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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우 / 종지기 화가의 푸른 초상들

김영호

고영우 / 종지기 화가의 푸른 초상들   

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평론가) 
        
  
I. 서귀포시 송산동의 하루는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로 마무리 된다. 저녁 여섯시에 종탑에서 내보내는 만종(晩鐘)이다. 노동을 끝내는 시간, 종지기 화가가 치는 종소리는 동네 자구리 해변을 넘어 바다의 수면 위로 울려 퍼진다. 출조(出釣) 중인 어부들뿐만 아니라 위로는 한라산 자락에 서식하는 노루와 멧비둘기 따위의 들짐승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저녁 종소리를 듣고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1970년 여름 영세를 받고 10여년이 지난 40의 나이에 스스로 자원한 일이었다. 서귀포성당 종지기로 종탑의 로프에 몸을 맡긴지 어느덧 37년이 흘렀다. 한동안은 새벽과 정오 그리고 오후의 삼종(三鐘)을 모두 도맡았다. 전업화가로서 밤늦게 그림 그리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두 차례로 줄고 급기야 한 차례가 되었지만 정시(定時)의 타종은 중요한 일과의 하나였다. 2층 작업실에서 추락해 척추가 부서진 후 3개월 동안 중단했으나 ‘치유의 은총’으로 완치된 후 현재까지 타종을 지속하고 있다 한다. 화가 고영우에 있어 종을 치는 시간은 멀리 있는 것들과 소통하는 시간이다. 바다와 산을 잇댄 공간과 그 안을 살아가는 많은 생명들은 그가 내보내는 종소리에 반갑게 응답하며 하루를 정리할 것이다. 



화가 고영우가 종지기의 삶을 사는 데는 좀 더 깊은 사연이 있다. 그는 오래전부터 집에서 몇 킬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공황장애(恐慌障礙)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성당 종탑에서 내보내는 종소리의 범위가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제한된 영역이었다. 로프에 몸을 맡기는 타종 행위는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일이자 심리적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려는 몸짓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신의 섭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의 삶에 대해 제대로 아는 바가 없다. 서귀포라는 향리(鄕里) 공간에서 어둠을 직시하며 실존적 허무와 불안의 감정을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의 초상으로 드러내는 순수한 영혼의 화가라는 정도가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다. 그의 강박증이 어디서 왔고 그것이 예술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그의 예술이 지닌 의미와 보편적 가치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다.   


                

