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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담론을 통해 본 고승현의 자연미술 (1)

고충환

생태담론을 통해 본 고승현의 자연미술  (1)


고충환1)

 





서론 


생태담론의 이해 

자연미술의 이해 


자연미술_바깥미술회의 경우 

자연미술_그룹 야투의 경우 


고승현의 자연미술


자연 되기 


자연미술의 확장

_나무상자 시리즈 


소리예술_존 케이지와 환경음파의 경우 

소리예술_백 년의 소리, 고승현의 가야금 


결론 


 



서론 



작가 고승현은 1981년 8월 야외현장미술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국내 최고의 자연미술 그룹 야투(野投, YATOO)의 창립 맴버로 참여했다. 1983년 1월 공주 금강에서 진행한 워크숍에서는 자연미술이라는 용어를 처음 창안 발의했으며, 1995년 한국자연미술가협회 야투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연미술 운동의 중심에 서 있다. 


창립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룹 야투의 실질적 연구 그룹인 야투자연미술사계절연구회(1981-현재)를 중심으로, 이후 금강국제자연미술전(1991-2002),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2004-현재), 야투자연미술국제레지던스 프로그램(2009-현재), 야투자연미술의 집(2011-현재), 온라인을 플랫폼으로 한 자연미술가들의 네트워킹인 야투아이프로젝트(2011-현재), 그리고 국제노마딕아트프로젝트(2014-현재)를 이끌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내외 자연미술가들 간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작가 고승현의 자연미술에 대한 정의와 성과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서론 격으로 생태담론과 자연미술의 비교분석을 통해, 그리고 국내 최고의 자연미술 그룹 바깥미술회(바깥미술회는 야투와 달리 적어도 시행 초기에 보여준 성격으로 추정해볼 때 문명 비판적인 성격이 강한 만큼, 야투와 마찬가지의 자연미술로 정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는 있다)와 야투의 비교분석을 통해 자연미술의 가능성과 지정학적 위치를 가늠해 본다. 


그리고 작가 분석을 통해 고승현 작가의 자연미술이 갖는 특성과 독자성을 밝힌다. 이어서 나무상자 시리즈 작업을 통해서는 자연미술이 어떻게 확장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고승현 작가의 일종의 유사 악기랄 수 있는 <백년의 소리_가야금> 시리즈를 존 케이지(John Cage)를 중심으로 한 환경음파와의 비교분석을 통해 자연미술이 어떻게 소리예술로 확장되고 접목되는지를 살핀다. 이로써 각 자연미술, 자연미술의 확장_나무상자 시리즈, 자연미술의 확장_소리예술로 나타난 작가 고승현의 작업을 분석 정리하고 그 특성을 밝힌다. 




생태 담론의 이해 


생태계의 개념은 환경의 개념과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며, 두 개념은 모두 생명과 관계된다. 그러나 환경에서의 생명이 인간만을 의미하는 반면, 생태계에서의 생명은 모든 종류의 생명체를 말한다. 환경이 인간 중심적이고 문화적인 개념이라면, 생태계는 생물 중심적인 생물학적 개념이다. 또한 환경의 개념이 구심적이거나 원심적인 중심주의적 세계관을 나타낸다면, 생태계의 개념은 관계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 2)

 


환경이 인간 중심적 개념이라면, 생태는 인간보다 큰 범주 개념으로서 자연을 아우른다. 그리고 여기에 생명이 환경과 생태를 매개시켜주고, 인간과 자연을 연이어준다. 그렇다면 인간과 자연의 차이는 어디에서 찾아질 수가 있는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천지불인(天地不仁)에 그 답이 있다. 천지 곧 자연은 어질지 않다. 자연이 어질다는 것은 다만 인간의 논리이며 개념일 뿐, 정작 자연에는 개념이 없다. 개념은 인간의 발명품이며 인문학적 전리품이다. 인간이 자연에 이름(개념)을 지어준 것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인간은 자연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지할지도 모른다. 


