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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기억 – 신형상 조각의 모험

김영호

몸의 기억 – 신형상 조각의 모험


김영호 /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예술감독

I. 서언  

정관 김복진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1920년을 기점으로 하면 한국 근현대조각의 역사는 100년을 앞두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에 이룩한 외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근현대 조각의 가치를 가늠하는 계보와 경향 등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회화 분야에 비해 조각 분야에 대한 이렇다 할 전문 비평서나 역사서를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은 이를 대변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조각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이유는 오백년을 유지해온 조선왕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이 찬란한 전통적 불상조각의 맥을 끊어 놓은 탓으로 돌리는 것이 학계의 변명이다. 20세기에 들어와 동경미술학교 유학생들을 통해 서구 근대조각이 유입되었을 때에도 일제식민지라는 시공의 조건에서 역사적 주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란 요원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글에서 이러한 논의에 대해 시비를 가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조각 100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그간의 조각사를 되돌아보고 그 성과를 정립하는 일은 어느 상황을 막론하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당면 과제라 할 것이다.
  
양식사적 맥락에서 20세기 이래 전개되어 온 한국 근현대조각의 흐름은 크게 다음의 네 가지 영역으로 분류될 수 있다. ①구상조각, ②비구상(추상)조각, ③오브제·설치, ④신형상조각이 그것이다. 우선, 구상조각은 1920년대에서 195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형성된 인체 중심의 경향으로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유입되었고 그 영향권의 후배들에 의해 유지되어 온 양식이다. 둘째, 비구상(추상)조각은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일련의 작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경향으로, 인체나 새 따위를 모티프로 하는 비구상적 경향의 추상에서부터 조형 형식과 재료의 물성에 주목하는 순수추상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을 아우르고 있다. 셋째, 오브제·설치는 197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실험적 경향으로 종래의 조각 개념 자체에 대한 검증과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사물의 존재 양태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과 그것이 놓이는 장소 혹은 공간과의 관계성에 주목하면서 기존의 조각 개념을 확장시켰다. 마지막으로 넷째, 신형상조각은 197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경향으로 새로운 형상성에 주목하는 조각의 다양한 줄기를 아우른다. 신형상조각이란 전통적 구상조각 뿐만 아니라 조형의 형식과 물성 자체에 주목했던 모더니즘을 모두 극복하고 학제간 융합 속에서 실재와 환영의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영역의 형상을 함께 포괄하고 있다. 이상의 네 영역은 지난 2019년 6월 1일에서 8월 28일까지 개최된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개관기념전 <한국 현대조각의 단면>에서 네 개의 섹션 명칭으로 다루어진바 있다. 

이번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 마련한 <몸의 기억>전은 한국 근현대조각의 다양한 영역 중에 신형상조각에 초점을 두고 기획되었다. 개관기념전에서 제시된 네 개의 섹션 중 하나인 신형상조각을 미시적 시각에서 좀 더 심도 있게 조명해 보려는 시도다. 신체를 소재로 삼아 자신의 예술세계를 심도있게 구축해온 세 명의 중견화가로서 이환권, 안재홍, 그리고 천성명의 대표작들이 이번 <몸의 기억>전에 소개된다. 

