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박신양, 존재의 존재다움을 어떻게 열어놓을 것인가

고충환



박신양, 존재의 존재다움을 어떻게 열어놓을 것인가 


고충환 | 미술평론가

작가 박신양은 작가이면서 배우다. 오랫동안 배우로서 타자의 삶을 연기했다. 적어도 무대에서만큼은 타자의 삶을 살았다. 연기에 더 잘 몰입하기 위해 때로 일상에서마저 삶을 연기했다. 사람들은 그를 그가 연기한 타자로서 기억했다. 사람들의 기억에 그는 없었다. 자기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기분열은 오롯이 작가의 몫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그중 존재론적인 사람들의 몫이었다. 다만 드러내놓고 타자의 삶을 연기하는, 그러므로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타자의 삶을 사는 작가의 경우에 그 징후와 증상을 더 크게 앓는 것이 다르다.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자기분열은 모든 존재론적인 인간의 보편적인 자의식이고 질병이다. 

주체는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분리된다. 가면 주체와 가면 뒤에 숨은 자기로 분리된다. 사회에 내어준 주체, 타자들이 욕망하는 주체가 가면 주체다. 그리고 나는 가면 뒤에 숨는다. 그래서 어쩌면 사람들은 나를 본 적이 없고, 나를 모른다. 때로 가면을 너무 오래 쓰고 있어서 나 자신조차도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가면이 얼굴이 되었고, 내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가.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런 심각한 자기반성적 사유에서 비롯된다. 절박함이, 그러므로 어쩌면 내적 필연성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해도 좋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묻는다. 그리고 예술은 질문의 기술이다. 존재의 유래를 묻고, 존재의 안부를 묻는 것에 예술의 당위성이 있다. 그렇게 작가는 때로 연기를 통해, 그리고 더러 그림을 매개로 자신을 묻는다. 연기로 인해 오히려 분리된 자기, 분열된 자기,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_타자를 더 뚜렷하게 인식하게 된 것이, 그렇게 저절로 예술의 본질적인 물음에 가닿은 것이 흥미롭다. 


너무 그리워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러시아 친구 키릴과 유리 미하일로비치 압샤로프 선생님. 2013년인가 2014년인가. 그로부터 매일 밤새 그림을 그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5년쯤 지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매일 밤 그림을 그리고 있다.
- 작가 노트

분열된 자기를 향한 자의식이 작가가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했다. 존재론적 자각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 외 더 실질적인 동기로 그리움이 있다. 그리워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기치고는 유별난 부분이 있다고도 하겠지만, 작가는 매일 밤 그림을 그렸고, 매일 밤 그리워했다. 그렇게 5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1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리고 이후로도 작가는 얼마만큼의 세월을 더 그리워하면서 흘려보낼지 모른다. 

그리움을 그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우라다. 오마주다. 연민(그리고 자기연민)이다. 원형이다. 발터 벤야민은 실제로는 아득한 것인데, 마치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을 아우라라고 했다. 그리고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기억을 매개로 그리운 대상을 소환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기억(때로 망각 된 기억)을 매개로 자신만의 감정 사용법을 찾고 있었고, 무의식보다 깊은 심연에서 그리움의 원형질을 길어 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그리운 친구 키릴을 그렸다. 무용과 연극의 경계를 허문, 무용을 연극적인 상황 논리로 풀어낸 탄츠테아터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안해 현대무용의 판도를 바꿔놓은, 아마도 작가의 뮤즈일, 독일 출신 표현주의 무용가 피나 바우쉬를 그렸다. 이중섭의 가난한 예술가의 신화를 그렸고, 에곤 슐레의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자유혼을 그렸다. 격정에 사로잡힌 연인을 테마로 한 오스카 코코슈카의 원작을 재해석한 바람의 신부를 그리기도 했다. 그밖에 행복의 의미를 일깨워준 신부님이 건네준 사과를 그렸고, 사람들 저마다 선택한 짐을 표상하는 당나귀를 그렸다(당나귀를 그릴 때 작가는 다른 그림을 그릴 때보다 더 아프다). 그리고 몇 점의 자화상을 더 그렸다. 

어쩌면 이 모든 그림이 작가의 자화상일 수 있다. 자기가 그리워하는 대상을 불러온 것이므로. 그리움의 화신, 그러므로 정작 그리워하는 자기 자신을 그린 것이므로. 자신이 오마주하고 자기연민을 투사한 것이므로. 자기감정을 나누어 가진 것이므로.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 분신일 것이므로. 그렇게 타자의 초상 속에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이 있을 것이므로. 