자연은 인간보다 먼저 지구의 주인이었고, 모르긴 해도 인류가 멸망한 뒤까지도 살아남을 것이다. 흔히 자연은 살아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이 말이 현실에서는 당연하지 않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사물화된 자연 그러므로 도구화된 자연에 익숙하지, 정작 살아있는 자연에 대해서는 여전히 낯설다. 인간은 어쩌면 생명의 자궁인 자연으로부터 생명을 잠시 임대받아 한시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어찌 알 수 있었으랴. 자연은 카오스인데. 인간의 이성이 발명한 코스모스는 카오스의 한 계기이며 운동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 운동의, 그 생명의 존엄성을 인간의 이성으로 다 헤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생태 담론의 시대적 요청 


사태를 단순화하는 감이 있지만, 국내적으로 볼 때 1980년대를 이념의 시대로, 1990년대를 몸의 시대로, 그리고 2000년대 이후를 에코 그러므로 생태의 시대로 정의하는데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부연하면 1980년대는 순수미술과 참여미술, 제도권 미술과 정치미술의 이념대립이 첨예했던 시대다. 그리고 1990년대는 1980년대 중반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영미권 중심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륙권 중심의 후기구조주의와 접목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 시기로 기억된다. 후기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 이론에 바탕을 둔 몸 담론, 성 담론, 페미니즘 이론, 퀴어 이론과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타자론으로 아우를 수 있는 문화 담론이 전면화한 것인데, 가히 프로이트의 억압된 것들의 귀환을 피부로 느끼고 눈으로 확인하는 시기이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연이은 에코 곧 생태 담론의 등장은 1990년대 이후 제안된 이런 문화 담론들에 내장된 자기반성적 사유에 힘입고 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사정은 세계적인 흐름이나 동향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냉전 시대의 종식 이후 생태 담론이 새로운 시대적 패러다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환경오염으로 인해 전 지구가 공멸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지고 있는 것이 그렇다.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오존층이 파괴돼 해수면의 온도가 상승한다거나, 이로써 수년 내에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모두 녹아 없어져 버릴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고, 화석연료의 고갈과 탄소 배출량의 규제와 함께, 오염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한 대체 연료의 개발을 운운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국내외적으로 에코 곧 생태 담론이야말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가장 절실하고 시의적절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에코는 말할 것도 없이 생태를 말하며, 자연과 환경을 그 하부개념으로서 거느린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생명 사상이 내재 돼 있다. 범주로 치자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아우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에의 인식은 특히 동양의 경우 생소하지 않은데, 주와 객이 경계를 허물어 하나 되는 물아일체사상((나와 세계 사이에는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다른 말로 하자면 지각을 매개로 나는 이미 세계의 한 부분으로 속해져 있어서 나와 세계를 주와 객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의 몸의 현상학 그러므로 지각 현상학과도 통하는))이 문화적 유산으로서 전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에코를 크게는 생태나 환경 중 어느 쪽으로 이해해도 무방하지만, 그 말을 엄밀하게 한정한다면 아무래도 환경보다는 생태 쪽으로 보아야 한다. 환경이 인간중심의 사유 행태로서 인문주의(주와 객을, 자연과 인간을 구분하는 이분법적이고 양비론적인 사유 틀을 전제로 한)에 의해 지지 된다면, 생태는 인간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보는 사유 행태로서 자연의 입장에서 자연(그리고 인간)을 보는 식의, 상대적으로 더 큰 틀을 전제로 한 것이 다르다. 세계가 급속하게 문명화되면서 이런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눈에 띄게 훼손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공공연한 반생태적 현실에서 자연과 인간과의 진정한 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져야 하고, 여기에 우리가 자연미술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에코 페미니즘, 생태 여성주의 


이런 생태 담론의 한 갈래가 여성주의와 만나고, 생태 여성주의와 만난다. 여성주의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크게 본질주의 페미니즘과 다원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에코 페미니즘으로 구분된다. 본질주의는 제도가 여성성과 동일시하는 상징체계, 이를테면 감성, 몸, 자연, 달, 물, 생명, 그리고 모계사회 중심의 공동체 문화와 땅 신(지모)을 인정한다. 그 상징체계를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반영하는 본질로 보고, 그 본질을 강조하고 극대화하는 것으로써 차별화와 변별성을 꾀하는 것이다. 


