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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의의와 과제 (1)

김영호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건립의 의의와 과제

김영호*

Ⅰ. 서언
Ⅱ. 장소와 역사
Ⅲ. 발의와 갈등
Ⅳ. 건축과 전시
Ⅴ. 결언 : 의의와 과제

<국문초록>
 본 연구의 목적은 신생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건립 배경과 추진 과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 박물관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이를 토대로 박물관이 나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자리한 지역은 조선 이래 ‘서소문밖 네거리’로 불리웠던 곳으로 한성부 ‘성저십리’(도성 외곽 4km 반경) 최대의 상업 지역이자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로 기억되는 곳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장소성’과 ‘역사성’은 신생 박물관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근간이라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한국박물관학회가 제42회 학술대회에 즈음해 채택한 ‘뮤지엄, 지역공동체와 유산해석’이 계기가 되어 시작되었으며, 학술대회의 주제와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향방을 연계해 살펴보려 한다. 
 오늘의 박물관은 전에 없는 강도의 변화를 요청받고 있다. 지배이념과 권력의 도구로 이용되어온 과거의 근대적 노정에 대해 반성하고, 동시대의 사회적 이슈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공공성과 다양성의 가치를 보호하는 사회교육기관으로 인식되고 있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은 운영주체가 천주교 서울대교구이지만 교구장은 이 박물관이 ‘종교를 초월하는 조선후기 역사문화 체험 공간’ 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웃종교를 이해하고 열린 종교문화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숙고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보편’의 뜻을 지닌 ‘가톨릭(catholic)’의 소명을 실천하는 기관이 되기 위해서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본 연구 과제에 주어진 핵심 질문이다.

주제어 : 뮤지엄,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서소문 밖 네거리, 천주교, 순교성지, 지역공동체, 유산
해석

Ⅰ. 서 언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지난 2019년 6월 1일 공식 개관했다. 박물관이 자리 잡고있는 장소는 가톨릭 성인 44위와 복자 27위를 배출시킨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1)라는 점에서 천주교회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박해와 순교의 터가 지역민을 비롯해 모두를 위한 성지역사박물관으로 거듭나기 전까지는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야 했다. 조선 초기부터 이곳 서소문 밖 일대는 저잣거리로 난전(亂廛) 상업의 중심이자 서민들의 애환이 넘치는 장소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이곳을 공식 처형장으로 지정하면서 400여 년 동안 억압적 통치의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개항기에 접어들어 변화하는 경제적 위상 속에 1905년 경의선 철로가 이 지역을 관통하며 터무늬가 달라지고, 국토 재건기인 1966년에는 서소문고가가 이 지역 북쪽에 건설되면서 접근로가 차단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1973년 근린공원이 조성되었으나 공원 하부에 중구의 재활용 쓰레기 처리장과 대규모 공영 주차장이 건립됨으로써 시민의 휴식공간으로서 한계를 드러내던 장소 였다.2)

 2011년 7월 가톨릭 서울대교구가 내놓은 제안서는 이 터의 기운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서소문밖 역사유적지 관광자원화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프로젝트는 8년의 준비과정을 거치며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라는 성과를 거두어 내었다. 역사박물관이 공식 개관한 6월 1일 이래 5개월 동안 무려 11만여 명이라는 관람객이 다녀간 것으로 공식 집계되고 있다.3) 관람객 수 뿐만 아니라 각종 정보 매체에 노출된 소개 글을 보면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출발은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며 보완하고 정비해야 할 시설과 업무가 적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변화하는 21세기의 지식사회 환경에 부응해 박물관의 기능과 역할을 새롭게 세우는 노력이 요구된다. 박물관은 문화를 매개로 삼아 작동하는 정치적 공간이며 쟁의의 장소이다. 오늘의 박물관은 지배이념과 권력의 도구로 이용되어 온 과거의 근대적 노정에 대해 반성하고, 동시대의 사회적 이슈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공공성과 다양성의 가치를 보호하는 사회교육기관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글은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건립 배경과 추진과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박물관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이를 토대로 발전방안을 제시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연구의 대상은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으로 한정되어 있으나 최근 전국적으로 증식되고 있는 신생박물관들의 수4)를 고려한다면 박물관 건립에 따르는 문제들을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일은 특정 박물관에 국한된 것이라 할 수 없다. 논의의 초점을 좁히기 위해 이번 한국박물관학회에서 학술대회 주제로 채택한 “뮤지엄, 지역공동체와 유산해석”5)이라는 화제를 염두에 두면서 살펴보려 한다.

