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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옥/ 존재의 지문, 존재의 증명을 그린

고충환



양성옥/ 존재의 지문, 존재의 증명을 그린 


고충환 | 미술평론가


스님이 마당을 쓴다. 자기 키보다 큰 대빗자루로 마당을 쓴다. 빗자루가 스칠 때마다 살 색 같은 흙먼지가 가만히 일 뿐, 깨끗한 마당을 무심하게 하염없이 쓸고 있다. 언제나처럼 내일도 쓸 것이다. 깨끗한 마당을 왜 쓰는가. 스님은 마당을 쓸면서 사실은 자신을 쓸고 있었다. 번민을 쓸고 욕망을 쓸고 있었다. 그렇게 쓸다 보면 마침내 무념무상의 상태로 자신이 텅 비어 고요해질 터였다. 그러므로 마당을 쓰는 것은 구실이었고, 수행을 위한 구실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 양성옥은 대빗자루로 화선지를 쓴다. 그에게 화선지는 곧 마당이었다. 먹을 묻힌 대빗자루로 화선지를 쓸면서 사실은 자신을 쓸고 있었다. 자신의 번민, 자신의 회상, 자신의 후회, 자신의 추억, 자신의 욕망, 자신의 상념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무념무상의 상태로 자신을 비울 수는 있었지만, 존재가 지나간 자리, 존재가 지나가면서 남긴 자국, 지문과도 같고 증명과도 같은 존재의 흔적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그에게 쓸기는 말하자면 존재를 지우면서, 동시에 존재의 흔적을, 존재의 지문을, 존재의 증명을 오롯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에게 쓸기는 이중적이다. 존재를 지우면서 증명하는 것이란 점에서 그렇고, 존재를 지우면서 다시 불러오는 것이란 점에서 그렇다. 그렇게 그에게 쓸기는 지우면서(쓸면서) 그리기(다시 불러오기)를 의미했고, 그림 그리기는 존재의 증명을 의미했다. 


그리고 작가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쓸기와 함께 두드리기와 점 찍기를 소환한다. 쓸기가 존재를 지우면서 불러오는 것이라면, 그 자체 문지르기와도 겹치는 두드리기는 반무의식적 상태에서의 자기 강박을 통해 존재를, 존재의 흔적을 오롯하게 하는 것이다. 반복 수행을 통해 자기를 강조하고 존재를 강화한 것인데, 불교에서의 반복 수행을 닮았고, 질 들뢰즈의 차이를 생성하는 반복을 닮았다. 그리고 점 찍기에서 이런 수행적 그리기는 본격화한다. 점 하나하나를 찍을 때는 의식을 집중해야(몰아) 하지만, 정작 점을 찍어나가는 과정에서 닫혔던 무의식이 열리면서 점차 자기를 잊는다(무아). 의식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무의식이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자기를 의식하면서 시작하고, 자기를 잊으면서 끝난다. 그렇게 온통 비정형의 얼룩과 점들로 중첩된, 그 자체 우주의 표상이라고 해도 좋을 무아지경의 화면을 열어놓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일련의 그림 그리기에 나타난 쓸기, 문지르기, 두드리기, 점 찍기와 같은, 한눈에도 몸적인 행위이다. 그 자체 지각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몸의 현상학과도, 그 지각이 다름 아닌 몸 그러므로 자기를 관통하는 것이란 점에서 수행적인 행위와도, 그리고 때로 무의식을 각성하는 것이란 점에서는 자동기술법으로 나타난 초현실주의의 경향과도 통한다. 서사적인 그리기와 이념적인 그리기 그리고 개념미술에서처럼 회화의 당위성이 회화의 바깥에서 온 경우가 아니라면(작가의 경우가 그렇다), 회화의 결정적인 도구는 몸이고 감각일 수밖에 없다. 몸의 생리에 귀 기울이는 것, 회화적 감각을 벼리는 것이 회화적 그리기의 관건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관건을 작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수행 실천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 우주가 열렸다. 우주적 비전이 열리고 우주적 차원이 열렸다. 자기로부터 비롯한 그림 그러므로 자기반성적인 계기에서 시작된 그림이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웬 거대 담론이냐고 하겠지만, 주와 객이, 나와 네가, 자기와 세계가, 자신과 우주가 서로 통하는 상호 내포적이고 관계적인 우주관의 비전으로 치자면 동양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친숙한 부분이 있고, 몸의 현상학 그러므로 지각의 현상학으로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말하자면, 나와 세계 사이에는 우주적 살(의식의 지향호)로 채워져 있어서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유기적 전체로 보아야 한다. 내가 이미 우주고, 세계가 우주고, 존재가 우주다. 여기서 작가는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풀에서 자기를 보고 우주를 본다. 특히 질경이의 끈질긴 생명력에서 자신을 보고 우주를 본다. 죽은 듯 살아있는(그리고 살아나는) 존재의 생명력에서 자신과의 동일시를 본다. 

