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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묵/ 흐르는, 덧없는, 그러므로 어쩌면 무상한 풍경 앞에 서게 만드는

고충환



장태묵/ 흐르는, 덧없는, 그러므로 어쩌면 무상한 풍경 앞에 서게 만드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잔설이 남아있는, 잔설 위로 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막 녹기 시작한 얼음 아래로 흐르는 물색이 설핏 보이는 것도 같은, 수면에 숲이며 나무 그리고 하늘과 같은 풍경이 비치는, 그러므로 풍경 속에 또 다른 풍경을 품고 있는, 그렇게 풍경을 확장하면서 심화하는, 수면에 이는 바람에 숲이, 나무가, 나뭇잎이 수런거리는 것도 같은, 수면에 이는 물결에 빛이 비치면서 자잘한 빛 조각들로 산란하는, 그렇게 수면과 빛 알갱이가 물비늘을 만들면서 서로 희롱하는 것도 같은, 그 위로 꽃잎이 하늘거리며 내리는, 때로 낙엽이 떠다니는, 우묵한 화면 안쪽으로 갈대밭이 무성한, 그 위로 흐릿한 햇살이 비치면서 음영을 만들고 물길을 만드는, 날씨 감정으로 치자면 흐린, 그렇게 흐릿한 대기가 투명한 막처럼 햇살을 감싸 안으면서 부드러운 벨벳을 펼쳐놓은 것도 같은, 색이 영 없지는 않지만 대개 모노 톤과 무채색에 가까운, 멈춘 듯 흐르는, 고요하고 정적인 풍경이다. 


풍경이다. 풍경에 드리워진 빛의 질감을 그린 외광파 풍경이다. 원색의 터치를 대비시켜 빛의 질감을 강조한 인상파보다는, 코로 같은, 인상파보다 더 부드러운 느낌의, 더 멀고 아득한 느낌의 대기의 질감을 표현한 바르비종 화파에 가깝다. 음악으로 치자면 작가처럼 흐르는 물(소리)에 감각 한 드뷔시의 인상파 음악을 떠올리게도 된다. 

그런데, 풍경이 움직인다. 풍경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닐 것인데, 이쪽에서 보면 풍경도 이쪽을 보고, 저쪽으로 가면 풍경 또한 저쪽을 본다. 눈을 따라다니는 것인가. 여하한 경우에도 그림은, 풍경은 정면에서 본 것처럼 보인다는(볼 버릇한다는) 회화의 관성을 정의한 정면성의 법칙인가. 꼭 그런 것 같지만도 않다. 사실을 말하자면 풍경에도 눈이 있다. 응시다. 내가 풍경을 보면(시선), 풍경도 나를 본다(응시). 기계적으로(저절로) 그렇게 된다기보다는 사물과 주체 간 교감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하는, 교감의 순간이며 계기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다시, 그렇게 내가 풍경을 보면 풍경 또한 나를 본다. 그렇게 풍경을 보면서 내 쪽에서 풍경 쪽으로 뭔가가 건너가는 것이 있고, 풍경에 속한 무언가가 내 쪽으로 건너오는 것이 있다. 풍경을 절실하게 보고 있으면, 마침내 풍경이 자기를 열어서 보여주는 것이 있다. 하이데거로 치자면, 세계의 개시,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다. 풍경은 미증유의 세계를 품고 있다. 풍경이 미증유 그러므로 아직은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서 보여주는 것, 자기를 내어주는 것, 그러므로 풍경이 잠재적인 자기를 실현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풍경을 보는 자의 몫이고, 풍경을 그리는 작가의 일이다. 아마도 작가는 풍경을 간절하게 보았을 것이고, 그렇게 풍경이 자기를 작가에게 열어서 보여준, 그러므로 자기를 내어준 뭔가가 있었을 것이고, 작가는 마침내 다름 아닌 그 미증유의 세계를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풍경이 품고 있는 미증유의 세계? 그게 뭔가. 분위기다. 인상파에서 빛의 질감이 강조된다면, 바르비종 화파에서처럼 작가의 그림에서는 상대적으로 분위기가 강한 편이다. 다시, 그렇다면 분위기가 뭔가. 감성을 파고드는 서정적 분위기라고 해도 좋고, 아우라라고 해도 좋다. 발터 벤야민은 원래 아득하고 먼 것인데, 마치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을 아우라라고 했다. 벤야민 자신은 종교적인 경험에 빗대어 예술(예술의 본성)을 얘기한 것이지만, 그대로 작가의 그림에 대입해봐도 좋을 것이다. 앞서 바르비종 화파의 그림이 아득하고 먼 느낌을 준다고 했는데, 작가의 그림이 그렇다고 해도 좋다. 다시, 하이데거를 빌리자면 사물 대상(그러므로 풍경)이 은폐하고 있는(그러므로 아득하고 먼) 가능성의 세계가 비로소, 마침내 자기실현을 얻는 순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풍경은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사실은 나를 따라다닌다기보다는 빛을 따라다니고 있었고, 빛의 강도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밝은 곳에서 보면 밝게 보이고, 우묵한 곳에서 보면 어둑해 보였다. 실제로는 그림의 기울기에 따라서 그림이 밝게도 어둑하게도 보였는데, 사실상 같은 의미며 현상이라고 해도 좋다. 하나의 그림 속에 밝은 풍경이 들어있고 어스름한 풍경이 들어있다. 하나의 그림 속에 빛에서 음영으로 이어지는 빛의 강도의 스펙트럼이 다 들어있다. 무슨 말인가. 하나의 그림 속에 동틀 때 본, 햇빛이 은근할 때 본, 어스름할 때 본 풍경이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시간 감정이 들어있고, 계절 감정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빛의 강도의 스펙트럼을 매개로 사실은 시간의 스펙트럼을 함축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풍경을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이 다 그렇다기보다는 대개 그렇고 어떤 그림에서는 더 그렇다. 하나의 그림 속에 시간의 경과를 함축하고 있는 것인데, 인상파 화가 모네의 그림에서처럼 같은 모티브를 다른 시간에 그린 연작 그림은 있었어도 이처럼 하나의 그림 속에 변화되는 시간을 함축하고 있는 그림은 없었다. 그림 속 시간이 실제로 흐른다거나 그림이 움직인다기보다는(변한다기보다는) 다만 그처럼 느껴지는 암시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로 보면 되겠다. 결국 회화는, 특히 특정 모티브를 소재로 한 재현적인 회화의 경우 실제처럼 보이는 암시와 착각의 기술이 결정적이라고 해도 좋다. 실제로는 바람이 불 리가 없는데도 바람을 암시한다든지, 실제로는 평면인데도 투명한 공기의 깊이를 감각 하게 만든다든지, 실제로는 멈춘 강물을 흐르게 하는 것이 그렇다. 

