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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영/ 고독한, 쓸쓸한, 공허한, 부조리한 존재

고충환



최우영/ 고독한, 쓸쓸한, 공허한, 부조리한 존재 


고충환 | 미술평론가


탁자 위에 놓인 손과 그 위에 얹힌 머리, 책상 위에 납작 기대어 숙인 머리. 질 들뢰즈의 <소진된 인간>에서 인용한 구절이라고 했다. 사무엘 베케트의 텔레비전 단편극에 대한 철학적 에세이로 쓴 본 저작에서 들뢰즈는 그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를 남김없이 불태워 버렸기에 오늘이든 내일이든 먼 훗날이든 더 이상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적었다. 부조리한 인간에 바쳐진 베케트의 부조리극에 대한 함축된 논평이라고 해도 좋다. 전면적인, 총체적인, 파국적인, 본질적인, 남김 없는, 그러므로 여지없는 실존적 위기 상황에 대한 논평이라고 해도 좋다. 이처럼 자기를 남김없이 소진한 인간, 그러므로 소진된 인간의 또 다른 버전으로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있다. 경쟁으로 내모는 사회를 넘어 개인의 능력 이상을 요구하는 사회가 불러온 인간소외와 번아웃을 경고하는 저작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 결은 좀 다르지만 짐 자무쉬의 <커피와 담배>도 있다. 

그중 작가가 인용한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그림을 위해 예비 된 논평이라고 해도 좋고,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을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탁자 위에 놓인 손이 있고, 그 위에 얹힌 머리가 있고, 책상 위에 납작 기대어 숙인 머리가 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있다. 몸을 자기 안쪽으로 한껏 감싸 안은 웅크린 사람이 있고, 턱에 손을 괸 채 자기에 골몰하는 사람이 있고, 군중 속에서 오히려 더 고독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아마도 자기를 남김없이 소진한 사람이 있고, 피로에 지친 사람들이 있다. 


작가의 그림에는 단조롭고 텅 빈공간이 있다. 카페일 것이다. 작가의 방일 것이다. 내면의 방, 그러므로 작가의 심리적인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 방이 세계로부터 작가를 보호하면서 소외시킨다. 방의, 그리고 집의 이중성이고 양가성이라고 해도 좋다. 단조롭고 텅 빈공간이 그 방에 안주하는 사람들을 대비시키면서 강조한다. 방이, 공간이 사람들의 심리를 유비적으로 표상한다고 해야 할까. 방의 심리와 사람들의 심리가 서로 일치하고 부합한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마치 외부와 단절된 일상적이고 가상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한편의 상황극을 보는 것 같다. 그 방에는 극적인 긴장감이 흐른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담배 연기처럼 공허한 기운이 흐르고, 우울하고 비극적인 정서가 흐른다. 

이 비극적인 정서는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희극이 사람을 경망스럽게 한다면, 비극은 정신적으로 고양 시킨다고 했다. 밀란 쿤데라는 현대인의 삶이 비극적인 것은 비극이 없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비극 자체가 없다기보다는 비극에 대한 감을, 내성을 현대인이 상실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처럼 현대인은 온통 상실의 계절을 살고 있다. 좀 극적으로 말해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해주는 전형이라고 해도 좋다. 현대인이 앓는 징후며 증상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상실한(상실을 앓는) 사람들이 가면(페르소나)을 쓰고 산다. 사회에 내어준 주체, 그러므로 사회적 주체, 타자들이 욕망하는 주체를 산다. 그리고 나는 그 주체 뒤에 숨는다. 그런 만큼 사람들은 사실은 나를 모르고, 나는 너를 모른다. 나의 말은 입가에 맴돌 뿐 너에게 가닿지 못한다. 너의 말은 나에게 오는 도중에 허공에서 길을 잃는다. 그렇게 나는 고독하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더 고독하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비록 자신의 개인적인 심리적 정황을 그린 것이지만, 그리고 사람들과 겉도는 관계를 그린 것이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우리 모두 그 징후며 증상을 앓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작가 개인의 실존적 자의식을 그린 것이면서, 동시에 저절로 현대인의 공허한 초상을 그려놓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부지불식간에 시대 감정을, 세대 감정을 그려놓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 


결정적으로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얼굴이 없다. 머리는 있지만, 다만 머릿속의 한 점으로 축소된 얼굴이, 얼굴이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한 점이 있을 뿐이다. 처음엔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나 했다. 머리에 두건을 쓴 채 뭔가 알 수 없는 몸짓으로 어떤 억압적인 상황이라도 연기하나 싶었다. 그런데 제대로 눈여겨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그 점이 얼굴이라고 했다. 다만 추상적인 한 점으로 축약 표현된 얼굴이 알 수 없는, 막연한, 밑도 끝도 없는 심연에 난 구멍 속 깊이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한다면 너무 극적인 표현이고 해석이라고 할까. 알 수 없다고 했다. 막연하다고 했다.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없고 표정도 없다. 그러니 그의 심리적 정황을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림 자체가 발하는 분위기와 정황상 우울한, 내면적인, 고독한, 그리고 단절된 느낌을 유추해볼 수는 있다. 

얼굴이 없다는 것, 얼굴이 없다기보다는 다만 추상적인 한 점으로 축약 표현된 얼굴이 얼굴 읽기를 방해한다. 무슨 말인가. 익명성이다. 가면은 얼굴이 아니다. 사람들은 가면에 가려진 얼굴이 궁금하지만,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얼굴이 밝혀지는 순간, 그러므로 어쩌면 얼굴이 까발려지는 순간은 폭력적인 순간일 수 있다. 가면이 캐니(친근한 얼굴)라고 한다면, 가면에 가려진 얼굴은 언캐니(낯설은 얼굴)일 수 있다. 캐니와 언캐니는 상호내포적이다. 캐니 속에 언캐니가, 언캐니 속에 캐니가 내장돼 있다. 어쩌면 캐니가 언캐니의, 그리고 언캐니가 캐니의 잠재된 본성이라고 해도 좋다. 다르게 말하자면 일상이 불안을 내장하고 있고, 그러므로 불안이 일상의 잠재된 본성이라고 해도 좋다. 폭력을 감수하면서까지 언캐니가, 낯선 현실이, 존재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을 슬라보이예 지첵은 실재계의 돌발적인 출현이라고 불렀다.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에다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니 궁금증을 접고 서로의 가면을 인정할 수밖에. 그러므로 가면은, 가면으로 대리되는 익명적인 주체는 어쩌면 존재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우리 모두 공모해 만든 사회적 합의고 발명품일지도 모른다. 심리학이, 그리고 사회심리학이 자기 보호를 위해 발명한 장치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익명적인 주체와 익명적인 주체가 만났으니 그 관계가 겉돌 수밖에 없고, 그 대화가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너와 있을 때 더 공허하고, 군중 속에 있을 때 더 고독하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세계에 던져진 존재, 그러므로 세계 내 존재라고 불렀다. 그렇게 던져진 존재, 떠도는 존재가 고독한 것은 어쩌면 필연이고 운명이다. 존재 자체가 이미 부조리한 이유일 수 있다. 내가 고독한 만큼이나 너도 고독하다. 나의 고독을 인정한다는 것은 동시에 너의 고독도, 그러므로 너의 부조리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가면에 가려진 얼굴이, 그러므로 익명 뒤에 숨은 존재가 역설적으로 타자를 인정하고, 자기_타자를 끌어안는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타자를 인정하고 자기_타자를 끌어안는 공감이 있고 연민이 있다. 고독한, 쓸쓸한, 공허한, 그러므로 부조리한 존재를 감싸 안는 위로가 있고 치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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