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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리석 화백의 삶과 예술

김영호

장리석 화백의 삶과 예술

김영호(중앙대교수, 미술사)

I. 생애  
장리석은 1916년 4월 8일(음력) 평양시 신창리에서 치과의사인 부친 장수현씨와 모친 안인화씨 슬하의 3남중 막내로 태어났다. 소학교 즈음에 부모를 모두 여의어 일찍이 두 형과 함께 외갓집에서 자랐다. 소년 장리석이 미술세계에 입문하게 된 것은 4살 위인 큰형 장원석의 뒤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면서였다 한다. 다마가와(多摩川) 제국미술학교를 1939년에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2006년 여름에 가졌던 필자와의 대담에 따르면 자신의 학력은 사실이 아니고 독학한 화가임을 밝히고 있다.  
장리석이 화가로서 공식 데뷔한 것은 1942년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처음으로 입선하면서였다. 출품작은 밥상과 과일 등을 소재로 한 30호 크기의 <정물>이었다. 그는 연이어 제22회 선전에 여인좌상인 <K양>, 그리고 1944년 제23회 공모에서는 <아궁>과 <벽> 두 점이 동시에 입선하여 평양매일신문에 특별한 찬사를 받았다. 당시 장리석이 사용한 일본 이름은 다카하시 미츠오(高橋 三男)였다. 한편 이 시절 장리석은 최영림, 황유엽, 박수근과 더불어 ‘주호(珠壺)’라는 이름의 미술단체를 만들었다. 평양에 거주하던 미술감정사이자 판화가였던 일본인 오노 타다치(尾上忠治)를 중심으로 결성된 그룹이었고 해방이 되어 해체되기 까지 4-5년 동안 ‘주호전’이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1945년 8월,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은 북한의 미술인들은 곧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좌익 세력의 휘장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인생노정을 굴절시킬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1950년 6월, 개전 직후 평양미술동맹에 소속되어 있던 장리석은 금강산 신축호텔의 벽화제작을 위해 평양을 떠난 것이다. 당시 벽화제작에는 평양미술학교 교수였던 유석준 의 지휘아래 최영림, 한묵, 김민구 등이 함께 참가하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때마침 인천상륙작전 과 더불어 북진한 한미 연합군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은 화가로서 자신의 운명을 새롭게 개척하기 위한 일종의 선택이었다. 압록강까지 북진했던 국군이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되었고, 퇴각하는 국군 트럭에 몸을 실어 원산에 도착하게 된다. 장리석은 평양에서 알게 된 이중섭의 집을 찾아가 10여 일 동안 머물며 원산에 상륙했던 국군 해군부대 정훈실에 최영림과 함께 지원하여 군속화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 후퇴하는 해군함에 몸을 실어 부산을 거쳐 제주도에 정착하게 된다. 작가에 따르면 절해고도 제주는 자신의 삶을 새로 탄생시킨 ‘제2의 고향’이 되었고 이곳에서 마주친 해녀들과 조랑말은 후일 작가에게 창작의 원천이 되었다.  
당시 제주도에는 최영림, 홍종명, 이중섭, 이대원, 최덕휴, 구대일, 옥파일 등을 비롯하여 1952년 입도해 도경찰 정훈관으로 근무하던 김창렬도 있었는데 이들 피난민 화가들은 6개월에서 4년간 지내면서 제주화단의 형성에 기여했다. 1954년이 되면 오현중고등학교 주최 제1회 전도학생예술제가 열리고 1955년이 되면 제주도미술협회가 창립되었다. 20세기 중반 뉴욕화단이 유럽의 전쟁을 피해 온 화가들에 의해 형성되었던 것처럼 제주 근대미술의 태동기에 피난민 화가들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장리석은 입도 당시 군속화가의 신분이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해군 정훈실이 해산되면서 일반 피난민의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림을 배운 덕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다. 제사용 초상화를 비롯하여 절간의 벽화와 불상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른바 “극장 간판과 잡지 삽화를 제외하고 화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하며 지냈다. 황해도 출신으로 제주에서 만난 피난민 여성 이소애와 재혼도 하였다.   
장리석 부부는 전쟁이 끝난 1954년 3월 서울로 이주하여 보광동에 정착하게 된다. 어지러운 시국에 화가로서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화가의 공식 등용문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수상하는 일이었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상경한 이듬해인 1955년, 장리석은 국전에 <조롱과 노인>을 출품하여 특선을 수상하고, 이듬해인 1956년에도 연이어 특선을 받음으로서 화단에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1958년 제7회 국전에서 <그늘의 노인>으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게 됨으로서 일약 한국화단의 정점에 오르게 된다. 당시 장리석의 나이는 42세였다.  
장리석은 서라벌 예술대학의 강단에 1960년부터 서게 되었다. 당시 박득순, 변시지, 최영림, 변관식 등이 출강하고 있었다. 서라벌 예술대학은 1953년에 문예창작과, 연극영화과, 음악과를 둔 초급대학으로 개교하여 1956년 미술과를 창설하였으며 1964년 4년제 예술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장리석은 1971년부터 대우교수를 거쳐 1973년에는 서라벌 예술대학을 병합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의 전임교수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1981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교육자로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대학의 교수로서 장리석은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중 으뜸은 실기 시간에 붓을 들어 제작 시범을 보이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이다. 고등학교의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고 올라온 학생들의 세밀한 그림은 뭉툭뭉툭한 붓터치와 강렬한 색채에 의해 여지없이 주인이 바뀌고 말았고 붓을 돌려받은 학생이 다시 손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표현주의적 작품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화법과 화론을 열성을 다해 지도했던 것이다. 비단 실기실에서 뿐만 아니라 장리석은 모든 모임에서 주도적이었다. 외모가 미남형은 아니지만 납작한 코와 그 아래에 달린 히틀러형 콧수염을 움직이며 목청을 한 옥타브 높여 재담을 할 때면 주변에는 벌써 신파극의 관객처럼 신이 났다. 이러한 성품은 항상 말이 없고 조용한 미소로 일관했던 친구 최영림과는 대조적이었다. 장리석의 위트와 재치 그리고 만담은 천성이기도 했으나 그의 내면에는 불안과 의심 그리고 고독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감정은 가족과의 이별과 월남 화가로서 고난 했던 삶에 기인한 것으로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세월이 다시 흐르고 2005년 6월 장리석은 제주도와 협약을 체결하고 자신의 작품 110점을 제주도에 기증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제주도립미술관 내부에 장리석기념관을 마련해 화백의 대표작들이 제주도에 영구히 둥지를 틀게 되었다. 한편으로 향후 현양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장리석미술문화재단 설립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인을 알 수 없는 돌연한 변심과 가족 상황으로 이 사업은 중단되었다. 급기야 2009년 6월 제주도립미술관 개관식에서 자신의 기념관이 ‘규모가 작고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는 점’을 내세우며 불만을 토로했고 이후 작품 반환소송을 내어 패소하면서 주변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된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 지속되는 가운데 2019년 3월 5일 향년 103세로 별세하였다.    

