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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유 - 의미의 재구성, 크리쉐의 재구성

고충환

김동유는 상투적인 이미지를 차용한다. 키치를 차용하고, 크리쉐를 차용하고, 대중적인 이미지를 차용하고, 미술사를 차용한다. 이렇게 차용된 이미지는 일종의 낯설게 하기를 통해 그 이미지와 의미가 전복된다. 전복된 의미는 그림에 대한 투명하고 총체적인 독해를 방해하면서 새로운 의미들을 파생한다. 그러니까 의미놀이, 착시놀이, 키치그림, 나비그림, 이중그림(초상화 연작), 미술사 연작 등의 의미의 지점들로 현상한다. 이 의미의 좌표들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리면서 이미지와 그 의미를 증식해나간다.


의미놀이. 개념미술가 요셉 코주스는 실제의 의자와 그 의자를 찍은 실물 크기의 사진 그리고 의자에 해당하는 사전적 정의를 제안한다. 또는 실제의 망치와 그 망치를 찍은 실물 크기의 사진 그리고 망치에 해당하는 사전적 정의를 제안한다. 그리고 당신이 알고 있는 의자 또는 망치의 (진정한) 의미는 이것들 가운데 무엇에서 비롯되었느냐고 묻는다. 김동유는 실제의 팔레트와 그 팔레트를 찍은 실물 크기의 사진 그리고 이를 그대로 재현한 그림을 제안한다. 또는 실제의 레코드 재킷과 그 재킷을 찍은 실물 크기의 사진 그리고 이를 그대로 재현한 그림을 제안한다. 그리고 당신이 알고 있는 팔레트 또는 레코드 재킷의 (진정한) 의미는 이것들 가운데 무엇에서 비롯되었느냐고 묻는다.
이런 물음 속에는 소여된 조건으로서의 실제와 그 실제를 지시하는 의미와의 관계에 대한 동일시(동일성)의 인식 혹은 비동일시(비동일성)의 인식이 들어있다. 동일시의 인식은 실제와 의미가 일대일의 관계로 서로 대응하고 조응한다는 결정론적 인식이며, 닫힌 체계, 완결된 체계, 자족적인 체계, 비활성 체계가 이를 지지한다. 비동일시의 인식은 실제와 의미가 일대일의 관계로 서로 조응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수한) 차이(의미론적 차이)를 만들어낼 뿐이라는 비결정론적 인식이며, 열린 체계, 미완의 체계, 관계적 체계, 활성 체계가 이를 지지한다.

실제는 객관적 사실이지만 의미는 주관적 사실이다. 실제의 좌표는 고정돼 있지만 의미의 좌표는 유동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유형의 실제보다는 무형의 실제에서, 지시적 의미보다는 가치론적 의미에서 더 극명해진다. 그나마 실제가 객관적이며 그 좌표가 고정돼 있다는 인식마저도 그 자체 사실이기보다는 한갓 신념의 수준에서만 정당화될 뿐이다. 플라톤의 관념상(궁극적 실제로서의 이데아)마저도 사실상 감각경험을 근거로 유추된 것, 생활경험이 투사된 상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현상학은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념상은 이미 지각상의 소산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감각경험이나 생활경험이 전개되는 장은 다름 아닌 온갖 이질적인 의미들이 부침하고 상충하고 차이를 만들어내는 장, 차이 나는 의미들이 생산되는 장, 의미론적 장이기도 하다.

실제와 의미와의 관계를 묻는 김동유의 제안은 이에 대한 동일시의 인식을 폐기하고 비동일시의 인식을 받아들인다.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실제의 좌표마저도 고정돼 있지 않다거나, 매순간 주어진 이질적인 상황으로부터 새로운 의미가 발생한다거나, 그 상황 여하에 따라서 의미는 수정되기조차 하는 것임을 주지시킨다. 실제는 하나지만 그 실제가 놓여지는 상황, 전제, 문맥, 맥락은 하나가 아니다. 이때의 (무수한) 상황이 (무수한) 의미를 낳는다.

착시놀이. 식당에 가면 여러 형태의 간이 벽을 볼 수 있다. 그 중 일정한 간격으로 촘촘한 주름이 있어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소위 자바라 식의 벽체가 있다. 김동유는 이 자바라 식의 벽체를 본떠 만든 변형 캔버스 위에다 그림을 그린다. 그 그림은 보는 방향에 따라서 달라 보인다. 한쪽에서 보면 대나무 숲이 보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대나무 숲과 함께 호랑이가 보인다.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호랑이가 드러나 보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더불어서 그림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보는 각도에 따라서 나타나거나 숨겨지는 이미지, 심지어는 움직임을 암시하기조차 하는 이미지가 어지럼증을 불러일으킨다. 이 메스꺼움은 분명 옵아트의 현란한 착시효과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옵아트가 패턴화된 문양의 동어반복적인 나열에 바탕을 둔 추상미술과 형식주의의 소산이라면, 작가의 그림은 재현회화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위장이라는 개념을 추슬러낸다. 따지고 보면 위장은 인상파 그림에서 이미 예견된 바가 있다. 멀리서 보면 형태가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무의미한 붓질과 물감 덩어리만을 확인하게 되는 식의 소위 감상을 위한 적절한 거리 개념이 그림과 위장과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을 통해 김동유는 그림그리기란 결국 이미지나 의미를 드러내고 숨기기와 관련된 숨바꼭질의 한 형태임을 주지시킨다.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층위로 불러낸다는 예술 일반의 기획 역시 이러한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더불어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그림이란 그것을 대면하는 개별주체의 입장(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의미로 확대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말 할 것도 없이 창작주체보다는 향수주체에게 그 초점을 맞춘 소통이론과 통한다. 이와 함께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좌우로 옮겨 다니는 행위나 착시효과가 불러일으키는 울렁거림은 조형예술의 경계를 단순한 시각적 경험 너머로까지 확장시킨다.