니체는 예술가의 충동을 자기 내면에 질서의 성소를 건축하려는 아폴론적 충동과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의 분출을 향한 디오니소스적 충동으로 구분했다. 각 코스모스와 카오스, 에토스와 파토스의 구분에 해당한다고 해도 좋다. 하나의 인격 속에 두 충동이 길항하고 부침한다고 본 것이지만, 보통은 어느 한쪽이 발달 된 경향성을 보인다. 그렇게 경향성 여하에 따라서 아폴론적 유형의 작가가 있고, 디오니소스적 유형의 작가가 있다. 코스모스 형 작가가 있고, 카오스 형 작가가 있다. 에토스가 발달 된 작가가 있고, 파토스가 강한 작가가 있다. 모든 유형화의 기획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작가의 성격(개성)을 부각하는, 작가의 지정학적 위치를 가름하게 해주는 개념적 도구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유형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작가의 회화적 기질은 상대적으로 디오니소스가, 카오스가, 그리고 파토스가 강한 편이다. 그 선례로 치자면 표현주의가 있고, 작가의 그림 역시 그 바탕에는 표현주의에서 이식된 영향 관계가 확인된다. 표현주의와 신표현주의 그리고 통독 이후 라이프치히 화파로 대변되는 독일 표현주의의 회화적 성과를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형식적으로 드로잉과 프리페인팅 그리고 해체주의가 부수된다고 해야 할까. 실제로도 그렇게 정의하는 미술사가들이 없지 않거니와, 어쩌면 표현주의는 미술사에 등장하는 하나의 이즘 이상의, 시대를 초월해 재해석의 가능성에 대해 열려있는 항상적으로 유효한 개념이며, 일종의 회화적 기질이라고 해도 좋다. 주지하다시피 표현주의는 감정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그런 만큼 객관적 현실보다는 현실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강하다. 그렇다면 작가는 객관적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는가. 어떻게 또 다른 세상을 열어놓는가. 


그림(그리고 작가 노트)에 나타난 작가의 육성으로 유추해보자면, 작가는 가면에 가려진 얼굴을 그린다고 했다. 얼굴에 숨겨진 자기를 그린다고 했다. 그리움을 그린다고도 했다. 예술가 신화를 그린다고 했고, 자유혼을 그린다고 했다. 바람의 신부, 그러므로 아마도 격정을 그린다고도 했다. 하나의 사과에 담긴 행복의 의미를 그린다고 했고, 당나귀로 표상되는 아마도 삶의 알레고리를 그린다고도 했다. 하나같이 그 자체로는 형태도 색깔도 없는 것들이고, 우연적이고 비결정적인 것들이다. 결국 없는 형태를, 색깔을 찾아갈 수밖에. 그 과정에서 객관적 현실을 참조할 수 있지만,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객관적 현실을 넘어 주관적 해석을 여는 것이며, 존재를 넘어 존재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며, 자기를 넘어 자기_타자와 만나는 것이다. 하이데거라면 존재의 존재다움을 여는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순간적으로 그린 그림도 없지 않지만, 대개는 그리고 지우고 뭉개고 덧칠하기를 무한 반복한 그림들이 많다.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멈칫하고, 내지르고, 거둬들인 흔적이 여실하다. 매 순간 긍정과 부정이 교차 되고, 확신과 주저가 교직 되는 치열한 과정이 오롯하다.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결국 그 치열한 과정이고 흔적이지 않을까. 바로 그 과정과 흔적이 그리움(절실한 그리움, 그러므로 그리움의 질)을 암시하고, 얼굴은 얼굴대로 사물은 사물대로 저마다 존재의 존재다움을 열어놓는 것이 아닐까. 

토마스 만은 예술이 결핍 위로 솟아오르는 무엇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결핍(간절함, 절실함, 진정성, 그러므로 어쩌면 내적 필연성)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고도 했다. 작가의 그림에는 결핍이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결핍이 밀어 올린 동력으로 존재의 극적인 순간을, 존재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을, 그러므로 어쩌면 육화된 파토스를 열어놓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여기에 흥미로운 그림이 있다. <게라심과 무무>. 정작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는 못 본 그림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크게 다가오는 그림이다. 향후 작가의 그림이 나아갈 방향을 잡아줄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의 단편소설 <무무>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 사랑, 죽음을 부르는 사랑은 낭만주의의 핵심 테마지만, 여기에 구 러시아 농노제의 계급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결부된, 아픈 사랑을 그린 이야기다. 

아픈 작가가 아픈 이야기에 끌렸을 것이고, 아픈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 아픔의 강도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흥미롭게도 이 그림이 예술가의 알레고리로 다가온다. 조각배에 두 사람(아니면, 한 사람과 한 사람의 주검?)이 노 저어가는 그림이다. 주지하다시피 일엽편주, 그러므로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 외로운 배는 삶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에서 배는 마치 덕지덕지한 물감의 바다를 노 저어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그림의 바다를 항해하는 예술가의 초상을 보는 것 같다. 문학적인, 서사적인, 극적인, 알 수 없는, 낯 설은, 암시적인, 그러면서도 현실과 연결된 끈을 끝내 놓지 않는 라이프치히 화파의 알레고리가 강한 회화를 보는 것도 같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