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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 순수조형과 심미주의를 향하여

김영호

김금희 / 순수조형과 심미주의를 향하여     

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평론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중세 이태리 어느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살인사건을 다루는 역사 허구물이다. 저자는 이 소설 속에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장미’란 단어를 제목으로 사용했다. 에코는 작가노트를 통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제목은 독자를 헷갈리게 하는 것이어야지, 독자의 사고를 통제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과연 기호학의 대가다운 발상이다. 후대의 평론가들은 에코가 제시한 이러한 언술에 대해서 ‘장미라는 단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상상의 날개를 달아주었다’고 논평하기도 한다.  
 
시각예술의 경우에도 기호학적 체계는 자주 사용되어 왔다. 이미지의 기호학이 그것이다. 다양한 유형의 인물이나 사물 혹은 풍경 따위의 이미지는 작가가 원하는 어떤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기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때 작가가 드러내려는 의미는 눈에 보이는 데로의 대상 세계를 넘어선 차원을 동시에 지시하게 된다. 동양의 사군자나 십장생 그림은 작가의 정신이나 사상을 나타내는 좋은 예가 된다. 그러나 기호는 항상 열린 구조를 품고 있어 주어진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양한 차원의 의미들을 만들어낸다.      
  
김금희가 오랜 세월을 천착해 온 소재는 장미다. 달리 말하자면 작가에 있어 ‘장미’의 이미지는 무대 위의 배우들처럼 작가의 감정 혹은 정신을 반영하는 기호로서 기능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장미라는 소재는 대중적이고 따라서 진부한 소재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타당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인물이 그러하듯 꽃의 이미지는 현대회화의 주요 작가들에 의해 그려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회화의 소재로 지속될 것이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장미의 표상방식과 그것을 통해 드러내려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김금희의 경우 장미의 표상방식은 20여년의 시간을 거치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왔다. 꽃잎의 외형에 대한 관찰과 묘사에서 부터 장미의 이미지를 자신의 심상에 동화시키는 단계에 이르기 까지 장미화에는 그동안 쏟아온 작가의 시간과 공력이 온전히 반영되어 있다. 그녀의 그림 안으로 호출된 장미는 더 이상 뜨락에 피어있는 자연물로서 장미가 아니다. 무리지어 만개한 장미 송이는 이미지로 전환되어 화면의 전반에 자리잡고 있다.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이름을 불리운 장미는 어느덧 의미로 다가올 채비를 갖추고 있다. 

김금희의 장미는 강렬한 적색 물감과 감각적인 터치에 의해 시각 이미지로 다시 태어난다. 작가는 시각적 인상의 강렬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배경에 녹색 물감을 채워 놓았다. 보색 대비를 통해 화면에는 원색 다발의 소용돌이가 화려한 시각적 울림을 일으킨다. 김금희의 장미화는 화려하며 감각적인 원색으로 물들인 인상주의와 야수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듯 장미를 향한 작가의 시선은 자신이 체득한 조형 기법에 힘입어 새로운 차원의 미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김금희가 장미화를 통해 드러내려는 의미는 심미주의에 연계되어 있다. 예술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실재성이나 유용성과 같은 외적인 목적과 관계없이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순수한 미적 경험을 표상하는 일에 무게를 두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작가의 작품은 순수형식의 자율성에 가치를 두고 있으며 그의 작품에는 현실에 대한 발언이나 사회적 담론 같은 내러티브의 구조를 찾아보기 어렵다. 장미의 형상과 색채 그리고 꽃잎의 구조와 물성은 작가의 심상을 통해 자율적인 질서를 품고 있다. 그녀의 작품에는 장미 외에도 해바라기와 맨드라미가 등장하는데 조형방식과 미의식에 있어 장미의 경우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최근 김금희의 조형적 실험은 한층 순수조형과 심미주의적 특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소재는 화초에서 정물로 범주가 넓어졌으며 화면의 구성과 구도 그리고 색채와 질감 등 순수조형 요소들의 회화적 운용에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작가는 과일과 쟁반 그리고 서적이나 항아리 같은 범상한 오브제를 화면에 초대해 화면의 균형과 리듬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들을 구사한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것은 역시 색채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정물화는 축제의 공간처럼 화려한 색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무대가 된다. 정물 시리즈는 장미 시리즈에 제기된 소재주의의 함정을 극복하면서 등장한 것이나 조형적 실험의 범주로서 순수조형과 심미주의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금희는 이번 개인전에 그동안 틈틈이 제작해 온 풍경 시리즈도 내놓았다. 여행의 기억을 새겨놓은 도시 풍경들이다. 캔버스에는 물감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표정들로서 번지기, 뿌리기, 덧칠하기 등의 기법 실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화면에 여행의 아련한 기억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데 기여하는 요소들이다. 그녀의 풍경 시리즈 역시 작가가 장미 시리즈에서 정물 시리즈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유지되어 온 순수조형과 심미주의의 가치들이 여전히 숨쉬고 있다. 새로운 조형방식을 찾으려는 실험의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조형세계는 아직도 견고한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조형방식에 대한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상에서 보듯 김금희의 이번 개인전에는 세 개의 시리즈가 소개되고 있다. 장미와 정물 그리고 풍경이 그것이다. 시리즈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들 소재를 다루는 작가의 태도는 순수조형과 심미주의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칸트 이후 모더니즘 미술이 지켜온 순수와 본질에 대한 학습의 결과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내세우는 융합과 다양성에 의해 순수한 미적 경험을 누릴 기회가 자꾸만 유보되는 현실에서 심미주의적 가치를 추구하고 새로운 향방을 모색하는 일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제목이 드러내는 의미가 독자들에게 상상의 날개를 주었듯이, ‘장미 이미지’를 통해 김금희가 지향하는 순수조형과 심미주의 세계가 향후 어떤 예술적 성취를 거두게 될지 사뭇 기대가 된다. (20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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