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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경 / 평면 공간 탐구 40년의 결실

김영호

시촉각적 공간과 이미지의 원형의식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평면'으로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구축해온 이나경 교수가 정년을 기념하는 전시회를 갖는다. 이 글은 전시회를 계기로 작가의 평면작업 40년의 성과를 정리해 보려는 의도에서 적은 것이다.

이나경은 미국 윌크스 대학과 메릴랜드 아트 인스티튜트 대학원에서 미술수업을 받고 귀국한 1972년 이래, 다변화되는 국내외의 화단풍토 속에서도 캔버스의 평면과 사각의 테두리 그리고 물감의 질료성을 바탕으로 한 형식탐구의 회화작업을 꾸준히 견지해 왔다. 미술사의 문맥에서 일견하면 작가의 작업은 평면의 순수성을 지향하는 색면추상 회화의 범주에 속해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작가의 특성화된 조형세계는 평면위에 드러나는 공간에 대한 성찰이 본격화되는 어떤 지점에서 발견되며, 이 평면적 공간경영의 과정을 통해 작가는 새로운 환영(illusion)을 일으키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격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과 환영의 문제는 화단에서 주목받는 몇몇 제자들의 작품에서 새로운 언어로 변주되며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실, 회화에서 공간에 대한 물음은 미술사를 이끌어온 힘의 본령이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미술사가 피에르 프랑카스텔이 정리한 것처럼 그 공간표현의 역사는 단순히 시각적 사실과 형식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사고행위와 관련된 사회적 결실이기도 하다. 이나경의 평면작업이 거둔 성과는 이러한 이러한 미술사의 장대한 과업이 작가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시지각 환경과 만나는 접점에서 생겨난 새로운 어법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평면작업에 대한 저간의 비평문들을 보면 대부분 공간과 환영의 문제로 일관되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평면과 입체 사이의 간극에서 유발되는 시각적 긴장감’이나 ‘시각적 공간에서 시촉각적 공간으로의 변화’, ‘밀도와 농축감이 돋보이는 독특한 색채 어법’, 그리고 ‘은닉의 방법을 통한 적극적 드러냄’ 등의 비평언어들은 모두가 시각적 구성요소로서 형태와 색채가 만들어내는 유기적 회화공간을 설명하는데 촛점을 두고 있다.

이나경에 있어 새로운 평면 공간의 탐구는 캔버스의 평면과 환영을 둘러싼 물음들과 연관성을 지닌다. 1990년대 초반부터 작가의 작품에 나타나는 그리드나 기하학적 도상들은 일점 투시법으로 포착한 구조물의 단면들을 다시적 관점으로 다시 배치한 것이었다. 작가는 화면을 분할하는 선들이 도시공간에 배치된 건물과 바둑판처럼 짜인 실내의 구조로부터 얻은 것이라 언급한다. 작가는 캔버스에 재구성된 수평과 수직의 선들에서 재현을 넘어선 회화의 원형적인 형식을 발견하고, 거기에다 자신의 일상적 시각체험을 통해 얻은 도상이미지를 얹혀 복합적인 회화의 공간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이후 이나경의 작업은 도시와 실내를 넘어 자연과 사물을 넘나들며 자신의 캔버스에 시적 서정과 취향이 깃든 내밀한 심리적 공간을 구축할 지반을 마련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나경의 공간 표현 방식은 변화를 겪게 된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시각적 공간에서 시촉각적 공간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화면의 바탕에 편평하게 칠해진 밝은 색채 위에 보색관계의 물감을 다시 반복해 찍어 덮는 과정에서 점차 시촉각적 감흥의 원근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바탕 공간은 칠해진 물감이 마르고 다시 그 위에 덧칠해지기까지 소요되는 고난한 창작과정의 시간성을 품음으로서 평면과 공간 그리고 시간성이 함께 숨쉬는 4차원적 세계를 드러내는 효과를 만들어내었다. 나아가 작가는 이 시촉각적 공간위에 일상적 오브제의 이미지들을 도상처럼 얹혀 올림으로서 급기야 독자적인 환영을 일으키는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심상적 공간에 ‘풍경’이라는 제명을 붙였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종이꽃이 있는 풍경> 시리즈는 시촉각적 바탕위에 일상적 오브제를 대체하여 종이꽃을 배치한 2004년 이후의 작업들 중에서 선정되었다. 화면의 바탕은 원형 또는 타원형의 도구를 도장처럼 이용해 유채물감을 반복해 찍어내면서 색조와 물성이 한층 강조되고 있으며, 판화적 프로세스가 일으키는 표현의 간접성은 내밀한 리듬감을 제공한다. 그리고 표면에 펼쳐놓은 종이꽃의 강렬한 기하학적 이미지는 장식 효과와 더불어 보는이들에게 경쾌한 시각적 감흥을 선사하고 있다. 작가는 종이꽃 이미지를 채택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종이의 평면성과 꽃이 가지는 장식성이 흥미를 끌었고, 종이꽃은 사실성과 추상성을 동시에 만족시킨다.” 종이꽃이라는 새로운 오브제의 도입으로 이나경의 그림은 장식성과 시촉각성, 그리고 입체와 평면 사이의 조형적 일루전이 함께 숨쉬는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공간을 조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나경의 새로운 평면공간 작업은 어떤 동시대적 가치를 지니는가. 이러한 질문은 작가의 화면에서 특화되고 있는 색채의 밀도와 농축감이 시대상과 어떻게 조우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다르지 않다. 평론가 박래경은 그 가치를 ‘한국인의 보편적인 색채감각의 한 취향성’이라는 측면에서 찾고 있는데, ‘속에서 스며나오는 은은한 색감’을 특색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다. 한편, 이나경의 작업이 지닌 ‘구조적 공간’이 지닌 미학적 가치도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중첩된 붓질 혹은 물감의 층이 만들어내는 시촉각적 공간은 현실과 환영이 융합된 풍경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체감하는 이미지의 원형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나경의 공간탐구는 그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실상과 허상, 구상과 추상, 부분과 전체, 입체와 평면, 그리고 물질과 정신의 자유로운 교류’라는 측면에서 모더니즘의 세계를 넘어 동시대적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가치는 상반성의 합일이라는 현대 심층심리학의 지향점과 논거를 함께하고 있기도 하다.

이나경은 한국 근대 격변기를 살아온 지식인 교수로서 한 남편의 아내로서 두 자식의 어머니로서 반듯한 삶을 살았고, 무엇보다 화가로서 자신의 작품에 남달리 철저한 예술적 논리를 적용시키는 태도를 고수해 왔다. 은닉과 드러냄의 평면적 공간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둘러싼 삶의 체험으로부터 얻은 결실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년을 기념하는 개인전에 출품된 <종이꽃이 있는 풍경> 시리즈 근작들이 후학들에게 주는 큰 선물이라 생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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