II. 몸의 계보학

몸은 미술의 기원 이래 동서의 수많은 조각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다루어져 왔다.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신상조각이나 고대 인도의 불상조각에서 볼 수 있듯이 몸은 당대의 사상이나 사회상을 담아내는 그릇이었다. 중세에 접어 들면 몸은 절대와 초월의 세계를 표상하기 위한 도상이 되었고, 르네상스에 이르러 몸은 자연과학과 인본주의 사상을 나타내는 만물의 척도가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추상미술이 탄생했을 때에도 몸이 미술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추상은 구상을 전제로 한 개념이었다. 신체를 대상화하고 부재의 형상으로서 대체된 추상의 사례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불리는 성체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Ad 라인하르트의 <블랙 페인팅>이나 바넷 뉴먼의 <십자가의 길> 같은 작품 시리즈는 부재하는 신체를 탈형상적 언어로 표현한 모던 아트의 결실이라 볼 수 있다. 몸의 형상을 소외시킨 모더니즘 미술의 생명은 길지 않았고 스스로 종식을 선언했다.
포스트모던 아트 혹은 현대미술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는 1960년대 이후 몸은 은유와 상징과 알레고리 등의 기법에 의해 새롭게 다루어지고 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신구상주의 회화(Nouvelle Figuration)과 그를 잇는 자유구상(Figuration Libre)은 국제적 경향으로 확대되었다. 독일 신표현주의(Neo Expressionism) 그리고 이태리의 트랜스아방가르드(Trens Avant Garde)와 미국의 배드 페인팅(Bad Painting) 등의 미술운동은 몸을 통해 사회적 불안과 소외 그리고 부조리한 삶을 폭로하고 있다. 한편, 여성주의에서 퀴어이론(Queer theory)에 이르는 확장된 몸의 담론은 과거의 보편적 가치와 역사적 연구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시하고 탈역사 시대로의 진입을 선언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불리우는 21세기에 들어와 인체는 인공지능과 로보테크놀로지의 시대상을 나타내는 키워드로 인식되고 있다. 포스트휴먼이나 트랜스휴먼 따위의 주제는 미술계에서도 더 이상 낯설지 않게 사용된다. 인간의 몸은 이렇듯 미술의 기원 이래로 각시대를 관통해 온 사상의 물결과 보조를 함께하며 예술의 영원한 소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 조각사에서도 몸을 향한 시선과 조형 방식은 변화를 거듭해 왔다. 개항기와 더불어 시작된 근대조각의 형성과 정착의 과정에서 구미의 영향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식된 문화에 대한 반성과 극복의 과정을 통해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 유학생들을 통해 유입된 구상조각에 있어 몸은 재현의 기술을 익히고 인체의 조형미를 탐구하기 위한 소재였다. 윤승욱의 <피리부는 소녀>나 김경승의 <소년입상>은 서구의 고전주의적 인체 표상기법, 즉 ‘균형 잡힌 좌우 비대칭의 입상 포즈’인 콘트랍포스토(contrapposto) 기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김복진의 <소년>이나 권진규의 <나부>에서는 고전주의를 넘어 대상의 리얼리티와 재료의 물성을 표현하는데 관심을 돌리고 있어 시대상을 드러내는 근대조각의 독자적인 출현을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대 후반에 시작된 비구상(추상) 조각은 인체와 새 등을 모티브로 삼아 그것을 조형언어로 변주하며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헨리 무어나 콘스탄틴 브랑쿠지의 영향이 나타나는 이 시기의 조각은 구상과 추상 논쟁을 야기시켰다. 이러한 논쟁은 서구 화단에서도 격렬하게 대두되어 온 바이므로 당연한 현상이었으나 추상의 개념을 동양미술의 맥락에서 다루면서 논점이 확장되었다. 어찌되었든 비구상과 추상이라는 용어는 화단의 조직과 공모전 운영 편의에 따라 혼용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상황은 지속되고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유럽에서 들여온 앵포르멜 미술의 비정형적 표현기법은 추상과 구상의 논쟁을 떠나 조각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게 되었다. 이른바 앵포르멜 미술은 표현 대상의 리얼리티와 재료의 물성에 대한 조형실험을 가속화 시켰고 이때 새로 등장한 용접기술이 가세로 조형실험은 절정에 달했으며 이후 설치와 오브제의 길로 이동을 재촉하게 된다.
1970년대, 오브제·설치의 시대로 들어와 신체는 실존적 존재물의 하나로서 돌이나 나뭇가지 그리고 종이와 철판 따위의 사물과 다르지 않은 통합적 인식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퍼포먼스와 해프닝 등의 행위미술의 등장으로 신체는 붓과 동일한 조형 활동의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신체가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연기론(緣起論)의 세계를 떠오르게 한다. 1970년대 후반에 불어 닥친 동양사상과 불교철학은 당대의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신체개념에 대한 반성적 태도를 제공하는 배경이 되었다. 행위미술가 이건용의 <신체 드로잉>이나 백남준의 <TV 부처>는 이 시기를 대변하는 다양한 실험적 작품의 한 예로 들 수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신형상조각은 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통로를 제공해 주었다. 당시에 등장한 신문사 주최의 공모전들은 저마다 새로운 형상성을 앞세우며 미술의 향방을 신형상으로 이끄는데 기여했다. 신형상 미술은 이미 국제적으로 파급되던 새로운 기류였으며 국내 일부 미술관의 전시를 통해 국내의 청년세대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제 인간의 몸은 사회, 정치, 역사, 종교, 일상, 폭력에 이르는 무한 주제들을 담아내는 기호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여성주의자들에 있어 몸은 인권운동의 기표였고, 민중미술 작가들에게 채택된 몸은 삶과 현실에 대한 발언의 도구가 되었다. 당대의 조각가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지구촌 시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늘 한국의 신형상 조각가들은 모더니즘 미술의 이성과 합리의 규범을 넘어선 열린 의식과 조형 형식을 실험하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몸의 기억>전에 소개되고 있는 세 명의 작가들이 신체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 조형적 표현 방식은 삼인 삼색이다. 이들의 작품에서 수렴되는 공통분모가 있다면 신체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하나의 기준으로 진단할 수 없지만 이들의 작품세계를 신형상조각이라는 범주 안에서 살펴보고 계보와 경향으로 묶어내는 일은 우리의 시대정신이나 미의식을 찾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III. 이환권 – 변형된 신체 