Ⅱ. 장소와 역사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자리 잡은 지역 일대는 오래전부터 ‘서소문 밖 네거리’로 불려져 왔다. 서소문은 조선 초기 한양 도성의 축조와 함께 세워진 소의문(昭義門)의 속칭으로 서대문과 남대문 사이에 자리 잡은 간문이었다.6) 서소문 밖 네거리는 한반도 서남 방향에서 한양 도성을 향해 올라오는 물류가 양화진과 마포 그리고 용산 등의 한강나루터를 거쳐 도성 외곽에 집결하며 형성된 이른바 저잣거리였다. 세 개의 문인 돈의문(敦義門), 소의문(昭義門), 숭례문(崇禮門)이 밀집되어 있는데다 무악재에서 발원해 한강으로 이어지는 만초천(蔓草川) 물길이 이곳을 관통하고, 도성 내외를 잇는 육로가 여러 곳에서 교차되어 성저십리(城底十里)7) 중 가장 번화한 지역이었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씨름과 줄다리기, 윷놀이와 남사당패 놀이 등을 펼치는 장소로 서민들의 삶과 민속 문화가 오롯이 녹아있는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1> 경조오부도 (김정호, 1861)

 한편, 군중을 모이게 하는 서소문 밖의 지리적 여건은 조선 조정이 국사범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사형장의 조건을 충족시켰다. “행형제도의 목적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벌백계(一罰百戒)에 있으므로 행형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행형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고 소문이 빠르고 널리 퍼져야”8) 한다면 서소문 밖은 참형의 장소로 최적지였다. 조정이 이러한 저잣거리에 사형장을 마련한 것은 치세의 목적도 있었지만 공자가 편찬한 서경(書經)의 가르침에 따라 동대문 밖에서 사형하는 것을 권치 않은 탓에 성저십리 서쪽에 정하게 된 것이다. “태종실록 32권(16년 7월 17일)에 ‘사람을 동대문 밖에서 사형하는 것은 실로 편치 않은 일입니다. 서경에 말하기를 사(지신사당)에서 죽인다고 했습니다. 사(社)는 오른쪽에 있으니 고제에 따라 서소문 밖 성 밑 10리인 양천 지방, 옛 공암 북쪽으로 다시 장소를 정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그대로 따랐다.”9) 서소문 형장을 비롯해 당고개(용산), 와현(용산), 새남터(노량사장), 양화진(마포) 등의 형장이 모두 서쪽 10리 안에 위치하고 있는 사연이 여기에 있다. 

좌: <그림 2> 소의문 밖 풍경, 1890년대 (출처: 네이버 블로그)
우: <그림 3> 소의문 전경 (출처: 서울역사편찬원)


 순조 1년(1801년) 정약종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처음으로 참수되고 뒤이어 박해 시대가 펼쳐지면서 수많은 교인들이 이곳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10) 기록에 따르면 1984년 시성된 103위 성인 중에 44명이 이곳 서소문 밖 형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뿐만 아니라 2014년 시복된 복자 중에 27위도 이곳에서 순교를 당한것으로 되어 있다.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 까지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박해의 장소로서 서소문 밖 사거리는 한국 최대의 가톨릭 순교성지가 된 것이다. 망나니들이 피묻은 칼을 씻었다는 두께 우물은 현재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지상층에 자리잡은 서소문역사공원 영내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상업과 교역의 요지로서 서소문 밖 네거리의 역할은 철도와 도로망의 확충에 따른 도시 환경의 변화로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1900년 경인선(京仁線)11) 철도의 개통은 시발점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이어 1882년 인천이 개항되고 인천(제물포)-서울(노량진) 구간이 정해지면서 노량진 지역이 새로운 경제활동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서 1905년 서울역과 신의주역을 연결하는 경의선(京義線)12)이 서소문지역을 가로지르고 이후 서소문 고가차도가 건설되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건축가 안창모 교수는 당시와 그 이후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경의선은 현 서소문공원의 북측을 감싸듯 우회하며 의주를 향해 신촌으로 연결되면서 이 지역은 고립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 부지는 철도시설 부지로 수용되었고 1927년 철로 안에 수산시장이 개설되어 참형터의 흔적이 사라졌다. 해방 후 1966년에 건설된 영등포와 도심을 연결하기 위해 건설된 최초의 고가차도는 서소문 밖의 존재를 시민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다.’13) 1973년에는 이곳이 서소문근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나 이 공원이 서소문 밖 사형장이었음을 밝혀내는 데는 세월이 필요했다. 2012년 12월 한국교회사연구소가 개최한 ‘천주교 문화유산 포럼’에서 사형장의 위치가 역사 속으로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14)