II. 고영우가 공황장애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고교시절인 17세 부터였다 한다. 안방에 놓여 있던 거대한 화롯불 앞에서 책을 읽다 겪게 된 일로 기억하고 있다. 자신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나 공포를 동반한 심리적 불안상태가 찾아온 것이다. 이후 두 해를 휴학하고 집에서 요양하는 처지가 되었고 의사로부터 <자율신경실조증(自律神經失調症)>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심장이나 호흡기, 소화기 따위의 기능을 조절해 주는 자율신경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질환이라는 설명도 들었다. 화가이자 교육자였던 부친의 격려 속에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나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게 되었으나 그의 건강은 급기야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었다. 1970년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서귀포에 정주(定住)한 이후 점차 그의 공황장애 증세는 공간 지각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이어졌다. 외출할 때 이동 거리를 머릿속에 계산하고 움직이는 습관이 생기면서 나타난 증세였다. 집을 떠나 장소를 이동하면 불안감이 몰려오고 출구 없는 미로에 가두어진 것 같은 심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서울 생활을 접고 낙향한 1970년 1월 이후의 시간을 헤아려 보면 서귀포를 벗어나지 못한 삶이 어느덧 48년에 이른다. 지금도 그는 엘리베이터 따위의 폐쇄된 장소에 머무르지 못하며 활동 반경은 집 주변의 몇 킬로로 제한되어 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했다.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다. 1943년에 태어난 고영우는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미군정 그리고 4·3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변기에 유년기를 보냈다.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부친 아래서 성장한 그가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무관한 삶을 살았을 리 없을 것이다. 그의 유년기 개인사를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20세기 중반 한국 근대사는 불안과 고통과 죽음이 지배하는 시대로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4·3 사건에서 이미 시작된 전쟁과 섬에서 자행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트라우마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전쟁을 피해 서귀포로 피난 내려와 살던 화가 이중섭이 부친과 만나던 모습을 그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고영우의 공황장애 발작이 17세에 처음 나타났다는 사실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늑대 인간(Wolf Man)’을 떠오르게 한다. 이 연구서는 러시아 귀족 청년 세르게이의 강박 신경증이 5세 유아기의 기억(꿈)과 연관되어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일종의 임상관찰(臨床觀察) 기록이다. 이 연구서가 지식사회에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진정한 해석은 부재하는 것으로부터 생성’ 되며 그것은 ‘결여와 환상으로부터 온다’는 선언적 주장이 프로이트를 계승한 라캉(Jacques Lacan)에 의해 제시되면서였다. 언어적 해석은 언제나 오류를 포함하며, 진실의 부재 위에 세워진 현실(상징계)은 더욱 성숙한 주제를 탄생시키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 우리가 모른다고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알지 못하는 원인이 결여와 환상으로부터 온 것이든 무의식 세계로부터 온 것이든 간에 우리 앞에 현존(現存)하는 명백한 결과로 인해 의미를 지닌 것이 되었다. 고영우의 경우 그에게 주어진 명백한 결과가 바로 공황장애 강박증이라 할 것이다. 부재의 기억 속에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마주하며 삶을 사랑하고 그림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며 자유와 창조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결과가 원인에 영향을 끼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라캉의 ‘사후성(事後性)’ 개념은 고영우의 작품 해석에 유의미한 도구라 할 수 있다.  

III. 종지기 화가 고영우의 내면에는 두 개의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서귀포와 종탑이 그것이다. 전자가 삶을 살아가는 기억과 안식의 내향적 공간이라면, 후자는 세상 밖 미지로 열려있는 외향적 공간이다. 안과 밖이라는 심리적 공간의 연기(緣起) 작용에 대한 이해는 화가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데 하나의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영우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종탑에서 종을 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화가는 무의식으로부터 빠져나온 감각의 파장을 캔버스 위로 토해 내듯 표출한다. 이 때 파장이란 억압된 심리적 공간의 울림을 말한다. 역설적이지만 그가 전업화가로서 오로지 그림에 몰두할 수 있었던 배경은 공황장애라는 심리적 강박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코 순조롭지만은 않았을 서귀포의 인생노정에서 그가 구가하며 찾은 것은 이른바 미지를 향한 실존적 자유의 삶이었다. 작가노트를 통해 밝히고 있듯이 고영우는 ‘장엄하고 성스럽고 경이로운 세계’를 꿈꾼다. 생의 대부분을 서귀포라는 제한된 공간에 머물고 있지만 그가 살아내야 하는 삶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실행해야 하는 창조적 삶이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적 삶을 실천하기 위해 그가 평생을 몰입해 온 것이 이른바 그림이었다. 


