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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석/ 너는 누구인가, 나는 무언가

고충환



이우석/ 너는 누구인가, 나는 무언가 


고충환 | 미술평론가


예술은 자기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지향하는지 여하에 따라서 예술의 성격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은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할 것이다. 혹자는 현실에서 예술의 실천 논리를 찾는다(현실주의). 혹자는 현실보다 나은 현실, 현실과는 다른 현실에서 예술의 당위성을 찾는다(이상주의). 혹자는 상실된 현실, 잊힌 현실, 그리움으로 화해진 현실,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현실, 그러므로 본질적이고 원형적인 현실에서 예술의 존재 의미를 찾는다(본질주의 혹은 원형 주의). 그리고 예술의 자율성과 회화의 내재율과 같은, 그림 속에 갇힌 현실에서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를 찾는 이도 있다(형식주의 혹은 예술 지상주의). 

그렇게 지향되는 예술이 있고, 지향하는 자기가 남는다. 현실을 좇고, 이상을 좇고, 본질을 좇고, 형식을 좇는, 그렇게 예술을 좇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림 속에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처음처럼, 그대로, 그림 바깥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언가.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유독 자기 자신에 천착하는 작가들이 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묻는 리어왕의 절규에 공감하는 작가들이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 라는 하나님의 부름에 귀 기울이는 작가들이다.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이 강한 작가들이다. 비록 거대 담론의 시대가 가고 미시적 서사의 시대가 도래했다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리어왕의 절규는 입가를 맴돌고 하나님의 부름이 귓전을 울린다. 시대와 무관한, 시대를 넘어서는, 시대를 관통하는 절규이고 부름이기 때문이다. 운명과도 같은, 존재론적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우석이 그렇고, 그의 회화가 그렇다. 작가는 유체이탈을 경험했고, 이후 지금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아는 사람도 말해줄 사람도 없어서 독학했다고 한다. 아마도 빅뱅과 같은 우주생성론, 모든 존재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그 에너지가 파장과 파동으로 현상하는 에너지 이론, 영적 교감에 바탕을 둔 영성주의 이론, 윤회사상과 만다라와 같은 우주의, 존재의 생성과 순환이론, 그리고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과 관련한 존재론적이고 영적인 텍스트들일 것이다. 

이 가운데 작가는 특히 존재에 내재 된 에너지가 파장으로, 그리고 파동으로 현상한다는 에너지 이론에 주목했을 것이다. 형태적 유사성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존재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그 에너지는 파장과 파동과 같은 물리적(그리고 감각적인) 형상으로 현상한다. 그리고 결의 형태로 현상한다. 기의 형상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그렇게 수면에 이는 물결에도 결이 있고,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에도 결이 있다. 사물을 비추는 빛에도 결이 있고, 사물을 품는 어둠에도 결이 있다. 나무에도 결이 있고, 숨에도 결이 있고, 살에도 결이 있고, 마음에도 결이 있다. 

그리고 신체에도 결이 있다. 지문이다. 특히 지문은 얼굴과 함께 개인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신체에 아로새겨진 생물학적 증명이기도 하다. 지문에는 여섯 가지 대표적인 패턴이 있고, 그 패턴이 변형되고 변주되면서 천차만별의 꼴(그러므로 차이)을 만든다. 여기서 작가는 그 패턴 중 가장 보편적인 패턴 하나만을 취해서 반복적으로 그렸다. 우리 모두 흔한 사람들, 보통 사람들의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누구랄 것도 없는 익명적인 주체에게 저마다 자기를 대입하고 동일시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비록 외형적인 꼴은 천차만별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원형(원형적 패턴)에서 존재가 유래했다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나는 너라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그 지문의 형태가 사람의 얼굴 형상을 닮았다. 지문으로 된 얼굴 형상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존재의 생물학적 증명이 지문으로, 그리고 재차 얼굴로 확대되고 강조되는 경우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이 그림을 바닥에 깔아놓고 그렸다.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그렸다. 그림이 크기도 하거니와, 그림과 행위가, 그림과 자기가 일체화되는 경지와 차원을 보여준다. 특히 이런 일체화는 정색하고 지문을 그릴 때보다 무작위로 물감을 흩뿌리는 행위에서 극대화된다.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도 그렇거니와, 물감을 흩뿌리는 것도 잭슨 폴록의 드리핑을 닮았다. 작가는 아마도 그 과정에서 무아로 나타난 유사 영적 체험을 했을 수 있다. 그 영적 체험이 잭슨 폴록의 무당을 닮았다. 

그렇게 그림은 정색하고 그린 지문과 무작위로 그린 흩뿌리기가, 그림을 세우는 과정과 그림을 해체하는 과정이, 자기에 몰입하는 과정과 자기가 지워지는 과정이, 우연과 필연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이 오롯하다. 그러므로 지문으로 표상되는 정체성이 또렷해지고 아득해지는 과정으로 치열하다. 여기서 지문은 삶의 길을 닮았다(길은 삶의 전형적인 메타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위에 흩뿌려진 비정형의 얼룩이 길을 잃은 미아를 보는 것 같고, 아득한 우주 저편에서 가물거리는 별빛을 보는 것 같고, 막막한 우주를 떠도는 고독(고독한 존재)을 보는 것도 같다. 그렇게 정체성이 지문으로, 얼굴로, 별빛으로, 그리고 재차 별빛을 품고 있는 우주(우주적 자궁)로 확대 재생산된다. 

여기에 작가는 큰 그림을 그릴 데가 없어서 작업실 옥상 바닥에 펴놓고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면서 바람을 맞혔고, 비를 맞혔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그림은 저 홀로 밤을 맞았다. 때로 바람이 불어와 그림을 뒤집기도 했고, 비가 먼저 그린 그림을 지우면서 그림 위로 예상치 못한 물길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작가는 바람의 의지를 인정하고, 비의 의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작가와 자연이 협력해 그림을 그렸다. 어쩌면 정체성 형성에 자연의 지분도 있을 것이므로, 이마저도 반영한 그리기이며 그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그림 위로 작가는 투명 비닐을 덮어서 늘어트렸다. 그렇게 맨살을 드러낸 부분이 있고, 비닐에 가려진 부분이 있다. 정체성의 이중성이며 양가성을 표상한 것이라고 했다. 욕망하는 주체와 욕망을 감추는(혹은 억압된) 주체, 자기를 표현하는 주체와 침묵하는 주체 간 분열과 상호작용을 표상한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벽을 다 가릴 만큼 큰 그림이 전시장에 걸렸다. 전체적으로 어둑한 가운데, 얼굴 형상을 한 지문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도록 연출된 전시장이 성소를 연상시킨다. 지문 위로 난 길에도 불구하고 정작 길을 잃은 미아 같은, 아득한 우주 저편에서 가물거리는 별빛 같은, 막막한 우주를 저 홀로 떠도는 고독한 존재 같은, 정체성(들)의 성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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