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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신, 이행하는 존재와 영혼의 노래

고충환



김윤신, 이행하는 존재와 영혼의 노래 


고충환 | 미술평론가


김정숙, 윤영자를 잇는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은 1935년 원산 출생으로,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1959)했다. 미국 유학 후 교수로 재직했던 김정숙에게 철조와 용접기술을 배웠다. 당시 그가 제작한 작품으로 시멘트와 철조가 있는데, 단순한 형태와 함께 고대 암각화에서처럼 형태의 표면에 새김질한, 그러므로 조각적 형태와 회화적 표면이 하나로 어우러진, 원주민 미술을 연상시키는, 원시적이고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작업(시멘트)이, 그리고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파토스 혹은 생명력의 무분별한 분출을 연상시키는, 날것 그대로의 거친 작업(철조)이 원형(사물의 본질과 조각의 물성)에 대한 관심과 함께, 당시의 피폐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작가는 그 작품들을 가지고 전시를 열었고, 작품을 판 돈으로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했다. 파리국립미술학교를 수학했는데(1964-69), 원래 조각과로 입학했지만, 도중에 담당 교수가 작고해, 판화로 전과를 했다. 국내에서도 그렇지만 당시 파리 현지에서도 판화는 새로운 형식실험의 장으로 여겨졌고, 작가는 특히 그 생리가 회화와 가까운 석판화에 매료되었다. 당시 한국에서 공수해 온 한지를 지지대로 사용했는데, 펄프로 만든 양지에 비해 조직이 균일하지 않고 비정형적인 종이에 이미지가 찍혀져 나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당시 판화를 보면, 선과 면이 어우러진 이후 작가의 조각과도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보여주고 있어서 그의 조각에 대한 착상이 어디서 어떻게 연유했는지를 알겠다. 더불어 유학 당시 작가는 이응노와 교류하면서 작가가 조각에 입문할 수 있는 계기를 열어주기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귀국 이후 작가는 성신여대와 청주대학교 그리고 이후 상명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쳤고(1970-1983), 특히 귀국 직후인 1974년에는 한국여류조각가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김정숙이 초대 회장을, 윤영자가 부회장을, 그리고 작가가 총무직을 맡았다. 그리고 1984년 원래 잠시 다니러 왔다가, 이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영구 정착했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흐르는 평원지대의 자연풍광이 좋았고, 착하고 순한 사람들이 좋았고, 아름드리나무가 많아 조각을 위한 환경으로도 좋았다. 한 개인의 결단에 대해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진즉에 고향을 떠나 온 신분으로서 이산이 낯설지 않았던 터라 쉽게 정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교수로서의 안정적인 생활보다는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겠다는 자의식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게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그리고 멕시코와 서울 등 남미와 세계를 오가며 활동했고, 체인톱을 이용한, 목조와 석조의, 지역성을 흡수해 보편성을 얻는, 현재 보는 것과 같은 자기만의 형식을 완성했다. 2008년에는 김윤신미술관을, 그리고 2018년에는 한국문화원에 김윤신 상설 전시실을 개관했다(둘 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2023년에는 국내 최초 국공립미술관에 개인전(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으로 초대를 받았고, 같은 해 국내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조각상인 김세중미술상(제37회) 수상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 이행하는 존재  

합이합일 분이분일은 동양철학의 양과 음을 표현한 것이다. 양은 나뉨과 분리를 음은 통합과 일치를 말하며, 양 안에 음이 있고 음 안에 양이 있으며, 그와 같이 나뉨은 통합을 위함이며 분리는 일치를 위함으로, 서로 다른 둘이 만나 하나가 되며, 그 하나 또한 서로 다른 둘로 나뉘는 우주적 자연적 이치를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 덩어리의 목재를 잘라내어 나뉨과 분리를, 둘 또는 여러 개의 목재를 이어가며 통합과 일치를 생각하며 작업했다. 그렇게 둘이 합하여도 하나이며 나뉘어도 하나라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 작가 노트, 2018

둘이 합하여 하나가 되고 둘이 나뉘어 또 다른 하나가 된다. 생명체의 형성과 탄생원리 그리고 우주의 생성원리인 결합, 부딪힘, 충돌로 하나가 되었다가 둘로 또는 여럿으로 나뉘어 새로 탄생 되는, 그것은 또한 순간 생겨난 혹은 태어난 에너지인 것...모든 존재는 끊임없는 움직임과 충돌을 통해서 살아간다. 그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충돌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에너지와 그에 따른 변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작가 노트, 2020

