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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종완, 어떻게 인간이라는 상황으로부터 탈주할 것인가

고충환



추종완, 어떻게 인간이라는 상황으로부터 탈주할 것인가 


고충환 | 미술평론가


사람에 대한 형식실험을 계속했다. 그리고 작가는 마침내 탈이라는 주제에 도달했다. 아마도 그동안의 암중모색이 어느 정도 밝아지면서 가닥이 잡히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한동안 탈이라는 주제에 머물렀고, 앞으로도 한참 동안 탈이라는 주제와 마주할 것이다. 어쩌면 그 주제를 떠나보낼 날이, 그 주제를 훌훌 벗어버릴 날이 영영 안 올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는 그 주제가 이미 삶 자체이기도 할 것이므로. 어쩌면 죽음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주제이기도 할 것이므로. 

여기서 탈은 가면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가면은 정체성을 의미하는 페르소나의 원래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산다.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주체, 타자가 욕망하는 주체, 타자의 욕망에 부응하는 주체의 탈을 쓰고 산다. 그 탈 뒤에 숨은 얼굴이 또 다른 정체성을 의미하는 아이덴티티에 해당한다. 그렇게 나는 가면과 가면 뒤에 숨은 얼굴로,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분리된다. 그러므로 자기분열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고 운명이다. 부조리한 삶의 원인이고 실존적 조건이다.
 
또 다른 경우로 치자면 이드와 자아와 초자아(프로이트)가 있고, 상상계와 상징계와 실재계(자크 라캉)가 있다. 이드가 욕망하는 주체라고 한다면, 초자아는 그 욕망을 감시하는 주체 그러므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주체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상상계가 욕망하는 주체라고 한다면, 상징계는 그 욕망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자기검열에 해당한다. 그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욕망 그러므로 억압된 욕망이 무의식의 지층으로 숨어들면서 실재계를 이룬다. 그러므로 실재계는 좌절된 욕망, 억압된 욕망들의 거소랄 수 있고, 얼굴로 치자면 가면 뒤에 숨은 민낯이 되겠다. 억압된 것들의 귀환(프로이트)이, 억압된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임계점을 넘보는 헤테로토피아(미셸 푸코)가,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슬라보예 지젝)이 이런 실재계의 민낯을 예시한다. 

여기서 작가는 그 가면을 벗어던지고 싶다. 그 가면으로부터 탈주하고 싶다. 그 가면 뒤에 숨은 얼굴을 되찾고 싶다. 여기서 탈의 또 다른 의미에 해당하는, 자기로부터의 탈주라는 의미가, 실천 논리가 유래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탈이라는 주제는 가면을 쓰고 산다는 자의식을, 그리고 그 가면으로부터 탈주하고 싶다는,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를 되찾고 싶다는 자의식을 의미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탈이라는 주제는 그 의미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개인적인 경험치를 보편적인 가치로 승화하는 과정을 통해 공감을 얻고 공유를 얻는 것이다. 나는 가면과 가면 뒤에 숨은 얼굴 그러므로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분리돼 있다는 자의식, 욕망을 실현하려는 주체와 욕망을 억압하고 감시하는 주체로 분열돼 있다는 자의식, 가면으로부터 탈주해 가면 뒤에 숨은 얼굴과 대면하고 싶다는,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를 되찾고 싶다는 자의식은 비록 작가 개인의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사실은 모두가 공감하고 공유하는 실존적 조건을 예시해준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보편성을 얻는다. 

일종의 심리극(장) 혹은 사회심리극(장)이 예시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한편으로 그 기획, 말하자면 가면으로부터 탈주해 진정한 자기와 대면하고 싶고 진정한 자기를 되찾고 싶다는 기획은 사실은 진즉에 실패가 예정된 기획일 수 있다. 가면도 자기고, 가면 뒤에 숨은 얼굴도 자기다. 페르소나도 자기고, 아이덴티티도 자기다. 욕망을 실현하려는 주체도 자기고, 욕망을 억압하고 감시하는 주체도 자기다. 그러므로 자기부정을 통(과)해서 자기 긍정에 이르는, 자기부정을 통해서 억압된 자기(자기_타자)를 되찾는 것이란 점에서 자기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기획이다. 이처럼 진즉에 실패가 예정된 기획, 자기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기획에도 불구하고, 끝내 진정한 자기(자기_타자)와 대면하려는 실천 논리를 예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숭고를 얻는다. 

