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그림 4> 경의선, 1905년 서울역-신의주역 개통
우:<그림 5> 경인선, 1900년 경성역(서대문역)-인천역 개통
서소문 밖 네거리의 역사에 관해 논할 때 그 역사성이란 열린 구조를 지닌다. 역사의 기술(記述)에는 다양한 주체와 시선들이 존재하며 따라서 객관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H. 카(Edward Hallett Carr)의 정의는 이러한 유기적 역사관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15) 객관적 사실로서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주관적 선택과 기술에 의해 정리된 것일 뿐이라는 새로운 역사관은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들의 사명’이라는 레오폴트 폰랑케(Leopold von Ranke)의 입장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카의 입장은 신역사주의의 사관을 대변하며 과거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사건과 그 기록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담론과 지식을 생산하는 역사가의 시선이라는점을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산출된 가치와 문제의식은 미래에 대한 전망과도 연관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것이다.
조선 후기는 변혁의 시대였다. 역사학자 고동환 교수는 17세기 후반의 조선은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인구가 증가하면서 변화하는 ‘중세적 지배체제의 동요와 해체’의 시기였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조선사회는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기초한 시장과 무역의 확대되고 사상적으로는 실학의 대두, 서학과 천주교의 유입과 확산, 동학이라는 신흥종교의 발생 등으로 그동안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했던 성리학적 사유가 점차 동요되기 시작했다.’16) 이러한 주장은 중세사회의 해체가 한양의 성저십리 지역을 대표하는 상업중심지의 하나였던 서소문 밖 지역에서 나타났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서소문 밖 시장은 근방에 자리 잡은 숭례문 밖의 칠패 시장과 더불어 도성 밖의 2대 시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서소문 밖 시장은 인가를 받은 시전보다 난전이 많았고 사기와 협잡 그리고 소매치기 등의 범죄가 일상화되는 곳이었다. 서소문 밖 지역에는 평민과 천민 그리고 양반이 섞여 살았고 지방에서 올라온 유민들로 집단으로 거주했다. 이른바 조선후기의 서소문 밖 지역은 신분과 권위의 공간으로서 한양과는 다른 역동적인 근대적 공간이었다. ‘서소문 밖 지역의 주도세력도 17세기에는 양반 사대부 계층이었지만, 18세기에는 점차 상인과 수공업자, 유민들로 변모하였다.’17)
중세적 지배 체제의 동요와 해체를 이끈 서소문 밖 지역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의 직업은 의원을 비롯해 상인과 수공업자 들이 많았고 이들은 중세적 질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조정은 이들을 체제 내에 순응시키고 반체제 세력으로 전화하는 것을 방지할 할 필요가 있었다.
좌: <그림 6> 김홍도, 씨름,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27x22.7cm, 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우: <그림 7> 김홍도, 무동,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27x22.7cm, 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공개사형은 새로운 질서를 희구하는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한 일종의 사회적 장치였다. 조선왕조의 지배질서와 그것을 부정하려는 민중의 힘이 충돌하는 역동적인 공간이 바로 서소문 밖이었다. 이상에서 보듯 서소문 밖의 장소성과 역사성은 저잣거리와 형장이라는 두 개의 범주로 축약된다. 장터와 순교의 역사는 조선왕조의 중세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와 민주화를 토대로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는 근대화의 역사로 해석될 수 있다.