키치그림. 미국의 한 방송국이 중산층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자기 집에 걸어놓고 싶은 그림의 종류를 묻는 것이었는데, 그 세목들을 합성해 놓고 보니 영락없이 키치그림이었다고 한다. 고즈넉한 호수를 끼고 있는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순록, 그 초원을 마치 병풍처럼 둘러친 끝도 없이 펼쳐진 전나무 숲, 그리고 정상에 채 녹지 않은 눈을 이고 있는 설산은 그대로 크리쉐로 부를만한 상투형의 조합을 보여준다. 이는 현대인이 상실한 것들이나 거머쥘 수 없는 것들, 그 좌절된 욕망이 투사된 일종의 인공낙원이며 의사 유토피아 같은 것이다.

김동유는 이러한 키치그림의 우리식 버전이랄 수 있는 상화(商畵) 위에다 그림을 덧그린다. 물레방아 도는 초가집 위로 뜬금없이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의 비호를 받으며 태극기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있거나, 화사한 화병 주위로 나비들이 나풀거리는 식이다. 나비는 상화가 결여하고 있는 현실감을 되돌려주기도 하고, 오히려 상화 자체의 비현실성을 더 강조하기도 한다. 이렇듯 상투형을 차용하는, 상투형에 기생하고 개입하는 작가의 그림그리기는 그러나 키치적이지가 않다. 상투형에 대해 상투형으로 대응하는 작가의 태도는 일종의 이중부정(그 자체 지양 즉 부정을 통한 긍정과 통하는)이나 낯설게 하기와 연관된다. 이로써 상화는 친숙하면서도 낯선 이중의 결을 드러낸다. 이는 키치를 부정하고 폐기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키치 자체의 자족적인 존재성을 인정하고 그 고유의 삶을 되돌려주려는 태도와 통한다. 상투형에 대해 상투형으로, 크리쉐에 대해 크리쉐로, 키치에 대해 키치로 대응하고 부가하고 개입하는 과정을 통해 일종의 의미론적인 반전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의미론적인 역설 상황을 발생시킨다. 작가의 키치그림은 말하자면 이질적인(친근하고 낯선) 요소들의 우연한 결합이 불러일으키는 예기치 못한 서사를 겨냥한 초현실주의의 사물의 전치에 대응하는 아방가르드 식의 버전이며 그 실천논리를 예시해준다.






나비그림. 캔버스 위로 하나둘 나비들이 날아든다. 나비들은 때론 빽빽하게 때론 성글게 모여들면서 캔버스 위를 수놓는데, 반가사유상 같은 부처나, 반 고흐와 이중섭의 초상, 그리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의 초상의 형상을 띠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바로 그 형상이라고 확언하기는 어려운 이미지,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인 이미지, 암시적인 이미지들이다. 왜 하필이면 나비일까. 나비들로써 축조된 형상은 결코 견고해보이지가 않는다. 나비들은 한데 모여 형상을 만든 것처럼 이내 나풀거리며 흩어져 형상을 해체시킬 것만 같다. 단순히 나비들의 집적에 지나지 않는 이미지가 하나의 형상으로 인지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이는 혹여 우리가 머리 속에 그려낸 관념상을 화면 속에서 재확인하려는 인지습성(말하자면 동일시의 습성)의 소산이 아닐까. 이런 습성을 배반하기라도 하듯 나비들은 형상을 비현실적으로 만들고, 그 견고한 정체성(혹은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흔들어 놓는다. 나비는 관념상과 감각상, 실제와 이미지, 실상과 허상,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을 가름하는 벽을 허물고 넘나드는, 비현실로부터 현실 속으로 날아든 경계의 전령이다. 그 꿈의 전령이 그려낸 이미지에는 그 실체가 없다.

김동유의 이 일련의 나비그림들은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형상에 대한 견고한 확신을 의심하게 하고, 재현된 이미지에 대한 신념을 붕괴시킨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며, 허상이고 허구이고 마치 꿈과도 같은 것이라는, 더 나아가 나비가 만들어낸 형상뿐만 아니라 나비 자체마저도 한낱 물감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 일련의 그림들은 작가의 여타의 그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서적인 환기력이 강한 편이다. 그 정서적 느낌은 실제와 그 실제를 재현한 이미지가 결코 같지 않음(비동일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오고, 더 나아가 혹여 현실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의 인식에서 온다.