너의 어두움, 캔버스에 유채, 95x128cm, 2014



고영우가 화업을 시작한 이래 천착(穿鑿)해 온 주제는 인물이다. 신체의 디테일을 생략해 단순한 선묘 실루엣으로 처리하거나 아니면 얼굴과 손의 형상을 크게 강조해 화폭으로 옮겨놓은 것들이다. 이른바 그가 그려내는 인물상은 정형화된 규범을 벗어난 작가의 자유로운 의지를 반영하며, 그 대가로서 치루어야 할 실존적 고독과 불안의 심리를 동시에 드러낸다. 짙은 밤안개 속에서 자신의 주변만을 비추며 서있는 가로등의 불빛처럼 그의 공간은 제한되어 있고 그 영역에 머물고 있는 자화상은 고개를 숙인 채 어둠을 주시하고 있다. 드로잉을 포함한 작가의 그림에는 인물뿐만 아니라 나뭇잎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심리적 대리물이자 생명 현상의 기호처럼 제시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나뭇잎 형태가 자리 잡은 바탕을 배경이 아닌 선적 공간으로 전치(轉置)시키고 그 공간 속에 고립된 인물상을 배치시키는 조형 방식이다. 그가 사용하는 이 특이한 조형 방식은 인간의 정신 현상을 의식의 전체적 구조나 특질로 파악하는 형태심리학(形態心理學)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고영우의 경우 주제와 배경 사이의 시각적 모호성은 무한한 자유와 필연적 불안이라는 이중적 조건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알레고리적 장치로 다가온다.  

고영우는 1976년 2회 개인전에서부터 크레파스를 재료의 하나로 선택해 왔다. 검은 켄트지나 장지(壯紙)에 프러시안 블루 계열의 색채로 표현된 인체는 몸에 대한 작가의 해부학적 지식과 그 표상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크레파스 그림 말기 작품으로 보이는 2006년의 <너의 어두움>에서 간결한 선들은 인물의 실루엣을 따라 무심히 그어져 있지만 인물의 다양한 몸짓과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아울러 화면의 바탕에 겹겹이 올린 크레파스의 물성을 나이프로 눌러 특수한 표면효과를 연출해 내는 기법은 작가가 일구어 낸 독자적인 조형적 성취라 할 수 있다. 2000년을 전후로 시작되는 ‘서있는 인물 군상 시리즈’에서 인체의 단순화는 한층 심화된다. 군중 이미지를 통한 집단적 심리의 긴장감, 고개를 숙인 모습에서 연출되는 상실감, 손과 발을 생략함으로써 얻어지는 거세감의 표상 방식은 고독과 불안의 서정을 드러내는 작가의 창조적 조형능력을 보여주는 요소들이다. 고영우의 그림은 인물을 주 소재로 삼고 있음에도 문학적 내러티브의 도입을 배제함으로써 현상적 실존의 세계를 나타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표현적인 터치를 기조로 삼아 인물 형상의 해체를 시도하는 한편, 프러시안 블루를 넘어 블랙(Black)이 지배하는 절대(絶對)의 세계를 모색하고 있다.    
               
IV. 화가 고영우는 블루 계열의 단일 초상이나 군상 이미지를 통해 인간이 지닌 불안과 고뇌 그리고 절망의 세계를 탐구하며 실존적 세계를 표상해 온 작가로 소개된다.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 ‘흔들리는 존재’, ‘너의 어두움’, ‘잃어버린 이름’ 따위의 제명을 붙여 놓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에게는 ‘존재의 고독을 그린 화가’ 혹은 ‘실존의 고뇌와 허무를 그리는 화가’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 다닌다.  고영우의 예술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천착해 온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문제란 자유 의지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향한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이자, 불안과 고뇌의 삶이라는 실존주의 사상의 인식 위에 세워져 있다. 그것은 작가 개인의 고통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점차 개인의 차원을 넘어 집단적 무의식의 차원으로 확대되어 왔다. ‘너의 어두움’ 시리즈는 그가 들려주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고영우의 예술세계에는 불안과 고뇌가 파생시킨 안식과 건강함이 있다. 흔들리는 존재의 어두움의 뒷면에 거칠게 숨 쉬는 자유와 생명의 건강함이다. 역설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상황의 전치 효과는 예술이 가진 신비이기도 하지만 예술가에게 부여된 하나의 특권이기도 하다. 종지기 화가 고영우의 푸른 초상은 개인의 심리적 강박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종탑에서 울리는 만종의 종소리처럼 일상에 대한 감사의 표상이자 자유와 생명에 대한 예찬의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영우 개인전 도록 서문, 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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