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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헌/상실된 유년,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고충환




여동헌 / 상실된 유년, 잃어버린 낙원을 찾아서 


고충환 | 미술평론가


시집가는 날. 시집가는 날 신부의 들뜬 마음을 반영이라도 하듯 세상이 온통 벚꽃 천지다. 정작 작가는 벚꽃이 아니라고 했다. 다만 평소 좋아하는 핑크일 뿐이고, 그저 색일 뿐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림의 꼴이나 정황상 벚꽃 천지로 봐도 무방할 듯싶다. 보기에 따라선 몽글몽글한 꽃 무더기가 솜사탕을 떠올리게도 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부감법을 적용해 그린 그림에서 지천인 벚꽃 사이사이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끊어질 듯 연이어진 굽이진 길이 보인다. 그 길 위로 집들이 보이고 마을이 보이는데, 이국적인 도시를 옮겨놓은 미니어처 마을처럼도 보이고, 헨젤과 그레텔의 동화에나 나올 법한 과자로 만든 집을 떠올리게도 된다.
 
멀리서 조망하기도 하고 들여다보듯 가까이서 본 길 위에 시집가는 날의 들뜬 행렬이 보인다. 예복을 곱게 차려입은 신부가 보이고, 잡귀를 물리기라도 하듯 12지신이 신부가 탄 가마를 메고 수호한다. 청사초롱을 손에 든 남녀아동이 앞서고, 풍물패가 뒤따르며 흥을 돋운다. 그리고 그 뒤로 사람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런 경사에 객이 빠질 수는 없는 일. 

객들은 때로 길 위에서, 때로 지천인 벚꽃에 파묻힌 채 그 사이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신부를 축하하는데, 굽이진 길을 따라 아이들이, 개와 고양이가, 양과 돼지가, 산양이, 펭귄과 자동차가 내달린다. 그리고 크낙새가, 사자가, 호랑이가, 기린이, 염소가, 밍크고래가, 돌고래가, 유니콘이, 용이, 봉황이 벚꽃 사이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신부 쪽을 쳐다본다. 객들은 하늘에도 있는데, 로봇 찌빠가, 캐릭터들이, 비행선이, 범선이, 잠수정이, 경주용 자동차가, 미니카를 연상시키는 고전적인 형태의 이국적인 자동차가, 동물들과 상상 속 동물들이, 그리고 여기에 알만한 혹은 아리송한 사물들이 하늘 위에 유영한다. 

벚꽃이 만발한 꽃 천지(꽃 대궐?)를 배경으로 전통 혼례식의 축하행렬을 그린 그림이다. 꽃길만 걸어라, 는 의미일까. 이 들뜬 행렬에는 아마도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시각에서나 볼 법한 상식을 넘어서는 파격이 있다. 작가가 그린 다른 그림들에서도 그렇지만, 동물들과 함께 상상으로 지어낸 동물들이 등장하는 것이 그렇다. 고대 중국의 산해경이나 보르헤스가 구상했던 괴물 사전에나 나올 법한 동물들이 그렇다. 이런 상상 동물들은 사실은 인간이 욕망을 투사해 만든 비존재들인데, 이를테면 순식간에 천 리를 간다는 천리마(천마와 유니콘)가 그렇다. 동물에 인간의 욕망을 투사한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12지신이 의미하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혼례식에는 어린아이와 함께 어린아이 같은 어른들이 초대를 받았다. 그리고 동물과 상상 동물들이 초대를 받았다. 여기에 로봇과 캐릭터와 함께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사물들도 초대를 받았다. 하객들이 타고 온 이동 수단일 수도 있겠지만, 유독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사물 이상의 표정을 가지고 있고, 저마다 격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소통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일종의 사물 인격체들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들, 이를테면 사람들, 동물과 상상 동물들, 그리고 사물들, 심지어 나무와 숲, 하늘과 바다와 같은 배경마저도 저마다 격을 가지고 있고, 살아 있는 것 같고, 생동하는 것 같다. 어린아이의 시각으로 보자면, 인형(그러므로 사물)을 친구로 여기는 순진무구한 시선(그러므로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고, 어른의 입장으로 치자면, 존재와 비존재 간 구별이 없고 차별이 없는 사해동포주의를 반영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 자체 세계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 그러므로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로맨틱 로드. 독일의 미술사가 빌헬름 보링거는 중세 북유럽 미술 양식의 특징으로 공간 공포를 들었다. 빠끔한데 하나 없이 온통 세부로 빼곡한 고딕 성당이 그렇고, 회화로 치자면 피터 브뤼겔과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환상적이고 왠지 모르게 들떠 있는(그러므로 동적인) 느낌의 그림이 그렇다. 동양의 여백과 비교되는 이런 양식적 특징은 시공을 초월해 작가 여동헌의 그림에서도 확인된다. 노동집약적인 그리기 혹은 집요한 그리기로 형용할 수도 있을 이런 양식적 특징으로 작가는 빼곡한 숲 사이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굽이진 길을 즐겨 그리는 편이다. 

