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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마저도

고충환



사하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마저도 


고충환 | 미술평론가


에스컬레이터로 이동 중인 사람들도 같고,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내려오는 사람들도 같은(컨베이어 벨트를 통과한 판박이 학생들을 생산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학교를 풍자한, 핑크 플로이드의 영화 더 월의 장면을 연상시키는). 런웨이에서 워킹 중인 모델들도 같고, 긴 줄을 선 채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같은(신상을 선점하기 위해 새벽같이 긴 줄을 선 사람들? 물신 숭배자들? 그러므로 어쩌면 공허한 사람들?). 특수안경을 쓴 채 달이 태양을 가리는 개기일식을 보기 위해 로봇처럼 하나같은 자세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도 같은(개기일식에 해당하는 토탈이클립스는 시인 랭보에게 세기의 종말을, 파국을 의미하며, 장면 자체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의미하는 상황주의자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소사이어티를 극화해 놓은 것도 같은). 

창밖을 보는 남자와 물 위에 서 있는 여자도 같고(여자가 물 위에 서 있는지 분명하지는 않은), 바닷속으로 뛰어들거나 몸을 날리는 사람도 같은. 휴양지를 찾은 뒷모습이 공허한 사람도 같고(미셸 투르니에는 사진 에세이집 뒷모습에서 사람의 뒷모습은 더 많은 진실을 숨겨놓고 있다고 했다), 뭔가에 쫓기듯 문밖으로 달아나는 황망한 사람도 같은(알 수 없는 제도의 전횡이 불안한 카프카?). 팔을 꺾어 넘어트리는 것도 같고, 하나로 뒤엉켜 싸우는 사람들도 같은(로버트 롱고의 경쟁사회의 우화?). 추락하는 사람들도 같고(눈을 감으면 온 세상이 와르르 무너진다), 짐승의 그것과도 같은 한갓 고깃덩어리로 환원되고 해체된 사람들 위로 흘러내리는 살점도 같은(프랜시스 베이컨?). 공을 갖고 노는 사람도 같고, 허공에 매달린 보이지도 않는 줄을 타는 사람도 같은. 재주를 넘는 사람도 같고, 사자의 벌린 입속에 머리를 집어넣는 사람도 같은(아마도 서커스 단원?). 그리고 여기에 입장하고 퇴장하는 천사들(???). 


그림 속 사람들은 누구인가. 현실을 사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작가가 상상으로 지어낸 사람들인가. 작가는 이들을 왜 그렸을까. 이들을 빌려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작가의 그림에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등장한다. 사람들이 어울려 사건이 벌어지고 상황이 전개된다. 분명하지는 않다. 암시적이다. 불안한 것도 같고, 때로 전조(어떤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의 기미가 감지되기도 한다. 여백에도 불구하고 화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관계를 그린 것인가. 이런저런 관계에 대한 평소 작가의 감정과 논평을 그린 것인가. 

그런데, 분명하지 않고 암시적인(그러므로 어쩌면 약간은 불친절한. 보는 이로 하여금 의미의 공백을 채워 저마다 완성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같은. 그러므로 관객 참여적인) 그림에도 불구하고 그림 속 사람들이, 사건이, 상황이, 장면이 낯설지 않다. 언제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 친근함을 준다. 데자뷴가.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는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나 영화 속 인상적인 장면, 잡지 광고에 등장하는 모델과 명화 속 장면으로부터 모티브를 취해온다고 했다. 원형 그대로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각색하고 편집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여기에 평소 작가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감정이 매개되면서 최초 인용된 원형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기화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선후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일상이 어떤 장면을 불러왔을 수도 있고, 어떤 장면이 현실을 일깨우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일상적이면서 일상을 넘어서는 의미론적인 영역과 범주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상과 이상, 현실과 허구가 하나의 결로 합치된 팩션 같다고나 해야 할까. 일상을 이야기하면서 존재론적 사실을 상기시키고, 허구적인 상황 논리를 빌려 혹 현실이 간과하고 있을지도 모를 잠재적인 현실 그러므로 궁극적인 현실을 일깨운다고 해야 할까. 잠재적인 현실? 궁극적인 현실? 일상은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고, 현실은 실재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진정한 현실 참 현실을 대면하기 위해선 현실의 민낯을 벗겨야 한다. 그렇게 발가벗은 내가 발가벗은 세계와 직면해야 한다. 현상학적 에포케 그러므로 현실에 대한 잠정적인 판단중지를 실행하는 것(의식을 영도 지점에 내려놓는 것, 그러므로 마치 세상을 처음 보듯 보는 것), 이면 읽기와 행간 읽기를 수행하는 것이 예술에 주어진 지상과제일 수 있다. 그 실천 논리며 방법론으로 작가는 이처럼 일상과 상상, 현실과 허구적 현실이 중첩된 현실을 제안해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그림은 언제 어디선가 본 것도 같다고 했다. 데자뷰를 불러일으킨다고도 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루시앙 프로이트를 떠올리게 하고, 에드바르트 뭉크와 키르히너 같은 표현주의 화가를 상기시킨다. 샤갈 같은 초현실주의 혹은 환상주의 화가를 떠올리게 하고, 마리 카사트와 보나르 같은 인상주의 화가를 상기시키는 부분이 있다. 드가의 무희를, 윌렘 드쿠닝의 신체를, 프랜시스 베이컨의 고깃덩어리를, 에공 슐레와 같은 비엔나 분리파를, 에드워드 호퍼를, 아쉴 고르키를, 밈모 팔라디노와 같은 이탈리아 트랜스아방가르드를,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를, 타르코프스키의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사람을 상기시키는 부분이 있다. 

