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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명욱/ 색의 온기, 사물의 운명이 주는 따스함

고충환



허명욱/ 색의 온기, 사물의 운명이 주는 따스함 

고충환 | 미술평론가


여기에 두 권의 도록이 있다. 하드커버로 된 표지에는 허명욱 칠(漆)하다, 라고 적혀 있고, 허명욱의 사물, 이라고 적혀 있다. 작가의 작업이 현대미술의 두 축인 회화적 평면과 오브제,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르고 있는 것임을 알겠다. 

작가는 그리다, 라고 하지 않고, 칠하다, 라고 했다. 형상이 있는 그림이라면, 그리다, 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칠하다, 라고 했을까. 여기서 칠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칠하는 행위는 무슨 의미일까. 그리는 그림 그러므로 형상이 있는 그림과 비교해보면, 형상이 없는 그림 그러므로 비형상 회화를 의미할 것이다. 형상이 없는 그림, 형상이 아닌 그림, 형상과는 다른 그림을 의미할 것이다. 추상이다. 그렇다면 추상에는 형상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외관상 우연하고 무분별해 보이는 얼룩과 흔적과 자국 그러므로 추상적인 붓질(그러므로 어쩌면 칠의 흔적)을 통해 형상을 암시하는 것이다. 가시적인 질료를 통해 비가시적인 형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추상은 암시의 기술이라는 회화의 정의에 충실한, 부합하는 형식일 수 있다. 여기서 암시되는 형상은 얼룩과 흔적과 자국이 그림 위로 밀어 올린 것이고, 그 자체 작가의 머뭇거림, 작가의 결정, 작가의 번민, 작가의 감각, 작가의 감성이 지나간 자리, 작가의 예술혼이 머물다간 자리, 그러므로 작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추상에 논리적 근거며 당위성을 제공한 것으로 치자면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있다.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적 요소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회화라고 본 것이다. 형식요소가 회화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본 것이다.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프랭크 스텔라)이라는 동어반복적 표현이나 그림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수사적 표현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여기에 클레멘테 그린버그는 평면이라는 최소한의 조건만으로 회화가 성립한다는, 그러므로 평면이 회화의 본질이라는 급진적인(?) 입장을 제안한다. 더 이전으로 치자면 회화란 어떤 모티브이기 이전에 색으로 칠해진 평면이라는 모리스 드니의 견해에 부합한다고 해도 좋다. 색으로 칠해진 평면? 바로 이러한 배경으로부터 색면화파가 출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마티스는 예술은 표현이며, 회화에서는 다름 아닌 색이 표현이라고 했다. 그렇게 추상회화에서 평면(그리고 색면)이라는 조건이, 그리고 색이라는 조건이 결정적인 것이 된다. 