그렇게 로맨틱 로드를 그렸다. 이번에는 화면이 온통 녹색 천지다. 숲 사이로 난 굽이진 길을 그린 그림으로, 독일의 17번 국도에 있는 길이라고 했다. 작가는 원래 비틀즈의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생각하면서 그렸다고 했는데, 비틀즈의 이 노래는 작가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했다. 비틀즈의 마지막 빌보드 싱글차트 1위 곡으로, 공교롭게도 작가가 태어난 해와 달에 맞춘 듯 처음 발표된 곡이라고 했다. 작가는 즐겨 노랫말을 그림 제목으로 인용하는 편인데, 평소 만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팝송과 같은 대중적인 미디어에 대한 열린 태도와 매체 친화력이 반영된 것이라고 해도 좋고, 그 자체 작가의 그림이 어디서 어떻게 유래했는지 암시하는 대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제목이 바뀌었는가. 제목을 그대로 옮기면 길고 구불구불한 길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지만, 사실은 삶의 여정에 대한 메타포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적어도 외관상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세계를 그리는 작가가 그대로 가져와 쓰기에는 좀 무겁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자체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세계와는 정반대의 역설적인 현실을 증명하고 있는 일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세계를 통해, 그리고 꿈꾼 대로 이루어진다는 낭만적인 길을 걸으면서 상식과 합리, 논리와 개념으로 숨 막히는 현실에서의 탈주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상실한 유년을 되불러오고 싶고, 여기에 어쩌면 현대인이 잃어버린 꿈과 상상력으로 보상받는 세계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웰컴 투 파라다이스_라벤더. 그리고 작가는 라벤더 농원으로 초대한다. 온통 라벤더 천지고, 비록 그림이지만 라벤더 향이 그림 밖으로까지 전해지는 느낌이다. 평소 작가는 핑크와 민트, 핑크와 스카이라이트 색의 조합을 즐겨 쓰는 편인데, 주종인 라벤더색과 함께 작가가 좋아하는 색의 조합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그림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나, 그림에 그려지는 정황이 다른 그림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이를테면 스키를 타는 사람이나, 집 앞 벤치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꽃밭 천지에, 늑대가, 빙하와 펭귄이 등장하는, 그리고 여기에 인공폭포와 같이 한자리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사람과 동물, 사람과 식물, 사람과 사물, 존재와 비존재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 그렇다. 다시 말하자면, 존재와 비존재 간 차이와 구별이 없는 사해동포주의의 세계관이 그 실현을 얻고 있다고 해야 할까. 

사해동포주의는 평소 작가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지만, 어쩌면 그 이면에 어린아이의 그것과도 같은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한 작가의 심성이 결정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앞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작가의 그림에는 어른의 생각을 넘어서는 파격이 있다.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그린다는 말이다. 원근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소재가 등 가치를 이루는, 그래서 평면적으로도 보이는, 생각 그대로를 그린 것 같은 그림이 그렇다. 여기에 사물의 꼴과 크기에 대한 선입견을 재고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는데, 이를테면 집채만 한 컵이 그렇고, 집보다 큰 자동차가 그렇다.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시각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을 집중적으로, 그리고 크게 그려 강조한 것이다. 

여기에 돼지도 날고, 양도 날고, 잠수정도 날고, 비행선도 나는, 존재와 비존재 할 것 없이 모두 하늘을 나는 것도 어린아이의 상상력이 아니라면 생각하기 어렵다. 초현실주의에서 일부 시도된 적은 있지만, 하늘과 바다가 경계가 없는 것이나, 낮과 밤이 구분이 없는 것, 말하자면 하나의 화면 속에 파란 하늘이 보이는 낮 풍경과 별이 총총한 밤 풍경이 공존하는 것이 모두 상식을 넘어서는 파격이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작가의 그림은 마치 꿈은 이루어지고, 꿈꾸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도 같다. 상상력이 매개 되면서 꿈같은 현실을 열어놓고 있다고 해야 할까. 보들레르는 상상력이 예술에서 결정적이라고 했다.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상상력을 언급한 부분도 있는데, 자크 라캉이 상상계와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를 구분하면서이다. 유아는 상상계를 살고, 어른은 상징계를 산다.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상상하는 것이 그대로 현실이 되는 세계가 상상계다. 반면, 상징계는 기호와 언어의 제약을 받는 세계다. 유아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때 상상으로 축조된 세계가 억압된다. 그리고 그렇게 억압된 세계가 사라지지 않고 잠수한 것이 실재계를 이룬다.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 억압된 상상력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어른들은 무엇을 꿈꾸는가. 그러므로 무엇을 상상하는가. 상실된 유년을 꿈꾼다. 억압적인 현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해주는 파라다이스를 상상한다. 그렇게 돌고 돌아 마침내 작가의 그림의 전제이면서 주제이기도 한 파라다이스에 당도했다. 파라다이스는 낙원이다. 지상낙원이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지상에 그런 낙원은 없다. 아르카디아 인 에고. 심지어 아르카디아(그러므로 낙원)에도 죽음은 있다. 비슷한 말로 유토피아가 있다. 실제로는 없는데, 다만 사람들의 상상력으로만 존재하는 장소다. 상상력이 지배하는 세계,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진 현실이다. 그러므로 다시, 어른이 상실한 유년이고, 존재가 상실한 원형적인 세계다. 이로써 작가는 어쩌면 현대인이 상실한 유년을, 존재가 상실한 원형적인 세계를 꿈꾸고, 상상하고, 복원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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