Ⅲ. 발의와 갈등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건립 계획은 서소문 밖 지역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배경으로 시작되었다. 역사박물관 건립의 목표가 조선중기 이후의 사상사적 변천과정에서 생산된 유형과 무형의 유산들을 수집 해석하여 그것을 미래적 가치로 재생산 하는데 두고 있다면, 그 유산의 키워드는 바로 장터와 순교가 될 것이다. 이 근대적 유산의 키워드를 현대에 승계한다면 소통과 화합으로 대별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박물관은 소통과 화합의 시대에 지역공동체의 정체성을 충족시키고 구성원들의 결속감을 높이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급속한 경제성장에 동반되어온 물질적 풍요가 정신현상의 발전과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극악한 범죄와 사회적 분열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소통과 화합의 지식문화 기반시설로서 역사박물관은 이를 타개할 대안이 된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건립을 발의한 것은 2011년 7월, 당시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겸 총대리였던 염수정 추기경이었다. 가톨릭교계와 중구청이 만나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에 한계를 드러내던 ‘서소문근린공원’을 천주교 순교성지로 조성하는데 합의한 것이다. 같은 해 10월에는 한국교회사연구소가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위탁을 받아 한국천주교 문화유산 실태 및 활용방안 이라는 제명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12월에는 조선시대 한양도성 서소문과 천주교 박해라는 제하의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며 공원 및 박물관 건립을 둘러싼 학문적 검토를 심화 시켜 나갔다. 이후 국회의원 44명과 서울시의회 의원 61명이 순차적으로 서울시에 청원서를 제출했고 신자들이 이를 따랐다. 급기야 2013년 5월 서소문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 기본계획 연구 가 완료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가톨릭교계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13년 9월에는 서소문 성지가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로 선포되며 국가 순례지로 지정되었고, 2014년 8월에는 124위 순교자 시복을 위해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 서소문 성지에 들러 축복하였다. 2018년 9월에는 급기야 로마 교황청 승인 국제순례지로 선포되어 세계 공식 순례지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18)
서소문 밖 유적지를 순교성지로 가꾸려는 천주교회의 노력은 보다 일찍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1958년 윤형중 신부가 경향잡지 9월호에 ‘한국천주교순교자현양회가 새남터와 양화진 절두산을 입수했으니 다음 목표는 서소문 사거리에 순교기념관’이라는 취지의 글을 실었고, 1964년 최석우 신부는 서소문순교자 기념관 설립 취지문 을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19) 이러한 천주교회의 노력은 단계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아래 여의도광장에서 거행된 103위 순교성인 시성식을 기념하여 서소문근린공원 내에 순교 현양탑이 건립되었다. 1997년 공원이 새로 단장되면서 중림동 성당 경내로 이전됨으로써 1999년에는 현재의 새로운 현양탑이 세워졌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을 바탕으로 2011년 염수정 추기경의 발의와 최창식 중구청장과의 합의에 의해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사업이 본격화된 것이다.
좌: <그림 8> 순교 현양탑, 1999
우: <그림 9> 순교 현양탑에서 축복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2014
가톨릭교계와 중구의 노력에 힘입어 사업은 순조롭게 추진되는 것 같았으나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2014년 11월 <서소문역사공원 바로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가 발족되면서 반대에 부딪치게 된 것이다. 천도교 신자들이 중심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이곳을 천구교만의 순교성지로 만들려는 것은 이 지역에서 처형된 다른 사람들의 역사를지워버리는 행위’라며 사업추진에 반발하고 나섰다.20) 이에 중구청은 2015년 5월 학술토론회를 열고 위원회 측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가졌다. 조선후기 민중사를 주제로 내건 발표자는 ‘서소문 일대는 천주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반봉건 개혁 투쟁과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정변 그리고 동학 지도자들이 희생된 처형터 였다며 서소문역사공원은 이들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소문 일대’와 ‘서소문공원 안’ 이라는, 이른바 경계에 대한 논쟁이 불거지자 중구청은 학술용역을 통해 ‘서소문역사공원과 동학의관련성’을 검증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2016년 11월에 결과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논란은 계속되어 범국민대책위원회는 국회에서 국회의원들과 더불어 기자회견과 강연회를 개최하고 서울시장과 면담을 하는 등의 집단 활동을 전개하였다.21)
주민간 혹은 공동체간 이해당사자의 갈등은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으나 잘 극복된다면 장기적으로 공동체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갈등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갈등을 극복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일은 소통과 화합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건립과정에서 나타난 반대운동에 직면해 주체측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반대의 이유를 경청하고 존중하며 학술대회와 용역을 통해 해소의 노력을 해 왔다. 다른 종파의 구성원들도 경쟁력이 있고 개성있는 시민들로서 상호 경쟁관계가 형성될 수 있으며 서로의 입장과 어려움을 충분히 보듬어 해결방안을 마련하는 일은 중요하다. 지역공동체의 갈등구조는 이해관계의 불일치로 인한 ‘이해갈등’과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가치갈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22) 가치갈등은 문화나 관습의 차이로 인해 발생되기도 한다. 가치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이며 관습적인 규범들을 이해하고 서로간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은 이러한 가치갈등에 직면해 이를 슬기롭게 풀어나간 사례로 남게 될 것이다. 이 글의 서언에서 언급했듯이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상설전시실가 조선 중기 이후의 사상사를 형성해 온 유학, 실학, 서학, 동학, 불교 등의 유산을 망라함으로써 ‘종교를 초월하는 역사문화 체험 공간’의 위상을 견지하고 있음은 저간의 갈등상황을 보편종교의 차원에서 해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