그렇게 작가의 심리극(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없다. 있다 해도 알아볼 수가 없다. 마구 구겨진 비닐봉지나 종이조각 위에 그려진(실제로는 그처럼 재현된) 것이어서 알아볼 수가 없다. 때로 그 조각은 구김을 넘어 낱낱이 해체되면서 뿔뿔이 흩어지기조차 한다. 이처럼 해체된 얼굴,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이 자기부정을 표상하고 자기분열을 표상한다. 때로 자화상(그리고 모나리자)과 같은 일부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 해체된 얼굴이, 누구인가를 특정할 수 없는 얼굴이 불 특정적이고 다중적인(그리고 익명적인) 주체를 표상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자기와 동일시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작가처럼, 작가의 그림 속 주체처럼 자기부정을 겪는, 자기분열을 겪는, 자기 상실을 겪는, 실존적 위기를 겪는 현대인의 초상을, 현대인의 징후와 증상을 표상한다고 해도 좋다. 저마다 자기 욕망과 싸우는 자기(자기_타자)를 표상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몸(그리고 특히 얼굴)은 욕망을 표상한다. 자기분열과 자기부정 그러므로 자기 극복의 대상이 된다. 플라톤은 몸(육체)이 정신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했다. 작가는 그 감옥으로부터 탈주하고 싶다. 몸으로부터 탈주하고 싶고, 욕망으로부터 탈주하고 싶다. 동굴 속 감옥에 갇힌(그러므로 욕망에 사로잡힌) 수인 그러므로 정신을, 다시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_타자를 구원하고 싶다. 자기부정을 통해서 자기 긍정에 이르는, 그렇게 자기가 거듭나는 과정을 예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통과의례와 희생제의의 메타포 혹은 알레고리로도 볼 수 있겠다. 

그 과정에서 몸은 욕망을 표상하고, 껍데기를 표상하고, 욕망의 껍데기를 표상한다. 그 위에 얼굴이 그려진, 마구 구겨지고 찢어진 비닐봉지와 종이조각이 그 부질없는 욕망을 증명하기 위해, 껍데기를 증거 하기 위해 소환된다. 그리고 마침내 비닐봉지만 남았다. 외관상 비닐봉지를 소재로 한 독립된 작업처럼 보이는 작가의 근작은 그러나 사실은 그 이면에서 이처럼 껍데기로 남은 존재를 증명하면서, 탈에서 시작된 작업의 주제 의식을 심화하고, 확장하고, 변주하고 있는 것이다. 

더러 화사한(?) 색상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검은 비닐봉지를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때로 색색의 플라스틱 빨대를 소재로 기하학적 형태와 패턴을 재구성한 작업)에서 작가는 열을 동반한 다림질을 통해 비닐봉지를 압축해 납작한 평면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비닐봉지를 캔버스에 위치시킨 후 에폭시 레진을 부어 마감했다. 캔버스와 투명 소재(레진) 사이에 비닐봉지가 갇히는 꼴이 됐는데, 이로써 비닐봉지를 박제화하고 화석화했다고 해야 할까. 미니멀한 구성과 투명 소재가 디아섹 사진을 보는 것도 같고, 비닐봉지를 기념하고 오마주하는 것도 같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이 일련의 작업을 <위대한 유산>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작가의 작업은 과연 비닐봉지를 인류 문명의 위대한 유산으로 보고, 이를 기념하고 오마주한 것일까. 

섣부른 결론을 내리자면, 그렇지는 않다. 반어법이다. 위대한 유산이라는 주제를 역설적인 표현으로 읽을 때 비로소 탈에 기초한 존재론적 상실과 위기의식으로 나타난 전작에도 부합한다. 전작에서 비닐봉지는 존재의 껍데기를 표상했고, 존재의 껍데기를 증명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그러므로 근작에까지 살아남았다. 존재론적으로 비닐봉지가 존재의 껍데기를 표상한다면, 인류학적인 측면에서 비닐봉지는 인류세로 대변되는 지구 족 사람들의 위기의식을 반영한다. 

주지하다시피 인류세 담론은 하나의 지질시대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인간의 생산물에 의해, 인간의 활동으로 환경이 결정되고 기후가 변화되는 시대를 의미한다. 그렇게 환경을 결정하고 기후를 변화시킨 결정적인 인간의 생산물이 플라스틱이고 비닐봉지다. 지질시대를 재정의해야 할 만큼 결정적인 물질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작가가 주제로서 제안해놓고 있는 위대한 유산이라는 말이 시의적절해 보이는 부분이 없지 않다. 반어법을 통해 무분별한 욕망과 인류가 자초한 욕망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한 경우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일견 세련된, 미니멀한, 모던해 보이는 비닐봉지 작업은 사실은 그 이면에서 존재론적 상실감과 인간 문명의 위기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다시,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탈이라는 주제 의식을 매개로, 비닐봉지라는 물질 소재를 매개로 존재론적 층위에서 인류학적(혹은 문명사적) 차원으로 작업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 있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 라고 물었다. 아마도 작가 추종완의 작업 역시 같은 물음을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밀란 쿤데라는 현대인의 삶이 비극적인 것은 비극(비극에 대한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가 역시 공감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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