부분적으로 그렇고, 암시적으로 그렇고, 분명하지 않게 그렇다. 그런 만큼 다른 사람이 보기에 다른 것이 보이고, 다르게 보아도 무방하다. 중요한 것은 미술사가 인용되면서 미술사적 현실과는 다른 제3의 현실이 제안되고 있다는 점이고, 그렇게 그 형식이며 의미가 우연하고 무분별하게 네트워크 되면서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하이퍼텍스트 아니면 하이퍼링크 같다고나 해야 할까. 들뢰즈를 인용하자면, 차이를 건너뛰면서 접속(그러므로 이접)되는 정신분열증적 분석이 수행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다시, 중요한 것은 작가가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 영화 속 인상적인 장면이, 잡지 광고에 등장하는 모델이, 명화 속 장면이, 그리고 여기에 작가의 사사로운 일상에 연유한 생활감정이 경계를 넘어 접속되는, 그렇게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는, 그렇게 의외의 현실을 열어놓는, 그렇게 일상을 코멘트하면서 잠재적인(그러므로 억압적인) 현실을 논평하는 작가의 창작 방법론에 주목할 일이다. 

이런 창작 방법론과 함께 작가의 그림에는 또 다른 의미심장한 사실이 예시되고 있다. 주체다. 주체가 뭔가. 주체는 언제 어떻게 성립하는가. 후기구조주의를 따르자면, 주체는 타자다(그전에 이미, 랭보는 나는 타자라고 했다). 타자가 곧 주체다. 나는 네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나는 너의 욕망에 나를 맞춘다. 그러므로 나는 너의 욕망의 화신이다. 주체가 그렇다면, 타자는 어떤가. 내가 본 것, 들은 것, 만진 것, 그러므로 바깥으로부터 와서 나를 형성시켜주는 것이 타자다. 

그렇다면 미디어의 시대를 사는 저마다의 나는 뭘 보고, 뭘 듣는가. 무엇에 감동하는가. 책을 보고, 영화를 보고, 잡지를 보고, 디즈니랜드를 보고, 넷플릭스를 보고, 유튜브를 보고, SNS를 보고, 인스타그램에 감동한다. 감각적 현실에서는 세계와 고립되고 단절된 상태에서, 다른 한편으로 손안의 미디어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실질적인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오히려 미디어를 매개로 세상과 더 잘 소통한다(?). 그리고 그렇게 소통한 것들이 나를 만든다. 나의 감정을 제조하고, 나의 인식을 형성시킨다. 그러므로 그것들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현실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어쩌면 은연중 미디어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감정법을, 인식 코드를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그리고 그림과 마찬가지의 신체를 모티브로 한 흙 조형 작업(세라믹)을 <신체극_상상 서커스>라고 부른다. 주제다. 대사 없이 표정과 몸짓만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연극이란 점에서 침묵으로 말하는, 침묵을 빌려 말하는 마임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마르셀 마르소는 침묵은 말이 끝나는 자리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고도 했다. 말이 무색해지는 지점,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점, 말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하는 말이다. 작가는 신체의 움직임에 관심이 많고, 그 움직임 그러므로 마임이, 침묵이 하는 말을 듣는다. 어쩌면 말이 없는 그림 자체가 이미 마임이고 침묵이 하는 말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는 허공에 매달린 보이지도 않는 줄 위에서 외줄을 타는 서커스 단원의 몸짓에서 잠재적인 추락을 보고, 공중제비를 노는 광대의 몸짓에서 도래하지 않은 불안을 본다. 혹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고 전조다. 어쩌면 추락, 불안, 전조, 예감은 작가의 세계 감정일 수 있고, 다만 그 강도와 종류에 차이가 있을 뿐 현대인의 세계 감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작가가 보기에 서커스는 이런 세계 감정이 공연되는 장이고, 현실의 축소판이다. 삶의 표상이며 알레고리라고 해야 할까. 

공허한 중산층을 그린 그림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호퍼는 무대 뒤에서 쉬는 광대의 휴식을 그린 적이 있다. 뒤에서 보면 모든 존재가 쓸쓸하다. 웃음은 슬픔을 머금고 있고, 발랄한 몸짓에는 우울한 감정이 묻어난다. 페르소나(그러므로 가면)는 아이덴티티(그러므로 억압된 자기)를 숨겨놓고 있고, 불안한 그림자가 평화로운 일상을 잠식한다.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움직이는 사람들 그러므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몸짓을 매개로 사실은 이런, 이중적인 세계 감정 그러므로 겹 감정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문이 있다. 문을 닫아걸어 잠그는 순간, 혹은 문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 당신은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을 수도, 세상과 고립될 수도 있다. 자유의지(자유 정신이라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저마다의 문(마음의 문)의 안부를 묻고, 불안(자유 해서 불안한)의 안녕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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