좌: <그림 4> 경의선, 1905년 서울역-신의주역 개통
우:<그림 5> 경인선, 1900년 경성역(서대문역)-인천역 개통


 서소문 밖 네거리의 역사에 관해 논할 때 그 역사성이란 열린 구조를 지닌다. 역사의 기술(記述)에는 다양한 주체와 시선들이 존재하며 따라서 객관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H. 카(Edward Hallett Carr)의 정의는 이러한 유기적 역사관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15) 객관적 사실로서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주관적 선택과 기술에 의해 정리된 것일 뿐이라는 새로운 역사관은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들의 사명’이라는 레오폴트 폰랑케(Leopold von Ranke)의 입장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카의 입장은 신역사주의의 사관을 대변하며 과거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사건과 그 기록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담론과 지식을 생산하는 역사가의 시선이라는점을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산출된 가치와 문제의식은 미래에 대한 전망과도 연관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것이다.
 조선 후기는 변혁의 시대였다. 역사학자 고동환 교수는 17세기 후반의 조선은 도시를 중심으로 상업인구가 증가하면서 변화하는 ‘중세적 지배체제의 동요와 해체’의 시기였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조선사회는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기초한 시장과 무역의 확대되고 사상적으로는 실학의 대두, 서학과 천주교의 유입과 확산, 동학이라는 신흥종교의 발생 등으로 그동안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했던 성리학적 사유가 점차 동요되기 시작했다.’16) 이러한 주장은 중세사회의 해체가 한양의 성저십리 지역을 대표하는 상업중심지의 하나였던 서소문 밖 지역에서 나타났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서소문 밖 시장은 근방에 자리 잡은 숭례문 밖의 칠패 시장과 더불어 도성 밖의 2대 시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서소문 밖 시장은 인가를 받은 시전보다 난전이 많았고 사기와 협잡 그리고 소매치기 등의 범죄가 일상화되는 곳이었다. 서소문 밖 지역에는 평민과 천민 그리고 양반이 섞여 살았고 지방에서 올라온 유민들로 집단으로 거주했다. 이른바 조선후기의 서소문 밖 지역은 신분과 권위의 공간으로서 한양과는 다른 역동적인 근대적 공간이었다. ‘서소문 밖 지역의 주도세력도 17세기에는 양반 사대부 계층이었지만, 18세기에는 점차 상인과 수공업자, 유민들로 변모하였다.’17)
 중세적 지배 체제의 동요와 해체를 이끈 서소문 밖 지역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의 직업은 의원을 비롯해 상인과 수공업자 들이 많았고 이들은 중세적 질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조정은 이들을 체제 내에 순응시키고 반체제 세력으로 전화하는 것을 방지할 할 필요가 있었다. 

좌: <그림 6> 김홍도, 씨름,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27x22.7cm, 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우: <그림 7> 김홍도, 무동,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27x22.7cm, 단원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공개사형은 새로운 질서를 희구하는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한 일종의 사회적 장치였다. 조선왕조의 지배질서와 그것을 부정하려는 민중의 힘이 충돌하는 역동적인 공간이 바로 서소문 밖이었다. 이상에서 보듯 서소문 밖의 장소성과 역사성은 저잣거리와 형장이라는 두 개의 범주로 축약된다. 장터와 순교의 역사는 조선왕조의 중세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와 민주화를 토대로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는 근대화의 역사로 해석될 수 있다.