그리고 그 동일시(그러므로 존재의 생명력에 대한 동일시)가 원형의 만다라로 나타난 도상학적 비전으로 승화한다. 주지하다시피 만다라는 우주의 운행과 섭리를 도해한 그림이다. 우주에 대한 인간의 관념을 투사해 그린 그림인 만큼 정해진 형식이 따로 없지만, 대개 원형의 도상학적 형태로 알려져 있다. 작가가 보기에 꽃도 원형이고, 컵도 원형이고, 화장품 뚜껑도 원형이고, 세상의 사물이 온통 원형이다. 원형의 만다라는 이렇듯 세상과의 닮은꼴에서도 유래하지만, 작가가 세계를 보는 관념에서도 비롯한다. 즉 원형의 만다라는 생과 사가 순환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아와 타의 구별이 없는, 나는 것이 있으면 드는 것이 있고 드는 것이 있으면 나는 것이 있는, 그렇게 드나름이 하나인 상태가 밑도 끝도 없이 무한 반복되는 존재의 꼴을, 생리를, 운동성을, 섭리를 표상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는 존재들 저마다의 만다라가 꽃이 되었고 별이 되었다, 내가 되었고 네가 되었다. 하늘이 되었고 땅이 되었다. 우주가 되었고 세계가 되었다. 작가의 그림에서 저만의 만다라를, 그러므로 자기 존재와의 닮은꼴을, 자기 내면의 성좌를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텅 빈 사람들이 있다. 최소한의 간략한 붓질로만 그려 마치 반듯하게 서 있거나 엎어져 있는 빈 병처럼도 보이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텅 빈 사람들은 양가적이다. 수행하는 사람들, 수행을 통해 마침내 자기를 비우기에 이른 사람들, 그러므로 자기로부터 자유를 쟁취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림은 보기에 따라서 자기를 비우기에 실패한 사람들, 자기를 다 소진해 빈 병처럼 텅 비어버린 사람들, 공허한 사람들처럼도 보인다. 작가는 왜 텅 빈 사람들을 그리면서 실제로도 텅 빈 사람들이라고 불렀을까. 이로써 작가는 혹 한편으로 텅 빈 사람을 갈망하면서, 동시에 빈 병처럼 공허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그리고 명명한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자기의, 존재의 이중성이며 양가성을, 부조리한 존재를 그리고 명명해놓은 것은 아닐까. 

불교에서는 진정한 자기, 처음 자기, 원형적인 자기를 진아라고 부른다. 쓸기, 문지르기, 두드리기, 그리고 점 찍기와 같은 몸을 매개로 한 수행적 그리기를 통해서, 존재를 표상하는 원형의 만다라를 통해서, 그리고 부조리한 존재를 표상하는 텅 빈 사람들을 통해서 작가는 어쩌면 회화의 도구이면서 주체인 몸을 그러므로 감각을 일깨우고, 때로 무의식을 각성하고, 궁극적으론 잊힌 자기 그러므로 진아를 되불러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감각적인, 몸적인, 어쩌면 관념 속에 숨어있을지도 모를 저마다의 진아라고 하는, 답 없는 물음을 묻게 만든다(예술은 질문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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