그 본질이 대개는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란 점에서 자연주의 페미니즘이라고도 한다. 대개는 자연(성)을 모티브로 한 경우가 많고, 때로 자연을 통한 정화의식(애나 맨디에타 Ana Mendieta)과 함께, 그 급진적인 형태가 여성 성기의 도상학(조지아 오키페 Georgia Okeeffe, 주디 시카고 Judy Chicago, 니키 드 생팔 Niki de Saint-phalle, 트레이시 에민 Tracey Emin)으로 나타나고, 에브젝트와 에브젝션 아트(담론으로는 줄리아 크리스테바 Julia Kristeva와 루이스 이리가레이 Luce Irigaray의 여성적 글쓰기, 그리고 창작으로는 키키 스미스 Kiki Smith)로 나타난다. 저급한 비 물질 예술 혹은 신체 분비물 예술을 의미하며, 정신의 성좌에 몸의 논리(아니면 생리?)를 대질시키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제도가 자기에게 부여한 본질을 인정하면서(사실은 인정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이를 통해 제도에 저항하는 한편 보다 적극적으론 제도의 전복을 꾀한다는 점에서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00되기, 척하기 철학과도 통한다. 


여기에 다원주의는 더 급진적이다. 남성 주체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여성 고유의 성적 정체성이 있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제도의 기획 그러므로 관습의 소산이라고 본다(린다 노클린 Linda Nochlin). 그러므로 성적 정체성에 관한 한 결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른바 성적 비결정론을 주장한다(리사 티크너 Lisa Tickner). 그리고 괴물과 사이보그 그리고 로봇과 같은 성 정체성 논의로부터 자유로운 제3의 성이 그 대안으로서 제시된다. 여장남자를 연기하는 모리무라 야스마사(Morimura Yasumasa),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매튜 바니(Matthew Barney)의 <크리매스터 Cremaster>(고환을 움직이는 근육)와 <구속의 드로잉 Drawing Restraint> 시리즈에서 예시된다. 


그리고 생태 여성주의가 있다. 환경 문제, 생명 사상, 그리고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주장하는 한편, 성적 정체성과 관련해 상대적으로 더 유연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면서도 많은 부분에서 다원주의의 급진적인 경우보다는 본질주의의 입장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세계의 원형으로서의 아니마(여성성)를 아니무스(남성성)적인 문명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제시한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 감성적인 세계의 회복과 치유를 위해 아니마가 내재하고 있는 문학적이고 시적인(그러므로 예술적인) 가능성에 주목한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에 반영된 입장이다. 참고로 아니마는 여성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원형적인 숨(그러므로 호흡)을 의미하기도 하며, 그 의미가 생태 여성주의가 추구하는 생명 사상과도 통한다. 

이처럼 타자론의 한 갈래로부터 파생된 생태 여성주의는 그 언저리에 몸 담론, 생태 담론, 그리고 생명 사상과 관련이 깊다. 말하자면 여성성, 몸, 생태, 그리고 생명은 서로 유기적인, 서로 내포하는, 서로 연동되는 관계 속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보기에 따라서 그것들은 어쩌면 숨처럼 인간의 보편적인 자질에 속하고, 자기를 표현하는, 자기를 사는 와중에 이미 발현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처럼 이미 있었던(잠재된) 자질을 새삼 깨닫고, 회복하고, 실천하는 일이 될 것이다. 



자연미술, 자연의 자연에 의한 자연을 위한 실천 논리로서의 미술  


자연미술은 그 속에 자연과 생태 그리고 환경의 개념이 함축돼 있다. 이 개념들은 편의상으로만 구분될 뿐 사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서 그 경계가 불투명한 편이다. 일부 자연미술을 인간의 삶과는 별개의 자연에 한정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연과 인간의 삶은 상호내포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문제는 자연이 아닌 자연관이며, 따라서 자연미술에는 자연 자체(자연의 본성과 같은)에 대한 이해와 함께, 삶의 현장 속에서 삶의 일부로 편입되고 왜곡된 자연(예컨대 아파트 실외기에 둥지를 튼 새와 같은, 아니면 녹슨 못과 같은 공사장에서 물어온 부스러기로 둥지를 짓는 새와 같은), 인간의 의식으로 변형된 자연, 그러므로 개념화된 자연에 대한 이해가 포함되어야 한다. 