II. 작품세계 
월남 화가로서 화단에 데뷔한 195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르는 50년간의 시기에 제작된 장리석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구수함과 뭉클한 정감을 쏟아놓는 타이프의 작가” 혹은 “서민의 애환을 쫓는 시대적 증인” 등으로 정리된다. 
그의 작품소재를 시대별로 분류해 보면 초기 1950년대 중반 이후의 그림은 노인과 마부가 중심이 된 서민들의 일상을 담고 있다. 1958년 국전의 대통령상으로 화단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1960년대는 일상풍경과 더불어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고속도로 건설 등의 국토 재건사업과 연계된 노동현장과 종자소를 키우는 목장풍경이 새롭게 나타나는 점이 이채롭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제주의 해변풍경과 해녀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하는 한편 석화(石花)가 핀 바위로 덮힌 계곡 풍경이나 향토색 짙은 설경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소재 선택은 1980년대와 그 이후의 그림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특히 해녀들은 작가에게 창조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서 그 건강하고 원초적 생명성이 깃든 모습은 작가의 트레드 마크가 되었다. 
장리석의 작품에 나타나는 표현기법을 시대별로 분류해 보면 노인과 마부가 주를 이루는 1950년대 중반 이후의 인물화에는 녹갈색이 주를 이루는 화면에 백색의 뭉툭한 터치의 붓자국을 사용해 빛에 의한 명암대비 효과를 강화시킴으로서 인상파적 경향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국전에 대통령상을 받은 <그늘의 노인>과 이 작품과 더불어 대통령상 후보에 올랐던 <복덕방 노인>, 그리고 새장을 앞에 두고 실내에 앉아있는 <조롱과 노인>에서는 배경과 인물 사이에 강한 빛의 대비효과가 강조되어 있어 여름날 쏟아지는 정오의 햇살을 느끼게 한다. 공원 벤치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 졸고 있는 무심한 노인의 표정이나 오른팔에 끼고 있는 낯선 우산은 작가의 예술세계에 잘 절여진 풍자와 해학 그리고 여유를 엿보게 하는 대목들이다.   
1960년대로 들어오면서 소개되는 일상적 풍경들은 서사성이 강조되는 구성과 더불어 연극적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 특히 둔탁한 사각의 나무 식탁 위에 프라이팬과 기름병 등의 정물을 중심으로 하여 명태와 함께 배치시킨 <찬방>(1965)이나, 말이 있는 마구간을 배경으로 펌프가 있는 마당에 아이를 안고 서있는 여인을 그린 <막동이>(1965), 그리고 가오리 등의 어물이 널려있는 대청마루 건너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는 어촌 여인을 그린 <오수(午睡)>(1969)와 같은 작품은 구도의 완결성 뿐만 아니라 서사성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한편 <건설>(1960)이나 <경부고속도로>(1969) 등의 국가 건설사업에 초점을 맞추어 현장에서 노동하는 인부들을 표현한 경우나 공공 목축산업을 장려하기 위한 종자소들을 방목하는 현장을 그린 <5월의 목장>(1969)은 시국정황을 나타내는 그림들로서 당시 화단의 주류 화가들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와 연관된 한시적 경향이었다.  
1970년대로 접어들어 나타나는 기법상의 변화는 자연의 신비한 풍광을 녹색과 백색을 근간으로 하여 차분한 터치가 주를 이룬다. 이전의 그림에서 보이는 명암의 강렬한 대비효과에서 오는 표현적 화면을 대신하여 신비하고 온화한 서정성이 한층 강조되는데 이러한 태도는 작가로 하여금 남국의 풍경에 천착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화풍의 변화와 때를 같이하여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가 이른바 제주의 해변풍경과 해녀 그리고 향토색 짙은 설경이나 석화가 핀 바위로 덮힌 계곡 풍경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업의 하나인 <남국의 봄>(1972)은 제주의 해변을 그린 것으로 소라나 고동 등의 조개더미가 화면의 중앙에 있는 바위 아래로 은닉되어 있는 수작이다. 같은 시기에 제작된 해녀 그림은 바다를 배경으로 휴식을 취하거나 몸을 다듬는 여인 습작이 종이에 오일 파스텔로 그려져 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지속되는 남해의 여인 연작들을 보면 강인하고 원초적인 생명성을 지닌 여성들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비단 제주도 해녀에서 받은 인상을 표현해 낸 것이지만 특정 인물의 초상이라기보다 화가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여인상을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장리석이 오랜 기간에 걸쳐 수많은 연작을 남긴 <차돌 어멍>은 실존인물이 아닌 모델을 이용한 상상의 인물이었다. 