기에 한지를 덧발라 감싸는 식으로 거친 표면 질감을 조절한다. 이 과정은 다 무슨 소용인가. 얼핏 땅의 질감을 닮은 것도 같고, 대지를 물성 그대로 옮겨놓은 것도 같은, 이 형상은 아마도 자연성 그러므로 자연의 성질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자연의 원초적인 생명력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경계 너머로 웃자라면서 경계를 지우는 자연의 순리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자연을 위한 터가 만들어졌다면, 이제는 자연이 꽃(그러므로 생명력) 피울 일이 남았다. 그리고 이처럼 자연에 핀 꽃을 표현하기 위해 색채의 본격적인 도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드리핑 곧 일종의 흩뿌리기 기법이 도입된다. 주지하다시피 작가는 모티브 하나하나를 그리는 대신 마구 웃자란, 자유자재로 흐르는, 분방하고 유기적인, 자연의 무분별한 생명력의 분출을 표현한다. 그대로 화면 속으로 걸어 들어간 잭슨 폴록처럼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해도 좋고, 그렇게 자연에 동화되고, 자연과의 혼연일체가 지향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연에의 동화며 혼연일체는 처음부터 저절로 얻어지지는 않았다. 작가가 처음으로 자연에 입문했을 때, 작가는 도시의 잔재를 여전히 의식하고 있었고,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아니면 끈질긴 생명력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물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을 그렸었고, 주제 또한 <치열한 정원>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치열한 정원 속에 사람들의 얼굴을 숨겨놓고 있었다. 마천루의 유리 벽에 미끄러지던 사람들이 숲속으로 숨어든 것으로 볼 수 있겠고, 그러므로 여전히 소외가 또 다른 형식으로 연장된 경우로도 볼 수가 있겠고, 다른 한편으로 자연 속에서 치유를 기약하고 있는 경우로도 볼 수가 있겠다. 

그리고 이후 점차 자연에 친해지면서, 자연에 자기를 내려놓으면서, 자연이 자기를 열어 내어주면서, 숲속에 어른거리던 사람들의 그림자도 옅어지고, 오롯이 자연의 생명력에 자기를 집중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렇게 마침내 평온(그러므로 평정심)을 되찾은 것도 같고, 잃어버린 자기(자기_타자)와 대면할 수도 있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작가의 근작은 치열한 정원을 넘어 치유하는 자연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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