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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겸/ 시간 풍경, 편집된 풍경, 그리고 기후 미술

고충환



정다겸/ 시간 풍경, 편집된 풍경, 그리고 기후 미술 


고충환 | 미술평론가


회화에 본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는가. 종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현대미술은 그런 것은 없다고 답하는 것 같다. 회화의 본질을 부정하는 형식실험장 같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본질은 있다. 가장 강력하고, 더욱이 현대미술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그리고 여기에 생산적이기조차 한 회화의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재현일 것이다. 감각적 현실을 재현해 또 다른 현실을 제안하는 것이 그렇다. 미술사 전체를 아우를 만큼 재현은 오랫동안 회화의 본질로 여겨져 왔지만,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사진의 등장으로 인해 회화의 재현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재현을 놓고 다투면서 회화는 자기 변신을 꾀할 수밖에 없었고, 덩달아 현대미술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외관상 재현은 회화로부터 사진으로 넘어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진이 가장 강력한, 가장 대중적인, 가장 현대적인, 그리고 여기에 끊임없는 자기 변신을 보여주고 있는 미디어인 만큼 회화는 사진을 참조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재현을 현대미술의 생리에 맞게 재해석하고, 재정의해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진 역시 회화를 참조하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 회화적 사진이 있다. 그렇게 현대미술에서 재현을 매개로 한 회화와 사진과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보아야 하고, 작가 정다겸의 회화는 그 관계에 주목하면서 자신만의 회화형식을 열어놓고 있다. 


작가는 변방에 산다. 도시와 도시의 경계 지역이다. 변방 풍경의 특징적인 요소라고 부를 만한 지점들이 있는데, 본격적인 자연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가까운데 숲이 있고 오솔길이 있다. 지척에 주말이면 사람들이 몰려왔다 빠져나가는 유원지가 있고, 평소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반쯤 버려진(한가로운?) 공원이 있다. 그리고 거의 매일같이 재개발을 위한 크고 작은 공사 현장을 접할 수 있다. 파헤쳐진 땅, 빗물이 고인 얕은 물웅덩이, 뿌리 뽑힌 나무, 전지로 잔가지를 잃은 채 벌거벗고 서 있는 가로수, 수북한 잔가지를 덮고 있는 마구 웃자란 덤불들, 지금은 작가의 그림 속에서나 남아있는, 원래 있다가 사라진 나무와 같은 어수선한 풍경이다. 재개발 현장이 만든 풍경이라는 점에서 인공적인 풍경이며, 사회적인 풍경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어떤 계기로 이런 어수선한, 인공적인, 사회적인 풍경, 그러므로 변방 풍경을 그리게 되었을까. 꼭 그런 곳에 살아서라기보다는 평소 작가의 이념적이고 정서적인 감각 레이더가 향한 곳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단언할 수는 없지만, 도심 속에 살았다 해도 일부러 그런 곳을 찾아다녔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작가적 체질이라고 해야 할까. 이처럼 작가의 레이더가 향한 곳인 만큼 그곳에서 작가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그리고 실제로 무엇을 찾았는지 살필 일이다. 거기에 작가가 겨냥하는 이념이, 그리고 작가가 환기하고 싶은 정서가, 그러므로 작가가 추구하는 주제 의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일상처럼, 습관처럼 이 풍경들을 사진으로 찍는다. 시간 차이를 두고 같은 풍경을 여러 번 반복해서 찍기도 하고, 사진을 찍는 동안 원래 있던 나무가 없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풍경이 바뀐다. 사진을 찍으면서 시간이 흐르고, 시간과 함께 그동안 바뀐 풍경이 사진으로 기록된다. 일종의 스케치라고 해도 좋을 이 과정에는 그러므로 시간(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시대)을 기록하고 축적하는 아카이브적인 면이 없지 않다. 

작가는 이렇게 채집된 사진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는데, 화면에 사진을 프로젝션한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사진 이미지 그대로 그려질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작가의 직관과 감각으로 어떤 부분을 생략하기도 하고, 특정 부분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미지에 이미지를 덧붙이기도 하고, 이미지와 이미지를 편집하기도 한다. 사진을 참조해 사진에는 없는, 사진과는 다른, 자신이 생각하는 화면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에 회화 재료와 그 생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캔버스에 유화와 아크릴 같은 서양화 재료라고 한다면 사진 이미지와 똑같이 그릴 수도 있는 일이지만, 한지에 먹으로 그린 그림이라면 사정은 다르다. 먹은 번지는 성질이 있고, 여기에 한지는 먹을 먹는다. 먹이 한지에 스며들면서 번지는 탓에 사물을, 모티브를 결정화된 형태로 붙잡을 수가 없다. 표면적으로, 그리고 그 이면에서 미묘한 차이를 생성시키면서 어떤 아우라(분위기)를 만든다고 보면 되겠다. 실제로 작가의 그림에는 이런 아우라가 강하고, 이로 인한 서정적 환기가 결정적이다. 아마도 시간이 흐르고 쌓이면서 환기하는 분위기를, 그 분위기가 환기하는 정서적 질감을, 사진의 즉물성과는 다른, 그러므로 어쩌면 아득하고 먼(아련한?) 느낌을 작가는 겨냥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서 특징적인 부분으로 치자면 일종의 모자이크 회화를 들 수 있다. 대개는 같은 사이즈의 작은 그림을 한자리에 모아 전체적으로 하나의 큰 그림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라고도 하겠지만,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가변설치가 가능하고, 여기에 자유자재한 편집에 대해 열려있다는 점이다. 앞서 작가는 시간 차이를 두고 같은 풍경을 여러 번 반복해서 사진으로 찍는다고 했다.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로 피사체는 하나인데, 그 부분 부분이 함축하고 있는 시간의 질감이 다 다르다. 시간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보면 시간 풍경이고, 시간을 편집한 것으로 치자면 편집된 풍경이라고 해도 좋다. 아예 피사체가 다른 대상을 편집해 하나의 그림으로 재구성하는 식의, 편집된 풍경의 또 다른 진화를 예비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일종의 설치회화를 매개로 평면을, 그리고 벽면을 넘어 마치 조각처럼 공간을 점유하는 회화, 공간 경험으로 유도하는 회화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기도 하다. 모자이크 회화도 그렇지만, 그림 자체를 넘어 디스플레이 방식을 통해서도 자기표현을 확장하고 있는 경우로 보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지금까지 작가의 그림과는 그 결이 사뭇 다른, 그렇게 또 다른 가능성을 예시해주는 그림이 있어서 주목된다. <봄비>가 그렇고, <봄바람>이 그렇다. 먹이 채 마르기 전에 화면에 비를 맞혀 빗방울이 지표면에 떨어지는 순간의 질감을 기록한 그림이다. 그리고 채집한 송홧가루를 먹이 채 마르지 않은 화면에 흩뿌려 정착시킨 그림이다. 먹과 장지의 물성을 이용해 기후 현상을 기록한(그린), 그러므로 일종의 기후 미술이라고 불러도 좋을 지점을 예시해주고 있다. 참고로, 현재 가장 핫한 담론으로 인류세 담론을 들 수 있다. 인구 증가와 함께, 플라스틱과 같은 인간의 발명품이 지구환경을 결정하는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기후 미술은 바로 그 인류세 담론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바람이 불고(봄바람에서처럼), 비가 내리는(봄비에서처럼) 기후 현상을 소재로 현대미술의 또 다른 한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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