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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 속에 채워진 울림 – 강승희의 사유적 풍경

김영호

비움 속에 채워진 울림 – 강승희의 사유적 풍경

김영호(중앙대교수, 미술사)

화가로 출발해 판화가로 화단에 입지를 굳힌 강승희가 다시 화가의 길로 돌아와 붓을 들었다. 환갑을 앞둔 그가 인생 노정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시작하는 행보라 심기가 비장해 보인다. 5년 여 기간 동안 본격적으로 실험을 계속해 왔다고 강조하는 것을 보니 변화에 대한 심리적 부담도 남다른 것 같다. 회화와 판화 사이의 기법 차이는 크지만 특별히 하나의 장르만을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조각가의 드로잉 작업에서 작가의 심화된 조형 세계를 발견할 수 있듯이 매체를 다양하게 소화하는 것은 오히려 작가의 능력에 속한다. 상보적인 조형실험을 통해 독자적인 언어를 창출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변화 속의 일관성이다.    

강승희가 30년 넘게 일구어 온 판화 세계는 ‘여백의 울림’이라 할 것이다. 절제된 화면에서 느껴지는 심리적 파동은 대체로 시정과 여운을 양성하는 여백의 운용에서 온 것이다. 마당에 서있는 야자수 잎새 위로 떨어지는 소나기 빗방울처럼 미세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이 그의 판화 작품이다. 여기에다 덧붙이자면 ‘새벽’이라는 시간대는 그의 작품 해석에 중요한 요인이되었다. 세상의 생명들이 단잠에서 깨어나는 시각, 도시의 기운이 피어나는 여명의 시각이다. 강승희의 판화가 만들어 내는 여백의 파동과 새벽의 서정은 화면 위를 긁고 지나는 니들의 선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선묘가 아쿠아틴트 부식동판의 기법을 거쳐 다이아몬드 블랙으로 명명한 무광의 검정색 잉크로 펼쳐지면서 그의 판화 경향은 하나의 결실을 거두었다. 

강승희는 이번 개인전에서 판화시대 이후의 회화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 5년 여 기간 동안 판화의 세계를 회화의 영역으로 전사하며 만들어 낸 신작들이다. 일견, 변한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사연은 그의 작업에 ‘여백의 울림’과 ‘새벽의 시간’ 그리고 ‘블랙의 조형세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 더 살펴보면 큰 변화가 발견된다. 계산된 판화의 프로세스를 회화의 우연적 갈필로 대체시키며 얻어낸 효과다. 붓의 선묘는 절제 속에서도 자유로움을 구가하며 그 결과, 화면은 미완의 정감으로 채워져 있다. 화면에 동양적 선묘의 기운이 한층 강화된 화면을 세우는데 5년의 세월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자유로운 필치 속에 스며있는 질서는 판화의 세계로부터 얻어낸 경험의 결실일 것이다. 

강승희의 회화 신작에는 또 다른 파격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다. 도심의 거리에 서서 바라보던 빌딩과 자동차 그리고 간판들은 사라지고 하늘에서 내려다 본 광대한 풍경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신작 풍경에는 남산이 내려다보이고 그 아래로 펼쳐진 강남의 아파트 단지와 한강변의 파노라마가 강승희가 새롭게 도입한 낸 거시적 풍경이다. 그의 시선이 도심의 것들과 강, 나무, 새, 물소리, 바람소리를 떠나고 있음은 나로선 아쉬운 대목이다. 
(출처: 월간미술, 2019.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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