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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광호/ 도감과 강목, 경계의, 혼성의 풍경

고충환



나광호/ 도감과 강목, 경계의, 혼성의 풍경


고충환 | 미술평론가


질경이(차전초), 참나물, 취나물, 머위, 조선배추, 산딸기, 맨드라미, 망초, 무궁화, 바질, 상추, 브로콜리, 냉이, 장미, 백일홍, 자주루드베키아, 천인국, 민들레, 토끼풀, 접시꽃, 금계국, 왕고들빼기, 코스모스, 명아주. 풀이고, 꽃이고, 나물이고, 잡초라고 했다. 알만한 것도 있고, 저런 게 있었나 싶은 것도 있다. 풀인지 꽃인지, 나물인지 잡초인지 아리송한 것도 있다. 작가가 굳이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나칠 것들이다. 진즉에 알고 있던 것이라고 해도 정색하고 보면 다른 것들이다. 실재와 개념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개념으로 알고 있는 것과 실재는 다르다. 어쩌면 개념은 실재를 추상화한 것일 수 있다. 

작가는 직접 발품을 팔아 이것들을 찾아 나서고, 사전을 뒤적여 하나하나 이름을 맞춰보고, 도감에서 일일이 학명을 확인한다. 왜 그렇게 하는가. 왜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가. 여기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람들은 실재를 개념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정색하고 말하자면, 사람들은 실재를 모른다. 공기처럼 일상적인 것일수록, 이름마저 생소한 것일수록, 잡초처럼 지천인 것일수록 더 그렇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연이 무심을 부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당연한 것은 없다. 존재치고 절실하지 않은 것은 없다. 사실은 하나같이 살가운 존재들이며, 애틋한 타자들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직접 만난 타자들은 내가 진즉에 알고 있었던 타자들과는 달랐다. 안 봐도 비디오인, 바로 그 타자들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새삼, 잡초를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에는 개념적 타자와 실재적 타자의 차이를 주지시킨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소외효과 혹은 소격효과)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작가는 이름 모를, 이름마저 생소한, 그리고 어쩌면 이름도 없는 들풀에서 타자의 얼굴을 본다. 개념을 걷어낸 실재의 민낯을 본다. 슬라보예 지젝은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에다 실재(계)를 비유하기도 했지만, 꼭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그런, 맨얼굴을 본다. 그러므로 식물과 같은 자연을 소재로 한 작가의 프로젝트는 실재를 통해 타자를 맞아들이면서, 그 타자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음을 증명하는(그러므로 타자에게 존재를, 어쩌면 잊힌 이름을 되돌려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혹은 타자)의 위상학을 정의 또는 재정초하는(개념으로부터 실재로) 윤리적인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채집된 식물들을 소재로 하여 목판화로, 실크스크린으로, 그리고 때로 동판화(에칭과 메조틴트)로 찍어낸다. 그중 스케일로 보나 압도적인 장관으로 볼 때 아무래도 메인은 흑백 모노 톤의 목판화일 것이다. 보통 판화는 소형을 생각하기 쉬운데(우표처럼 작은 판화도 있다), 웬만한 회화보다 큰 크기에도 불구하고 세부가 오롯한, 마치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정치한 묘사가 특징이다. 보통 목판화로 치자면 저마다 특유의 칼맛으로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작가의 목판화는 그 상식을 재고하게 만든다. 칼을 기울여 새김질했다(파냈다)기보다는 회화의 점묘법에서처럼 끝이 뾰족한 도구(칼)를 이용해 일일이 한 점 한 점 떠낸 것도 같다. 우드 인그레이빙도 아니면서, 저 큰 화면에, 그것도 여백 하나 없이 빼곡한, 정치한 묘사가 살아있는 화면이 그림으로 치자면 집요한 그리기, 편집증적 그리기를 떠올리게 만든다. 