Ⅲ. 발의와 갈등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건립 계획은 서소문 밖 지역의 장소성과 역사성을 배경으로 시작되었다. 역사박물관 건립의 목표가 조선중기 이후의 사상사적 변천과정에서 생산된 유형과 무형의 유산들을 수집 해석하여 그것을 미래적 가치로 재생산 하는데 두고 있다면, 그 유산의 키워드는 바로 장터와 순교가 될 것이다. 이 근대적 유산의 키워드를 현대에 승계한다면 소통과 화합으로 대별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박물관은 소통과 화합의 시대에 지역공동체의 정체성을 충족시키고 구성원들의 결속감을 높이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급속한 경제성장에 동반되어온 물질적 풍요가 정신현상의 발전과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극악한 범죄와 사회적 분열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소통과 화합의 지식문화 기반시설로서 역사박물관은 이를 타개할 대안이 된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건립을 발의한 것은 2011년 7월, 당시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겸 총대리였던 염수정 추기경이었다. 가톨릭교계와 중구청이 만나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에 한계를 드러내던 ‘서소문근린공원’을 천주교 순교성지로 조성하는데 합의한 것이다. 같은 해 10월에는 한국교회사연구소가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위탁을 받아 한국천주교 문화유산 실태 및 활용방안 이라는 제명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12월에는 조선시대 한양도성 서소문과 천주교 박해라는 제하의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며 공원 및 박물관 건립을 둘러싼 학문적 검토를 심화 시켜 나갔다. 이후 국회의원 44명과 서울시의회 의원 61명이 순차적으로 서울시에 청원서를 제출했고 신자들이 이를 따랐다. 급기야 2013년 5월 서소문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 기본계획 연구 가 완료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가톨릭교계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13년 9월에는 서소문 성지가 서울대교구 성지순례길로 선포되며 국가 순례지로 지정되었고, 2014년 8월에는 124위 순교자 시복을 위해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 서소문 성지에 들러 축복하였다. 2018년 9월에는 급기야 로마 교황청 승인 국제순례지로 선포되어 세계 공식 순례지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18)
 서소문 밖 유적지를 순교성지로 가꾸려는 천주교회의 노력은 보다 일찍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1958년 윤형중 신부가 경향잡지 9월호에 ‘한국천주교순교자현양회가 새남터와 양화진 절두산을 입수했으니 다음 목표는 서소문 사거리에 순교기념관’이라는 취지의 글을 실었고, 1964년 최석우 신부는 서소문순교자 기념관 설립 취지문 을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19) 이러한 천주교회의 노력은 단계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아래 여의도광장에서 거행된 103위 순교성인 시성식을 기념하여 서소문근린공원 내에 순교 현양탑이 건립되었다. 1997년 공원이 새로 단장되면서 중림동 성당 경내로 이전됨으로써 1999년에는 현재의 새로운 현양탑이 세워졌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을 바탕으로 2011년 염수정 추기경의 발의와 최창식 중구청장과의 합의에 의해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사업이 본격화된 것이다. 

좌: <그림 8> 순교 현양탑, 1999
우: <그림 9> 순교 현양탑에서 축복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2014

 가톨릭교계와 중구의 노력에 힘입어 사업은 순조롭게 추진되는 것 같았으나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2014년 11월 <서소문역사공원 바로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가 발족되면서 반대에 부딪치게 된 것이다. 천도교 신자들이 중심으로 구성된 이 단체는 ‘이곳을 천구교만의 순교성지로 만들려는 것은 이 지역에서 처형된 다른 사람들의 역사를지워버리는 행위’라며 사업추진에 반발하고 나섰다.20) 이에 중구청은 2015년 5월 학술토론회를 열고 위원회 측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가졌다. 조선후기 민중사를 주제로 내건 발표자는 ‘서소문 일대는 천주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반봉건 개혁 투쟁과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정변 그리고 동학 지도자들이 희생된 처형터 였다며 서소문역사공원은 이들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소문 일대’와 ‘서소문공원 안’ 이라는, 이른바 경계에 대한 논쟁이 불거지자 중구청은 학술용역을 통해 ‘서소문역사공원과 동학의관련성’을 검증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2016년 11월에 결과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논란은 계속되어 범국민대책위원회는 국회에서 국회의원들과 더불어 기자회견과 강연회를 개최하고 서울시장과 면담을 하는 등의 집단 활동을 전개하였다.21)
 주민간 혹은 공동체간 이해당사자의 갈등은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으나 잘 극복된다면 장기적으로 공동체 발전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갈등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갈등을 극복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일은 소통과 화합을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건립과정에서 나타난 반대운동에 직면해 주체측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반대의 이유를 경청하고 존중하며 학술대회와 용역을 통해 해소의 노력을 해 왔다. 다른 종파의 구성원들도 경쟁력이 있고 개성있는 시민들로서 상호 경쟁관계가 형성될 수 있으며 서로의 입장과 어려움을 충분히 보듬어 해결방안을 마련하는 일은 중요하다. 지역공동체의 갈등구조는 이해관계의 불일치로 인한 ‘이해갈등’과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가치갈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22) 가치갈등은 문화나 관습의 차이로 인해 발생되기도 한다. 가치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이며 관습적인 규범들을 이해하고 서로간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은 이러한 가치갈등에 직면해 이를 슬기롭게 풀어나간 사례로 남게 될 것이다. 이 글의 서언에서 언급했듯이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상설전시실가 조선 중기 이후의 사상사를 형성해 온 유학, 실학, 서학, 동학, 불교 등의 유산을 망라함으로써 ‘종교를 초월하는 역사문화 체험 공간’의 위상을 견지하고 있음은 저간의 갈등상황을 보편종교의 차원에서 해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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