창작 현장에서 자연(미술)은 대지미술에서처럼 조형적인 개념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생태미술에서처럼 생리적인 개념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상 조형적인 수단으로서의 자연(관)과 생리적인 개념의 대상으로서의 자연(관)은 서로 겹친다. 부연하면 대지미술은 조형성을 그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왕의 조각과 설치미술의 연장선에 있고, 때로 아이디어(아이디어 스케치 혹은 드로잉)의 형태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개념미술의 한 부류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장소 특정성 개념이 강조되기도 하고, 작업이 일시적으로만 존속됨으로 인해 기록에 각별한 의미가 부여되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인해 때로 기록물이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최근 들어 부쩍 그 의미기능이 강조되고 있는 아카이브에 의해 재조명되기도 한다. 


반면, 자연미술은 자연의 본성에 작업을 일치시키는 경향을 띤다. 이를테면 자연으로부터 소재를 취하고, 자연의 습성을 따라 형태를 만들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연과 함께 부패하고 썩어서 마침내 소멸이 되는 순환의 형태를 띠는 점이 특징이다. 따라서 자연미술에서는 과정(프로세스 아트)과 생물학적인 변태,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작업의 실질적인 변화(유기적인 소재의 부패와 같은), 그리고 이에 따른 작업의 자연스러운 소멸(본래 상태의 자연으로 되돌려지는)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정작 야투 작가들과 특히 작가 고승현은 자연미술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자. 그 전에 먼저 그 말이 생겨난 배경을 살피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1980년대 초 야외현장미술이라는 말로 야투의 회원들에 의해 사용되다가 1983년 1월 제6회 야투의 정기연구발표회에서 고승현, 고현희, 신남철, 이응우, 전원길 등의 회원들에 의하여 처음 자연미술이라는 용어 사용이 제기되었는데, 이는 그룹 내 연구 활동의 성격이 야외 현장성과 그 논리에 국한된 문제라기보다는 끝없이 변화하고 숨 쉬는 순수자연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자연미술이란 용어의 표기는 일부 회원의 반대로 미뤄지고 있다가 1986년에 이르러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자연과 미술, 이 두 단어를 합성하여 사용한 것은 세계 최초의 일로 그 후 야투가 개최한 여러 번의 국제자연미술전과 활발한 해외 교류 활동을 통해 점차 일반화되었다.3) 

 


여기서 작가 고승현은 자연미술이라는 용어가 비록 자신들에 의해 세계 최초로 제기되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1971년에 이미 독일의 평론가 발터 아오에(Walter Aue)가 PCA(매체의 자유, 그 위상적 서문)의 프로그램 안내문에서 처음으로 자연미술이라는 말을 공식 표현한 적이 있다. 실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현대의 세계관은 자연으로부터 자연을 추방한다. 예술(자연미술 NaturKunst 또한)은 부자연스러운 것이자 인공의 것이다. 자연이란 단어는 무례와 쓰레기라는 말을 포함한다, 고 했다. 4)

 

자연과 자연미술의 의미가 야투의 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자연스러운 것, 인공적인 것, 그리고 여기에 무례와 쓰레기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 야투보다는 상대적으로 문명 비판의 성격이 강한 바깥미술회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서양은 도구적인 자연 개념을 발전시켜왔고, 그런 관점에서 도구적인 자연은 창의적인 예술의 대상이 될 수가 없었다(그 기원은 예술미에 대해 자연미를 평가절하한 헤겔로 소급된다). 


야투 회원들에 의해 처음 이 용어가 제기되었다가 일부 회원 작가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저간의 사정도 이 때문일 것이다. 최초 야투 창립 맴버로 참여한 직후 독일 유학 중이던, 당시 그룹 야투의 초기 활동을 현지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기에 열심이었던 임동식이 야투의 범위가 좁아질 것을 우려해 자연미술 개명에 반대의견을 표명한 것이 그렇다. 5)


 그렇다면 이처럼 도구적인 자연 개념과는 다른, 그러므로 어쩌면 자신들의 말대로 세계 최초로 제안된 자연미술의 의미는 무엇인가. 