작가는 마음을, 그러므로 자기를 비우고 나무(그리고 돌)를 바라본다. 그러면 어느 순간 나무와 자기가 일체가 된다. 나무와 자기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작가의 논리를 빌리자면, 나무와 자기가 충돌하면서 에너지가 발생하는 순간이다. 일반적인 개념을 따르자면, 나무와 자기가 하나로 통하는 순간이고, 교감으로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그러면 비로소 작가는 체인톱을 들고 나무 속에 숨겨진 선을 찾고 면을 찾는다. 나무 속에 숨겨진? 나무의 본성이다. 작가가 캐내지 않으면 결코 드러날 일이 없는 나무의 본성, 그러므로 제2의 자연(성)이다. 그렇다면 그처럼 숨겨진 나무의 본성을, 제2의 자연을 작가는 어떻게 아는가. 직관이다. 처음에 작가는 다른 여느 작가들처럼 조각의 형식과 방법을 좇았지만, 언젠가부터 다만 직관으로만 사물의 본성을 캐내고 조각을 한다. 그렇게 나무에 숨겨진 구조가 드러나고, 나무의 결이 드러나고, 나무의 성정이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예술이 은폐를 본질로 하는 대지로부터 진리를 캐내어 비은폐를 본질로 하는 세계의 빛 위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라고 했고, 이로써 하나의 세계를 여는 일이라고 했다. 존재의 존재다움을 실현하는 일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나무와 돌과 같은 소재 속에 이미 그 자체 완전한 형상이 숨어있다고 봤고, 그렇게 숨겨진 형상을 에이도스라고 불렀다. 소재 속에 숨겨진, 이미 그 자체 완전한 형상을 캐내는 것이 예술이다. 감각적인 형태 속에 숨어있는 비감각적인 형태를, 가시적인 구조 속에 숨어있는 비가시적인 구조를 발굴하는 일이 예술이다. 나무의 나무다움, 돌의 돌다움, 형태의 형태다움, 구조의 구조다움을 캐내고 발굴하는 일이다. 작가의 조각으로 치자면, 나무에 숨겨진 본성을, 나무에 은폐된 나무다움을, 그러므로 제2의 자연을 캐내고 발굴하는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하나이면서 여럿으로 나뉘는, 여럿이 모여 하나를 이루는 조각이라는, 자신만의 조형 문법을 만들었다. 작가 자신은 그 문법을 합이합일 분이분일이라고 불렀지만, 하나가 잠재적으로는 여럿이며, 여럿 또한 잠재적인 하나라는 의미의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과도 그 의미가 하나로 통한다고 생각한다. 그 결이 좀 다르지만, 서양의 논법으로 치자면 부분과 전체와의 상호 유기적이고 내포적인 관계와도 통한다. 이 문법으로 작가는 하나와 여럿의 상호 유기적이고 내포적인 관계를 조형했다. 그리고 하나가 여럿으로 분화되고, 여럿이 하나로 수렴되는, 분화로부터 수렴으로 수렴에서 분화로 이행 중인, 그렇게 분화와 수렴이 밑도 끝도 없이 반복되는 존재의 생성 순환 원리를 조형했다. 나무(그리고 돌)에 숨겨진 본성, 그러므로 나무(그리고 돌)의 나무다움(그리고 돌다움)을 캐내는 과정을 통해서 존재의 존재다움을 같이 캐냈다고 해야 할까. 자연에서 존재를 보는, 그런, 유비적 표현을 실현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토템폴, 하늘을 향한 기도 

수직적인 작품은 하늘에 도달하고자 하는 노력(기도)을 구현한 것이고, T자 형태의 작품은 팔을 벌려 축복하는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 작가노트

처음에 작가는 나무토막을 쌓고, 끼워서 고정하는 방식으로 조형을 만들었다. 기단에 탑신을 쌓는 전통적인 탑의 형식과 구조를 재해석했고, 서까래와 기둥이, 부목과 부목이 하나로 어우러진 전통 한옥 양식을 자기화했다. 전시가 끝나면 나무를 다시 쓸 수 있었지만, 남아있는 작품이 없었다. 그래서 이후 하나의 통나무로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체인톱으로 나무에 숨어있는 선과 면을, 공간과 구조를 찾아내면서 수직적인 그리고 수평적인 조각을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수직적인 구조는 사다리를 표상하고, 하늘을 향한 염원이 담겨있다. 바벨탑이 그렇고, 오벨리스크가 그렇다. 원주민 미술의 토템폴이 그렇고, 현대조각으로 치자면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무한주가 그렇다. 한국적인 전통에서 찾자면, 높은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새를 조형한 솟대가 그렇다(여기서 새는 신의 메신저를 표상한다). 전통을 계승해 현대조각의 문법으로 재해석하는 한편,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영매로서의 자의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참고로 요셉 보이스는 자신, 그러므로 예술가를 무당에 비유했다. 아마도 영적 매개자란 의미일 것이다). 존재가 들고 나는 곳을 묻는, 존재의 유래와 회귀를 묻는 존재론적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수평적인 작업을 통해서는 신의 포용(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을 조형했다. 