이환권의 작품 앞에 선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길쭉하거나 납작하게 변형된 신체다. 작품 속 인물은 대부분 작가의 지인이거나 작가 주변에서 찾은 사람들이라 한다. 말쑥한 교복 차림에 책가방을 매고 마스크를 착용한 여중생은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인물이다. 기저귀를 차고 의자에 몸을 기대 선 채 장난감 공을 뚫어지게 주시하는 젖먹이도 친숙한 가족의 모습이다. 카메룬에서 귀화한 흑인 권투선수를 소재로 삼은 <난민복서>나, 이탈리아 출신이자 무료급식소를 운영하는 백인 신부를 형상화 한 <영웅>은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색다르지만 이주민이나 성직자 등 우리 시대를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인물들이다.    
이환권의 선택한 인물은 평범하지만 형상의 변형을 통해 그 평범함을 낯선 차원으로 단숨에 전치시킨다. 인물이 상하 혹은 좌우로 찌그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실재감(Reality)이 확연히 느껴지는 그 이유는 작가가 채택한 신체의 변형 방식에 엄격한 수학적 비율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그의 작품 앞에서 허상과 실재 사이의 대척점을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실험적 조형방식은 신체를 단지 길쭉하거나 납작하게 변형시키는 수준에서 머물지 않는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인체 시리즈인 <물웅덩이(A Puddle)>는 수면에 비친 여성의 신체 이미지를 3차원의 볼륨으로 재현해 낸 것이다. 작품을 내려다보는 관객은 허상과 실재 사이의 시각적 교란을 넘어 중력과 무중력 사이의 간극에 서 있는 것 같은 심리적 혼란을 느끼게 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변형의 실험은 앞으로 더 심화될 것이라 한다.      
인물의 형상을 변형해 표현하는 기법은 르네상스 이후 몇몇 작가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왜상기법(anomophosis)이라 불리는 조형 방식은 눈에 보이는 대상의 사실적 재현을 넘어 작품에 어떤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다. 가령 한스 홀바인의 대표작인 <대사들>의 화면 하단부에 비행접시처럼 길게 늘여 그려진 해골은 ‘권력과 영예의 바니타스 혹은 메멘토 모리’의 교훈을 암시하고 있다. 조각가 자코메티가 일구어 낸 철사같이 가늘고 길다란 인체조각은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얻은 부조리한 인간 존재를 암시적으로 표현한 경우다. 이환권의 신체 조각은 서사적 상황이나 메시지를 담아내려는 차원을 넘어 눈의 착시 현상을 유도하는 다양한 변형의 조형실험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 
이환권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두 개의 착각을 경험한다. 하나는 눈의 착각(trompe l’oeil)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의 착각(trompe l’esprit)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경험이다. 가령 전시장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규모의 <난민복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착시 이상의 것이다. 국내에 거주하는 이방인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아직도 차겁다. 피부색이 다른 흑인 난민에 대한 우리들의 시선은 가히 박해시대의 가해자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환권의 작품은 일상적 현실을 사는 우리들의 시선이 편견과 오만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환권은 자신의 작품이 가볍거나 희화적인 대상으로 읽히는 것을 거부한다. 그 자신이 특정 인물을 바라보고 그것을 작품으로 표상하는 태도는 진지하며 기실 그의 작업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에 관한 비판적 시각이 깃들어 있다.  