허명욱의 작업은 외관상 색면화파의 변주로 보이고, 그 과정에서 색이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작가는 원하는 색을 찾아 무수한 형식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쳤고, 마침내 옻칠을 찾아냈다. 옻칠은 까다롭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어야 건조하는 조건이 철저하게 옻칠 중심적이어서 그 조건에 사람이 맞춰야 하는 것이 그렇다. 여기에 옻칠은 처음엔 채도가 떨어지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색이 밝아지는, 그러므로 본래의 자기 색을 찾아가는 과정과 성질이 있고, 그 과정과 성질을 감으로 익히는 것 그러므로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칠(안료)과는 다른, 그러므로 옻칠만의 결정적인 차이 혹은 특징으로 치자면 바로 이런 열린 시간, 흐르는 시간에 있고, 시간이 계속 움직인다는 사실에 있다. 작가가 까다로운 옻칠에 매료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옻칠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숙성되는데, 마치 세월이 흐르면서 성숙해가는(?) 삶의 알레고리를 닮았다. 본래의 자기 색을 찾아가는 과정이 본래의 자기, 원초적 자기, 진정한 자기(그러므로 어쩌면 불교에서의 진아)를 찾아가는 삶의 여정에 대한 유비적 표현을 떠올리게도 된다. 여기에 조형예술은 예로부터 공간예술로 여겨져 왔고, 시간의 표현에 관한 한 벽으로 알려져 왔는데, 자기의 한 본성으로서 시간을 표현할 수 있는(어쩌면 이미 함축하고 있는) 매질(매체)을 만난 것도 예사롭지 않다. 그 자체 저절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평소 작가의 치열한 의식이 발견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매일 다른 색을 배합해 만들고, 이를 일일이 기록으로 남긴다. 자처럼 생긴, 좁고 긴 자작나무 판자 위에 그날의 색과 함께 날짜를 기록해 남긴 것이다. 그날의 색 그러므로 어쩌면 자신의 일상을 낱낱이 기록으로 남기는 평소 작가의 성격을 엿볼 수 있고, 그렇게 누적된 더미가 색상표에 착안한, 색상표의 변주된 한 형식을 보는 것도 같다. 어제와 오늘이 다른 것처럼 매일 다른 색을 배합해 칠하는데, 그날의 색을 결정하는데 특별한 원칙은 없다. 거칠게 말해, 기분 내키는 대로다. 기분 내키는 대로? 기분이, 감성이, 바이오리듬이, 그러므로 몸이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그날의 색을 결정하는 단계에서부터 이미 자기를 투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렇게 작가는 천과 같은, 그리고 철판과 같은 바탕 위에 옻칠을 올리고, 건조 시키고, 다시 옻칠을 올리고, 건조 시키고, 갈아내고, 다시 옻칠을 올리는 밑도 끝도 없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렇게 반복하면서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흐른다. 바르고, 구축하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칠(살)이 쌓이고, 시간이 쌓이고, 삶(의 기록)이 쌓인다. 그 행위와 과정이 수행적이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그 과정에서 몰아(온전히 자기에 몰입하는)와 망아(텅 빈 자기를 발견하는)의 경계를 넘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수행에 보면 반복 수행이 있고, 이런 반복 탓에 가능한 일이다. 반복이지만 같은 반복은 없는 것이 자기의 한 본성으로서 차이를 품고 있는 반복을 보는 것 같고, 매 순간 차이를 생성시키는 반복을 보는 것도 같다(질 들뢰즈).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과정이지만, 작가의 작업은 크게 옻칠을 칠하고 칠해진 옻칠을 갈아내는(특히 철판 작업에서) 과정의 반복이며 연속으로 볼 수 있다. 알레고리로 치자면 그 과정은 자기를 정의하고 부정하는 과정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자기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대긍정에 이르는(마침내 자기가 원하는 색을 취하는, 마침내 진정한 자기를 찾아낸) 변증법에 비유해볼 수도 있다. 
롤랑 바르트의 이론에 보면, 너무 많이 고쳐 쓴 나머지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이론이 있다. 옛날 종이가 귀했던, 그래서 양피지가 종이를 대신했던 시절에 양피지에 주체에 대한 정의를 쓴다(긍정). 그리고 아니다 싶어 먼저 쓴 정의를 지우고(부정) 다시 고쳐 쓴다. 그리고 다시 아니다 싶어 그 정의마저 고쳐 쓴다. 그렇게 고쳐 쓰기는 밑도 끝도 없이 반복된다. 여기서 주체에 대한 정의는 최종적일 수 없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진정한 정의는? 쓰기와 지우기가, 긍정과 부정이 밑도 끝도 없이 반복된 전체, 마침내 너덜너덜해진 정의 자체, 쓰기와 지우기 그러므로 긍정과 부정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는 알 수 없는 얼룩과 자국과 흔적 자체(와 전체)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얼룩과 자국과 흔적이 설명된다. 균일한 색면(혹은 전면균질회화)처럼 보이는 작가의 그림은 사실은 무수한 붓질(그러므로 덧칠)의 결과이며, 과정도 그렇지만 실제로 보기에도 그 이면에 허다한 비정형의 얼룩과 자국과 흔적을 숨겨놓고 있다. 그 흔적은 말하자면 작가의 머뭇거림, 작가의 결정, 작가의 번민, 작가의 감각, 작가의 감성이 지나간 자리이며, 작가의 예술혼이 머물다간 자리이며, 그러므로 그 자체 작가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얼룩 그러므로 흔적을 품고 있는 색면, 존재의 증명을 함축하고 있는 색면이 색면화파가 지향한 숭고의 감정(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 그리고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에 의해 지지 되는)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치자면, 시간, 흔적, 그리고 색을 들 수 있다. 이 세 개념은 작가의 작업에서 저마다 별개로서보다는 상호작용하는 유기적인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색이 시간을 암시하고 흔적을 상기하는 식이다. 흐르는 시간이 얼룩을 만들고, 쌓인 시간이 퇴적층과도 같은 색면을 만든다. 때로 작가는 흐르는 시간과 정지된 시간을 대비시키는데, 양분된 화면의 한쪽 면을 옻칠로 마감하고, 다른 한쪽 면을 금박으로 마감 처리한 것이 그렇다. 여기서 옻칠은 흐르는 시간을, 그리고 금박은 정지된 시간을 각각 표상한다. 그 자체 시간을 가둔, 시간을 박제화한, 그러므로 시간의 화석을 표상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는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작업을 시도하는데, 단순한 다큐멘터리(그러므로 기록)를 넘어 그 자체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작업 안과 밖에 똑같이 흐르는 시간을 체감하기 위한 기획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작업이 진행되는 내내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흐른다. 그렇게 작업 위로 시간이 내려 쌓인다. 시간 자체를 조형하고 싶은 것일까. 시간 자체의 물화 된 형식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적절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어야 비로소 건조하는 옻칠의 까다로운 성질을 생각하면, 무방비 상태의 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어서 쉽게 결단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아마도 자신의 작업에 자연을 끌어들일 생각일지도 모른다. 작가와 자연이, 우연과 필연이 협력한 작업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발터 벤야민은 새로운 모든 것이 빠르게 시간 속으로 미끄러진다고 했고, 그러므로 멜랑콜리와 노스텔저를 자아내는 대상으로 전이되는 것이 모든 사물의 운명이라고 했다. 작가의 평면이, 입체가, 사물이, 오브제가 다 그렇다. 작가의 작업에서 숙성된 옻칠은 여하한 경우에도 새것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시간을, 흔적을, 어쩌면 상처 그러므로 존재를 품고 있는 것 같은 색 감정이 아득하고 아련한 느낌을 준다. 작가가 그토록 찾고 싶은 색 감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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