야투를 자연미술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나는 자연을 부정해본 적이 없다. 흐르는 물과 부는 바람을 그대로 받아들여 왔다. 부정하려는 생각이 나에게는 안 든다. 자연과 우리는 깊숙이 만나야 한다. 그것의 판단은 쉽게 온다. 6) 

 


흐르는 물과 부는 바람 그러므로 자연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자연과 깊숙이 만나는 것이 자연미술이다. 혹은 자연미술을 대하는 태도다. 그 자체 자연미술에 대한 정의가 될 수도 있겠다. 지나치게 함축적일 수도, 이것만 가지고는 역부족일 수도 있겠지만(그리고 여기에 그것의 판단은 쉽게 온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부적인 작업 분석을 통해서 그 내용이 채워지지 않을까도 싶다. 이처럼 국내에서는 국내 최고의 야외설치미술운동그룹인 야투가, 그리고 유독 한겨울에 야외전시를 고집해온, 겨울대성리전을 계승한 바깥미술회가 그동안 일관성을 가지고 자연미술을 실천해온 경우로서 주목된다. 


자연미술, 바깥미술회의 경우 


1981년 1월 <겨울 대성리 31인전>으로 최초 전시를 개최한 이후, 1983년부터 향후 3년간 일시적으로 전시를 중단한 기간을 제외하면,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시가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대성리 화랑포에서 자라섬으로 장소가 변경되는 와중에도 북한강변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북한강이라는 장소성, 겨울이라는 시간성, 그리고 여기에 보다 결정적으로는 바깥과 바깥미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바깥미술회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키워드가 되고 있다. 


여기서 바깥미술이란 제도권 미술에 대한 대안적 실천 논리를 의미할 것이다. 제도권 미술이 형식논리로 견인되는 미술이라고 한다면(주지하다시피 미술은 형식실험의 역사다), 형식의 바깥 그러므로 비 혹은 탈 형식적인 미술의 지향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지향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질 수 있는가.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무정형과 잉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정형에 대해서는 원래 원시미술에 나타난 알 수 없는 존재 그러므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주술적인 의미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보다는, 혹은 이와 함께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 논리(질 들뢰즈의 자기동일성의 논리를 파괴하는, 욕망의 비적법한 사용?)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자본주의는 상품화의 논리로 견인된다. 모든 것은 상품화되어야 하고, 상품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상품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 그러므로 죽음과 예술이 잉여로 지목되면서 제도권 밖으로 추방된다. 금지(금기시)되는 것이다. 상품적 가치를 위해서는 정형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비 혹은 반 형식적인 것, 비 혹은 반 정형적인 것, 다시 그러므로 무정형적인 것은 자본이 보기에 상품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고, 예술과 같은 운명에 속하는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예술을 위한 실천 논리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의미의 바깥, 역시 같은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제도가 보기에 모든 것은 의미화되어야 하고, 의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의미화되지 않는 것, 의미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 의미의 바깥에 의미를 세우는 것이 예술을 위한 실천 논리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깥미술회가 지향하는 바깥의 의미는 무정형으로 존재하는 존재의 두려움을 회복하는 것, 자본이 지향하는 상품적 가치(그러므로 자본의 욕망, 혹은 들뢰즈의 용법으로는 욕망의 적법한 사용) 바깥에 예술(그러므로 욕망의 비적법한 사용)을 세우는 것, 제도가 지향하는 의미의(그러므로 제도의 관성) 바깥에 예술을 재정립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라는 시간성에 대해서는 불모에 대한 인정, 현상학적 에포케 그러므로 자기를 영도의 지점에 세우는 것, 결여와 결핍에 대한 흠모(김정희의 세한도에서와 같은), 순수에 대한 사랑과 순결이라는 자의식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강변은 순결이 자기를 실현하는 장 그러므로 순결의 물화된 형식, 다시 그러므로 장소특정성을 의미할 것이다. 자생적 생태공동체를 지향하는, 매년 겨울이면 어김없이 북한강변에서 열리는, 환경이란 말이 하나의 개념으로 정착되기 이전에 이미 자연과 신체 그리고 정신이 어우러진 현장성을 표방하고 나선 바깥미술회의 그동안의 행적에는 그러므로 국내 생태미술의 초석을 놓는 선구자적인 일면이 있다. 