이중그림(초상화 연작). 케네디의 초상 속에 먼로가 들어있고, 먼로의 초상 속에 케네디가 들어있다. 박정희의 초상 속에 김일성이 들어있고 김일성의 초상 속에 박정희가 들어있다. 정확하게는 전체 이미지로 드러나 보이는 초상화 속에 마치 부분 이미지인 양 다른 초상화가 반복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 그림들에서의 전체 이미지와 부분 이미지는 의미론적으로 서로 연관관계에 놓여 있지만, 다른 그림들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예컨대 먼로의 초상 속에 박정희가 들어있는 그림이나, 역시 먼로의 초상 속에 반 고흐가 들어있는 그림이 그런 경우이다. 도대체 먼로에게 박정희가 그리고 더욱이 반 고흐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렇듯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전체 이미지와 부분 이미지와의 의미론적인 연관관계는 우연이랄 것까지야 없겠지만 그렇다고 필연적인 것 같지도 않다. 나아가 그 관계는 아무런 이렇다할 중요하거나 결정적인 의미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비치기조차 한다. 결국엔 케네디와 먼로, 박정희와 김일성과의 의미연관마저도 그 관계에 대한 선입견을 파고드는 일종의 트릭 혹은 전략으로 느껴진다.

여기서 김동유는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한 신뢰를 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여기에다 비유기적인 관계, 우연적인 관계, 이질적인 관계를 대질시킨다. 전체는 부분들 간의 유기적인 관계에 의해 지지되지 못하고, 부분 역시 전체에 속해있지 않다(외적형식에서 엿보이는 부분과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는 다만 우연의 일치에 지나지 않는다). 부분과 전체는 유기적인 관계 대신에 일종의 기생의 논리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부분은 전체에 기생하고, 또한 전체는 부분에 기생한다. 여기서 부분은 전체의 숙주로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며, 전체 또한 부분의 숙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부분은 전체를 지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자족적인 존재감을 위해 전체를 필요로 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기생의 논리는 작가의 다른 그림들에서도 광범위하게 확인되고 있는 차용된 이미지 즉 패러디와 통한다. 말하자면 크리쉐에 기생하는 크리쉐, 상투어에 기생하는 상투어, 키치에 기생하는 키치, 차용된 이미지에 기생하는 차용된 이미지와 통하는 것이다. 여기서 차용된 이미지는 다른 차용된 이미지에 기생함으로써 정체불명의 이미지를 낳는다. 예컨대 그 속에 먼로를 품고 있는 케네디는 케네디가 아니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그저 혼성으로 볼 수만도 없는, 작가의 그림은 먼로와 케네디 사이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허다한 다른 의미들(케네디에게도 그리고 먼로에게도 속해 있지 않은)을 낳고 불러오는 의미의 산종놀이를 노는 것 같다.


미술사 연작. 김동유는 상당한 사실적 테크닉을 지닌 작가이다. 이를 무기 삼아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각종 명화를 차용한다. 단지 그뿐이라면 보통의 패러디 논의의 수준에 머물겠지만, 허나 그렇지가 않다. 작가는 원화를 단순히 그대로 옮겨 그리지는 않는다. 구겨진 모나리자나 구겨진 나폴레옹이란 화제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작가는 원화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 원화를 차용한 복제화를 재차 사진으로 찍은 복제사진, 그것도 구겨진 채 버려진 복제사진을 차용한 것이다. 원본을 차용한 사본의 사본을 재차 차용하면서, 이를 그대로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변형된 형태로 차용한 것이다.

작가의 이 일련의 그림들에 나타난 사본의 사본이나 변형된 차용 개념은 이미지의 연쇄를 떠올리게 한다. 즉 원본의 사본은 그 생리가 원본과 가깝지만, 사본의 사본은 상대적으로 원본과의 관계가 희미해진다. 그 연쇄가 진작되면서 점차 사본과 원본과의 관계는 멀어지고, 나아가 그나마 사본에 남아있던 원본의 희미한 흔적마저 사라지고 만다. 마침내 사본이 원본과의 관계로부터 놓여나 그 자족적인 존재성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의 유령들(시뮬라크라 즉 가상실제 혹은 부재하는 실제)은 현실보다 더한 현실, 실제보다 더한 실제를 환기시키는 강력한 기제로서 군림한다. 아우라의 광휘로 빛나는 사본, 물신으로서 숭배되는 사본, 신성한 사본 즉 매력적인 상품이 된 것이다. 그 사본은 이처럼 물신화된 상품과 동격이란 점에서 키치와 통한다.

김동유는 미술사 연작에서 이처럼 사본의 사본으로 나타난 차용의 논리에 기대어 이미지의 연쇄(그 자체 의미의 연쇄와 동격인)를 드러내고, 변형된 차용의 개념을 통해서 물신화된 미술사와 키치와의 유기적인(공모적인) 관계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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