IV. 안재홍 – 유기적 신체 

안재홍의 신체는 다양한 굵기의 구리선이나 동파이프를 재료로 삼아 제작된 것이다. 구리나 동이 만들어 내는 선적 리듬은 용접 기법으로 연결된 파이프의 튼실한 마디의 골조와 어우러지며 신체 이미지에 어떤 기운을 산출해 낸다. 안재홍의 작품에서 유기적 신체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는 굵고 얇은 구리선이나 동파이프들이 몸 전체에 펼쳐진 혈관이거나 신경조직을 연상케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리듬은 결국 신체의 기관과 그 기관들의 순환작용에서 발생하는 생명의 에너지라 볼 수 있다. 작가는 작품에 <나를 본다>라는 제명을 달아 놓았다.        
작가가 바라보는 나는 누구인가? 작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그의 작품 앞에서 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물음으로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굳이 따져 묻자면 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관객을 향해 있다. 주체가 바뀌어 나로 전환된 관객들이 행하는 대답은 사색하는 나, 실존의 상황에 처해진 나의 모습이다. 그도 아니면 꿈을 꾸는 나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듯 안재홍의 작품은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에 대해 성찰할 것을 유도하고 있다. 거기에서 만나는 것은 재료의 물성과 선묘의 흐름이 어우러지며 피어나는 유기적 생명의 에너지라 볼 수 있다. 사색과 고독 혹은 꿈과 희망이 어우러지고 끊임없이 생겨나고 소멸하고 변화하는 생명의 에너지다. 
우리는 생명의 유기적 에너지라 할 때 흔히 자연 이미지와 연관을 시킨다. 몸과 자연물을 연계시켜 조형하는 것이다. 작가의 이러한 작업 태도는 다음과 같은 작가노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 

“작품에서 굵기가 다른 구리선은 아래로부터 상승하는 나무의 생명력을 힘차게 보여주며, 물질과 에너지 이동통로인 구리선이나 동파이프의 이미지는 생명의 이미지와 연결되는데, 그것은 해부학적으로는 혈관과 힘줄이 되고, 얽히고설킨 금속다발은 사람이나 나무, 숲의 이미지로 전이된다.”

안재홍의 작품은 인간에 대한 성찰이며 나아가 자연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점은 이전과 매우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은 생멸의 운명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로서 살아간다. 이것은 생명의 이치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서양의 격언인 ‘메멘토 모리’나 불교나 도가의 공이나 도의 가르침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텅 비어있는 존재로서 나와 사물에 대한 인식의 방법은 삶의 노정에 큰 길라잡이가 된다. 안재홍의 신체는 비어있는 존재로서 나를 보여준다. 그가 만들어 내는 몸은 생명과 생명의 유기적 에너지로 채워져 있으나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무상의 존재이며 텅 비어있는 무아의 존재로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V. 천성명 – 연극적 신체 

천성명은 이번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기획전에 <그림자를 삼키다>라는 제명의 시리즈 작업의 일부를 소개하고 있다. 2007년부터 시작되어 현재에도 진행 중인 이 시리즈에 대해 작가는 자신으로부터 생겨난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의 이야기라 설명한다. 이 말은 그의 작업은 내러티브 구조를 지닌 연극적 전개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자를 삼키다>는 일종의 총체극의 방식으로 진행되며 연출가로서 작가는 이 조각뿐만 아니라 회화, 사진, 음향 그리고 빛 등의 다양한 표현방식을 통해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풀어나간다. 작가는 작가노트를 통해 자신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 

“작업의 주요 등장인물은 주인공 ‘사내’와 안내자 역할의 ‘여자’ 그리고 방관자 ‘새’가 등장하고, 정오에서 시작하여 밤과 새벽을 지나 다시 정오에서 끝나는 하루 동안의 상징적 이야기를 표현한다.” 

