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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 기억과 현실 사이 어디쯤엔가 있을

고충환



이혁, 기억과 현실 사이 어디쯤엔가 있을 


고충환 | 미술평론가


작가 이혁은 북한에서 미술을 전공한 탈북작가다. 남한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 뿌리는 북한에 있는데, 정작 남한에서 살고 있다. 마음은 북한에 있는데, 몸은 남한에 있다. 탈북하는 순간, 작가의 주제는 저절로 주어졌고 운명적으로 결정되었다. 정체성 문제다. 주제가 반이라는 말이 있다. 주제를 잡으면 그림의 절반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고, 그만큼 주제가 결정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남한에서도 정체성 문제는 주제 중 주제다. 자본주의와 페티시즘 그러므로 물신 숭배가 불러온 인간소외와 자기 소외현상, 정체성 혼란과 정체성 상실 문제는 거대 담론의 중추고 핵심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리어왕은 절규했다. 예수는 미친 사람 속에 군대가 살고 있다고 했다. 후기구조주의에서는 주체를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라고 했고, 현대미술에서는 그 정의를 증명이라도 하듯 자기 분열과 다중 자아가 한창이다. 비록 그 결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러므로 작가의 주제의식은 실존적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에도 부합하고, 이에 따른 자기반성적 사유에도 부합한다. 그리고 여기에 현대미술의 생리와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문제라기보다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면, 자기 정체성 문제를 사회적인 정체성 혹은 집단 정체성의 문제로 확대 재생산하는 일일 것이다. 자기에 함몰되지 않고 타자와의 네트워크, 관계의 네트워크 속으로 진입해 보편성을 획득하고 공감을 얻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작가의 그림에서 상당할 정도로 이미 예시되고 있다. 

정체성 문제를 주제화한 작가의 그림은 크게 자화상 시리즈와 관월산수도(혹은 줄여서 관월도)로 구분된다. 먼저 자화상 시리즈를 보면, 겁먹은, 놀란, 그러면서도 공격적인 개에 자신을 빗댄 그림이 자신이 처한 현재 상황과 현실 인식을 보여준다. 비록 작가의 개인적인 현실 인식을 그린 것이지만, 파놉티콘 그러므로 감시사회를 사는 권력과 개인, 자본과 개인의 관계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보편성을 얻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관월도는 달을 보면서 관조하는 그림인데, 아마도 달을 보면서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린 그림일 것이다. 작가의 말을 옮기자면, 자본과 이념이 개입할 수 없는 이상향이며, 그리운 대상과 만날 수 있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공간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달을 보면서 그리워한다. 저마다 그리운 마음을 담아 그림을 봐도 좋을, 그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라는 생각이다.

자화상이든 관월도든 그 풍경이 하나같이 황량하고 쓸쓸하다. 막막한 우주에 던져진 미아처럼 고독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지극한 상실감이 지배적인 정서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 상실감의 풍경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의외로 위안이 된다. 이렇듯 역설적인 풍경의 질감이야말로 작가의 그림에서 결정적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지우기 그러므로 긍정과 부정이 수도 없이 반복되면서 만들어낸 질감의 풍경이다. 그리움 그러므로 기억과 현실 사이의 풍경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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