중간톤이 없는, 흑과 백의 대비 즉 콘트라스트가 강조돼 보이는 것이나, 여기에 같은 톤의 흑백으로 처리돼 있어서 식물과 그림자가 한눈에 구분되지 않는 것이 뭔가 강렬한 느낌을 준다. 그림 속 식물과 식물, 식물과 풀, 식물과 땅 혹은 흙의 질감, 그러므로 모티브와 배경 화면(사실은 특별하게 배경 화면이랄 것도 없는)이 유기적인 전체를 이루고 있어서 자연의 본성, 자연의 에너지, 자연의 원초적인 생명력, 그러므로 어쩌면 야성과 야생이 자기 표현을 얻고 있다는 생각이다. 여기에 작가는 아마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수준에서 부분적으로 가필(리터치)도 했을 것이다. 이로써 유기적인 전체와 함께 대비와 극적 효과를 강조한 것일 터인데, 판화 고유의 에디션 개념을 재고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작가는 처음부터 작품 자체의 밀도감(그리고 완성도)과 함께, 에디션보다는 일품 회화에서의 오리지널리티 개념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연을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판화)에서는 자연의 원초적인 생명력이 자기표현을 얻고 있다고 했다. 이 원초적인 생명력은 언제 어떻게 발현되는가. 미학적인 용어에 미적 거리두기란 말이 있다. 심적 거리라고도 하는데, 사물 대상의 본질이 드러나는데 요구되는 거리를 의미한다. 단순히 실질적인 거리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 심적 동요, 그러므로 어쩌면 감동을 위해 필요한 거리를 의미한다. 구상과 추상이 가름이 되는, 그러므로 나뉘는 경계의 논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무슨 말인가. 멀리서 보면 사물 대상의 형태가 보이지만,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사물 대상이 화면 전체를 채울 만큼 근접해서 보면, 구상과 추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혼성된다. 경계의 풍경이라고 해도 좋고, 혼성의 풍경이라고 해도 좋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의외의 풍경이 열린다. 자연의 에너지가 열리고, 우연하고 무분별한 자연의 원초적인 생명력이 열린다. 야성이 열리고, 야생이 열린다. 자연의 본성인 카오스가 열린다. 변태도 그렇게 열리는 것, 그러므로 카오스의 본성 중 하나로서, 식물에 잠재된 동물성이, 동물에 내재 된 식물성이, 사물에 잠자던 인격(그러므로 사물 인격체)이 열린다. 예컨대 엉킨 실핏줄 다발을 연상시키는, 선혈을 연상시키는, 동물성을 연상시키는 맨드라미가 그렇다. 그렇게 자연을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판화)에서는 자연의 다른, 숨겨진, 잠재된(사람으로 치자면 억압된) 국면이 자기표현을 얻는다. 존 버거는 다르게 보기가 예술에서의 관건이라고 했는데, 자연의 다른 국면을 드러내 보이는 작가의 작업이 그처럼 자연을 다르게 보는 방법을 제안해놓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특이하게도 작가는 프린트된 이미지 바깥 가장자리 하단에 해당 식물의 학명을 원어 그대로 적어놓았다. 글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정자체가 아니어서 마치 그 자체 또 다른 그림의 일부인 것처럼도 보이는데, 아마도 영어 공부에 열심 일 딸 아이의 필체를 빌려온 것이라고 했다. 자연 도감 혹은 식물도감의 전형적인 폼을 차용하면서도 살짝 비튼, 작가와 딸의 합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유머라고 해도 좋고, 전형을 해석하는, 그러므로 전형을 매개하고 자기화하는 작가만의 방식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도감과 강목>이라고 부른다. 강목은 본초강목의 줄임말로서, 16세기 중국 명나라의 이시진이 펴낸 약학서에서 온 말이다. 그러므로 도감의 형식을 빌린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작가는 그로테스크와 같은, 의외성 같은,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의 분출과 같은, 자연에 억압된 본성이 자기표현을 얻도록 출구를 열어주는 한편으로, 이를 통해 자연을 다르게 보기를 제안한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전형적인, 대표적인 타자로서 자연을 상정하는 한편으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재설정하기를 제안한다. 생태계 문제, 환경 문제, 기후 문제로 위기에 처한 시대 감정과 맞물리면서 작가의 제안은 그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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