한편 설경 역시 1980년대 이후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선호하는 주제가 된다. 자신이 거주하는 동네를 그린 <보광동 설경>(1980)에서부터 산자락을 휘감아 도는 구름과 검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다도의 설경>(1981)과 팽나무 아래로 강아지와 더불어 길을 재촉하는 아낙을 그린 <분이네 외가촌>(1984)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석화 바위 위에 쌓인 눈을 그린 <계곡의 초설>(1986)과 한라산을 배경을 이국적 정취를 드러내는 <제주의 서설(瑞雪)>(1992) 등은 설경 시리즈로서 주옥같은 작업들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상의 단순화는 강화되면서 전체적으로는 완숙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제주의 봄>(1992)은 소품이면서도 이 시기의 대표적 작업이다. 당시 장리석은 인도와 몇몇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오는데 그림 속에 자화상이 나타나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인도 사원에서의 나>(1990)는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인화한 종이위에 파스텔을 덧칠한 것이고 <백두산 관참>(1990)은 말 그대로 백두산을 둘러본 소감을 그린 대작인데 현지 풍경을 스케치 하는 작가 자신이 화면에 자리 잡고 있다. <해녀와 자화상>(1992) 역시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이 일구어온 남국의 풍경을 안에 자신의 모습을 등장시킨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자화상들은 70대 중반에 접어든 노년기의 작가가 자신에 대한 성찰의 결과로 해석된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작업량이 현격히 줄어드는데, 몇 되지 않는 작품의 특징은 색감이 전체적으로 핑크빛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동지날 아침>(2001)은 마치 진달래처럼 연분홍  빛을 띤 사물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밝은 색을 선호하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노안에 따른 시력의 저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연의 청조한 색상에서 느껴지는 건강과 생동감에 대한 관심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장리석의 예술에 대한 평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구수함과 뭉클한 정감을 쏟아놓는 타이프의 작가” 혹은 “서민의 애환을 쫓는 시대적 증인”으로 요약된다. 덧붙이자면 그의 작품에 흐르는 정서는 “투박한 서민적 의식의 건강성”과 “해학과 재치 그리고 낙천성” 등으로 정리된다. 어려운 시국에서도 진실에 찬 생을 살아가는 시골 노인에 대한 연민과 어시장이나 해변의 여인군상을 통해 서민의 강인한 의지와 감동적으로 표현해 냄으로서 한 시대를 사는 인간의 삶을 치열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리석의 작품에 나타나는 서민의 이미지는 뚝배기와 같은 투박함과 원초적 건강성으로 표현된다. 이는 작가가 천성적으로 타고난 낙천적 기질의 결과이자 고난한 삶 속에서도 여유를 통해 삶을 관조하는 의도적 태도의 결과라 할 것이다. 
한편 장리석의 작품에 나타나는 ‘향수’의 정체에 대해서도 언급해야만 하겠다. 실향민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작품에 흐르는 서정을 어둡고 비통하며 고독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향수란 개인적 경험으로서 특정 공간에 대한 기억과 귀소의 욕망이기 보다 근원적으로 인간의 영혼이 쉴 영원한 안식처에 대한 회귀의 본능이라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의 말 연작에서 보이는 말의 무리들은 정겨운 가족의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말은 때로 작가 자신의 분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이러한 그의 작품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특정 개인의 심리적 차원을 넘어 보편적 그리움의 서정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 제주도립미술관 소식지, 널른팡 9호, 2019)

- 이 글은 2004년 대전시립미술관의 개인전 서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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