그렇게 작가는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작업을 통해서 신과 인간의 관계를 표상하고, 신의 섭리를 조형했다. 존재에 내재 된 영적인 에너지, 그러므로 생명의 각성이라고 해도 좋고, 존재와의 영적 교감에 바탕을 둔 것이란 점에서는 영성주의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좋다. 



채색조각, 그리움을 소환하다 

코로나19로 모든 일상이 정지되었다. 덩달아 작가도 꼼짝없이 작업실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나무를 구하러 나갈 수도 없었다. 궁여지책을 찾아야 했다. 여하한 경우에도 작가를 실제로 구속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이런 구속이 자기 내면에 집중하게 했고, 자기 변신을 꾀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치 말년의 마티스가 색종이 놀이로 그토록 사랑했던 색채 회화에 대한 갈증을 해소했듯이(마티스는 예술이 표현이라고 했고, 회화에서는 다름 아닌 색채가 표현이라고 했다), 작가는 채색조각을 찾아냈다. 

작업실에는 그동안 집 짓는데 사용된 각목이나 철거된 집 서까래 같은 폐목이 남아있었다. 작가는 그 폐목들을 이어 붙여 구조를 만들고, 그 위에 그림과 색을 입혔다. 그렇게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회화와 조각이 하나로 합치된 채색조각을 만들었다. 작가는 유년 시절 수수깡을 이어 붙여 자동차도 만들고 집도 지으면서 놀았다. 그리고 밤이면 칠흑 같은 하늘 위로 총총한 별들과 이야기하면서 놀았다. 별들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수다를 떠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작가는 유년의 수수깡 장난감을 떠올렸고, 별들의 수다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대로 조각을 위한 구조가 되었고, 그림이 되었다. 

그렇게 채색조각은 유년의 추억을 되불러 온 것이면서, 상실된 시절의 그리움을 소환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다른 조각들과는 그 결이 좀 다른, 아득하고 아련한 그리움이 있고, 들뜨게 만드는 환상이 있다. 


판화와 회화, 영혼의 노래, 영혼의 소리 

나의 회화작품은 창세기에 나타난 하느님의 말씀으로, 만물의 생명이 잉태된 순간부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삶의 나눔을 주제로 하였다. 나눔의 본질은 사랑이며 그 깊은 내면에는 원초적 생명력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그것을 향한 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영혼의 노래, 영혼의 소리가 다양한 색상의 파장으로 선과 면을 이루는 사랑과 나눔을 표현하였다. 
- 작가 노트, 2008


앞서 살핀 것과 같이 작가의 판화는 일부 예외가 없지 않지만(색채를 도입한 판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상대적으로 더 회화적인), 특히 흑백 모노 톤의 석판화에서 선과 면이 어우러진, 유려한 곡선과 기하학적인 선분이 어우러진, 구조적이고 구축적인 성격이 두드러져 보인다. 추상적인 형태와 구성이 양감과 구조를 기본으로 하는 조각가의 에스키스를 보는 것도 같고, 그렇게 조각과 판화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예시해주는 것도 같다. 

그리고 회화는 정적이기보다는 동적이다. 아마도 존재에 내재 된 에너지를, 생명을, 생명의 환희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하나로 합해지면서 여럿으로 분화하는, 합에서 분으로 분에서 합으로 이행하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 순환하는, 그렇게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존재의 생리를, 우주의 섭리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유년 시절 밤하늘을 수놓던 별들의 수다를 붓질로 환원한 것이고, 색동과 같은 원형적 DNA를 색채로 환원한 것일 터이다. 남미에서 본 끝도 없이 이어지는, 열린, 먼, 아득한 평원지대의 풍경 인상이 구조로 환치된 것이고, 원색 대비가 뚜렷한 색채감정이 색상으로 환치된 것이고, 원주민(인디오) 미술에서 보이는 건강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의 분출이 정형 비정형의 문양과 패턴으로 환치된 것일 터이다. 

그렇게 작가는 회화에서 비록 원초적 생명력이 신의 말씀에, 신의 사랑에 뿌리 깊이 박힌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동시에 존재의 생명에 기인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그렇게 작가는 자기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울려오는 소리, 그러므로 영적인 소리를 듣고, 영적인 노래를 부른다. 영혼의 노래를 붓질로, 색칠로 환원해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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