작업을 실견해 보면 대략 현장에서 채집된 나무, 풀, 잡초, 넝쿨, 나뭇잎 등 자연을 이용해 작품을 제작하는 등 자연을 주제로 한 설치작업의 경향이 있고(전시가 끝난 연후에는 재차 자연으로 되돌려지는 점이 야투의 자연미술과 같다), 강변에 떠밀려와 쌓인 각종 생활 쓰레기를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등 자연과 인공의 관계를 주제화하기도 하고, 생태계의 교란으로 변형된 생물체(설치작업으로 만든)를 자연에 대비시키기도 하고, 그리고 여기에 환경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와 관객 참여형 프로젝트가 부수된다. 대지예술, 입체, 행위 등 다양한 형식을 가진 작품들로 야외전시를 추구하면서, 전시장에서의 실험성을 외부로 옮겨 좀 더 자유로운 실험을 꾀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자연에서 채집된 재료를 이용한 그리고 자연 자체의 조건을 이용한, 현장성이 강한 작업 경향이 어디서 어디까지가 자연이고 또한 작품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그 자체 전략적으로 혹은 감각적으로 경계 허물기를 의도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업 경향 면에서 생리 면에서 그룹 야투와 공통분모가 많지만, 문명 비판적인 그리고 제도 대항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 자연미술을 지향하는 야투와 구별되는 지점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겨울이라는 시간성과 강변이라는 장소성을 바탕으로 기성 화단의 바깥에서 자신들만의 창작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자연미술, 그룹 야투의 경우 


그룹 야투는 1981년 8월 14일 공주 금강 백사장에서 창립했다. 창립 당시 맴버를 보면 곽문상, 강희순, 고승현, 김영철, 김지숙, 나경자, 박수용, 신현태, 이동구, 이순구, 이응우, 임동식, 조충연, 정봉숙, 정영진, 지석철, 함상호, 허강, 허진권, 홍오봉 같은 작가들이 참여했다. 창립 당시 선언문을 보면, 


우리는 풀포기의 떨림에서부터 여치의 울음, 개구리의 합창, 새, 물고기, 나뭇결에 스치는 바람 소리, 밤하늘의 별빛, 봄의 꽃, 여름의 열기, 가을의 드맑고 높은 하늘, 겨울의 차디찬 기온은 물론 인간이 갖는 모든 동작과 응시, 심리적 문제, 다각적인 면에서 생생하게 부딪치는 모든 현실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작업의 대상임을 밝히며, 라고 돼 있다. 7)

 


한국자연미술가협회가 주축이 된 그룹 야투는 바깥미술회와 함께 국내 최고의 야외설치미술운동 그룹으로, 한국 자연미술의 산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야투는 들에 던진다는 말이다. 자연에 몸을 던져 자연에 자기를 투사하고, 자연으로부터 살아있는 생명의 메시지를 전달받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연과 교감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화이트큐브로 대변되는 미술관 전시와 제도권 미술과는 다른, 자기만의 변별성을 자연에서 찾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협회 창립 초기부터 해외전시에 눈을 돌렸고, 진즉에 자연미술에 공감하는 해외 유수 기관과 작가들 간 교류의 폭을 넓힌 탓에 현재에는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와 작가 풀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네트워크 형성이 있었기에 금강국제자연미술전도,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 유일의 자연미술비엔날레인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도 성사시킬 수가 있었다. 현재는 창립 초기 멤버를 중심으로 그때그때 주제에 맞춰 외부작가들과도 특히 바깥미술회 작가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보여주고 있고, 매번 전시 때마다 해외작가의 참여 빈도수도 높은 편이다. 


전시든 행사든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사실상 거의 일 년 내내 전시며 행사가 열리고 있는 점도 주목해볼 부분이다. 상시체제가 가동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특히 창립 당시인 1981년부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야투사계절연구회>가 상시 운영되고 있는데, 이론연구와 담론생산 그리고 작가 수급과 같은, 모든 면에서 협회를 떠받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협회의 심장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 이어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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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구자 2


2) 박이문. 문명의 미래와 생태학적 세계관. 당대. 1997. p.9. 


3) 고승현. 20세기 말 한국의 자연미술 운동과 세계의 자연미술: 그 전개 양상을 중심으로. 석사논문. 한남대학교. 2000. p.13. 


4) 이성원. 야투-자연미술 연구: 1981년부터 1998년까지의 사계절연구회를 중심으로. 석사논문. 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 2000. p.12. 


5)  임동식. 서신. 1983.2.14. 


6) 고승현. 야투 회의록. 1983.1.29. 


7) 임동식. 야투창립선언문. 1981: 이응우.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지형을 향해 가는 야투의 자연미술운동 30년. 2011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자연미술국제학술세미나.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운영위원회 2011. p.4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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