<그림자를 삼키다>의 주인공 사내는 작품 시리즈의 트래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인물로 굵은 가로줄 무늬의 상의를 입고 서있는 민머리의 자소상이다. 허공을 향한 시선이나 핏발 선 눈 그리고 반쯤 벌린 입술은 불안정한 인물의 심리를 보여준다. 피부는 긁힌 상처로 얼룩져 있고 흐르다 말라버린 피는 어떤 사건의 정황을 암시하고 있다. 천성명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상은 때때로 두 인물로 표현된다. 그것은 샴쌍둥이의 모습으로 표현되거나 어린이의 모습이자 때로는 거대한 물고기의 형상으로 의인화 해서 제시되기도 한다. 이들은 무대의 주인공과 함께 연극적인 서사의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림자를 삼키다>에 등장하는 안내자 역할의 조연은 팔을 앞으로 내밀고 서있는 여인의 모습이다. 눈을 감고 서있는 여인의 손에는 노끈이 쥐어져 있으며 그 노끈은 전시장 공간을 가로질러 맞은편 벽으로 연결되어 있다. 2층 전망대에 선 관객은 저 멀리 서 있는 여인이 건네는 어떤 메시지를 실을 통해 교감한다. 그 중 몇몇은 실 전화기를 귀에 대던 어린시절의 놀이를 떠올릴 것이다.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은 관객들에게 전시장이라는 세상에서 피어나는 소리를 전해준다. 그 소리는 이 공간 곳곳에 스며 웅얼거리는 역사와 장소의 소리가 될 수도 있다.
천성명의 연극적 신체는 그것이 설치된 공간과 교감하며 거기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전해준다. 작가가 건네는 이야기는 폭력, 불안, 소외, 공허, 상실 따위의 현대적 주체들이 품고 사는 감정이자 타자, 소통, 관계, 교감, 연결, 공동체 따위의 현대적 삶을 지탱해 주는 가치들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의 모습은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서 있는 역설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가령 주인공 자소상이 껴안고 있는 거대한 물고기는 눈알이 없다.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는 생명체인 점을 들어 항상 깨어 있는 존재를 상징하고 있으나 작가는 눈을 제거함으로써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역설의 어법은 그의 샴쌍둥이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난다. 내가 또 다른 나의 몸에 칼을 들이대는 자기 위협 혹은 자해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던져 알리려는 역설의 행위 앞에서 관객은 우리시대의 초상을 본다.   
                 
VI. 결언  

이상에서 보듯 <몸의 기억>전에 소개되는 세 명의 조각가는 인간의 몸을 연구과제로 삼아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선과 조형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해 오고 있다. 이환권의 변형된 신체는 눈의 착시를 넘어 정신의 착각으로 읽혀지며 현대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인식의 태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안재홍의 유기적 신체는 자연물의 하나로서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혈관, 힘줄, 신경이 생명활동을 진작하는 에너지의 순환을 암시하면서 동시에 생멸변화하는 존재에 대한 성찰을 유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천성명의 연극적 신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시도하지만 결국 예술이라는 연극의 무대 혹은 공간에 올려 세움으로써 은유와 알레고리의 영역으로 보는 이들을 이끌고 있다. 
인간의 몸은 삶의 의미를 담아내는 기호들이다. 그 기호의 해석은 언제나 열린 구조로 작동한다. 우리가 몸의 새로운 해석과 조형을 따라 예술 세계를 여행할 수 있다면 우리 의식 앞에는 경이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현대에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양자물리학은 인간의 감각 작용이 몸을 이루는 원자의 작용이라 주장한다. 뇌과학의 발전으로 새롭게 등장한 신경미학 역시 쾌나 숭고 등의 미적 경험도 결국 신경계의 메커니즘으로 수렴된다. 몸을 둘러싼 해석이 전에 없는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볼 때 신체 조각의 미래는 여전히 열려있으며 몸은 미술의 영역을 확장시킬 미래의 자원으로 남아있다. 

(출처: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특별기획전 <몸의 기억> 전시도록 서문, 20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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