여기에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펄 성분과 같은 빛에 반응하는 성질을 가진 안료를 사용했을 것이고, 여기에 작가만의 독창적인 붓질이 더해졌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풍경이 은폐하고 있는 풍경, 잠재적인 풍경, 가능성의 풍경, 그러므로 풍경의 속살을, 풍경의 본성을, 풍경의 총체를 보아 내려는 집요한 눈의 욕망이 있었을 것이고, 풍경에 자기를 일치시키는 합일과 합체의 사투(그 자체 자기 사유와 명상에 가까운)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 그 사투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 그리는 지난한 형식실험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바람과 대기가 수면에 산란하는 빛 알갱이와 희롱하는, 그렇게 물질과 주체가 유희하는 모네의 수련 연작에서 바슐라르가 캐낸 물질적 상상력에 대한 감각적 이해가 있었을 것이고, 세계(그러므로 풍경)와 주체가 유기적인 한 몸을 이룬 메를로 퐁티의 몸의 현상학(그러므로 감각적 현상학)에 대한 미학적 공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득하고 먼 느낌의 풍경을 손에 잡힐 듯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작가의 모든 그림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 수면을 그린 그림들이 많다. 작가만의 풍경이 갖는 특징적인 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인데, 아마도 흐르는 강물을 그리다가 문득 가닿은 지점일 것이다. 흐르는 것들, 변하는 것들, 그러므로 어쩌면 무상한 것들을 좇다가 도달한 지점일 것이다. 멈춘 듯 흐르는 강물 위에 비친 나무며 숲이며 하늘을 그린 그림이다. 정색하고 말하자면 강물 그러므로 그림에는 원래 없는 것들을 그린 그림이다. 강물에 비친 것들을 그린 그림이고, 강물 바깥에 있는 것들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외연을 그림의 프레임 바깥으로 확장하는 그림이고, 그림 바깥을 그림의 안쪽으로 불러들여 심화하는 그림이다. 그렇게 그림 속에 또 다른 그림을 품고 있는 이중 그림이고 겹 그림이다. 

그렇게 수면은 외계를 반영하는 성질이 있다. 수면은 이처럼 외계를 반영하는 것에서 나아가 자기를 반영하는 성질 그러므로 자기반영성의 메타포, 거울(이번에는 외계가 아닌 자기를 보는, 외계를 통해서 자기를 보는)의 메타포일 수 있다. 무의식의 표상이며, 심연의 표상일 수 있다. 그렇게 흐르는 강물을 보고 있으면 마치 세상 끝에 있는 풍경 앞에 서 있는 것도 같고, 세상과 다른 세상이 연이어진 경계 위에 서 있는 것도 같다. 

그렇게 아득한, 먼, 손에 잡히지 않는 풍경 그러므로 수면 위로 꽃잎들이 하나둘 흩날린다. 그렇게 흘러내리면서 수면에 비친 것들, 하늘의, 바람의, 나무의, 숲의, 대기의 그림자를 덮는다. 그렇게 무리 지어 휩쓸려 흐르다가 마침내 화면을 그러므로 수면을 온통 꽃잎들로 덮어서 가린다. 그렇게 수면에 비친 실루엣도 사라지고, 수면이 사라지고, 낱낱의 꽃잎마저 사라진다. 꽃잎으로 채우면서 꽃잎(낱낱의 꽃잎이 갖는 개별성)이 사라진다. 

그렇게 추상이 열린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경계가 열린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구상과 추상이 재편된다. 그렇게 풍경을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은 구상을 넘어, 심연(풍경을 내재화한, 그러므로 내면적인 풍경)을 넘어, 풍경이 추상으로 재정의될 수 있는 지점을 열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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