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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현 / 행위조각에 스민 유기적 세계관

김영호



강주현 / 행위조각에 스민 유기적 세계관

김영호 | 중앙대교수, 미술평론


조각의 본성은 ‘입체’로 규정되어 왔다. 모더니스트들이 변증법적 사유를 거쳐 도달한 결론이다. 그림의 본성은 ‘평면’이고, 무용은 ‘몸짓’이며 음악은 ‘소리’라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내린 모더니스트들의 업적이었다. 예술의 장르를 끊임없이 정화하고 순수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얻은 결실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예술개념을 고정된 절대의 세계로 몰아 넣었다.    

강주현의 조각은 모더니스트들이 규정한 조각의 본성에 물음을 제기하며 시작되었다. 첫 개인전을 연 2009년 이후의 노정을 통괄해 보면 그의 작업은 기존의 조각 개념을 해체하고 확산하는 왕성한 실험의 연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작업은 2차원의 평면에 인쇄된 사진 이미지를 세로로 절단하여 3차원의 공간과 조합하는 방식이었다. 2015년부터는 의자나 종이컵 혹은 붓 따위의 오브제를 선택해 그것들을 연속적인 형상으로 고착함으로써 시간을 머금은 4차원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렇듯 강주현의 확장된 조각 세계는 사물을 순간과 연속의 궤적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계속해 오고 있다. 시각에 의한 지각은 불가능하지만 경험을 통해 지각 가능한 세계, 물리적 공간에서는 관찰되지 않지만 추론으로 존재하는 유기적 세계가 거기에 존재한다.
     
강주현의 유기적 조각은 세 가지 대립적인 것들 사이의 관계항(關係項)으로 정리될 수 있다. ‘물질과 비물질의 관계’, ‘고정과 유동의 관계’, ‘순간과 연속의 관계’가 그것이다. 이는 작가의 작업노트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언술을 그대로 원용한 것이다 : “나는 순간과 연속, 물질과 비물질, 고정과 유동에 관한 일련의 고민을 토대로 작업하고 있다”. 상호 대립적으로 보이는 개념과 현상들 사이에 맺어지는 유기적 관계항을 이해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우리들에게 과거의 기계론적이고 환원적 세계관을 넘어 유기적이고 융합적인 세계관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최근 지식사회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가 내세운 양자물리학의 전환기적 세계관과도 다르지 않다. 나아가 이러한 직관적이고 융합적인 세계관은 동양의 전통 사상과도 연계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물질과 비물질의 유기적 관계항’을 드러내는 강주현의 시도는 <빈틈없이>라는 제목의 신작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지구본을 연상케 하는 구체의 표면에 붓질의 궤적을 연속적 형상으로 구현해 남긴 뒤, 그 구체의 존재를 털어 비워낸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커다란 유리공처럼 구체의 볼륨은 사라져 텅 빈 공간으로 남게 되고 그 비워낸 볼륨의 표면을 덮는 붓질의 연속적 행위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방식이다. 작가는 이러한 작품에 ‘행위로서의 조각’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비가시적 대상이 텅 비어있는 공간으로 제시되고, 붓의 궤적은 연속적 시간을 품은 실재의 형태로 그 공간 주변을 가로지르며 서 있다. 실물을 경험하기 전에는 말로서 설명이 쉽지 않은 이 작품은 미래주의자들이 시도했던 ‘시간의 연속성’과 입체주의자들이 시도했던 ‘시각의 동시성’ 이론을 떠오르게 한다. 이동하는 붓의 시간성과 그 시간의 마디를 겹겹의 레이어로 정지시킨 의미로서의 동시성이다. 나아가 거기에는 선불교의 연기론과 공사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어떤 세계를 직감케 한다. 텅 비어 있는 비물질의 세계는 주변에 자리잡은 물질의 속성과 상대적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존재감과 의미를 파생시키고 있다. 비움으로 존재하는 세계, 곧 ‘비어있음’의 세계가 거기에 있다.
      
‘고정과 유동의 유기적 관계항’은 강주현의 작품을 진단하는 두 번째 키워드가 된다. 이를 조각적 언어로 말하자면 고정적 볼륨과 유동적 구조 사이의 관계항이 될 것이다. <구르는 컵>을 예로 들어보자.이 작품은 무게와 질량를 지닌 하나의 오브제가 거기에 가해진 어떤 힘에 의해 이동하는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작가가 작품에 붙인 ‘연속적 순간의 동시성’이라는 설명은 고정적 볼륨과 유동적 구조를 통합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드러낸다. 좀 더 설명해 보자. 여기에 붓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볼륨을 지닌 덩어리다. 기하학적 맥락에서 보자면 이것은 정지된 점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이 붓을 레진으로 캐스팅해 내는 과정에서 그것을 3차원의 공간으로 이동시킨다. 하나의 볼륨을 반복적 형태로 연장하고 고착시킴으로서 조각적인 구조로 전환시키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예술세계에서 낯선 것이 아니다. 강주현은 컵이나 붓의 궤적을 평면의 일루전을 넘어 공간속에서 연속적인 볼륨의 구조로 재현해 내고 있다는 점에서 시의성과 독자성을 찾을 수 있다. 고정과 유동의 유기적 관계를 드러내는 그의 조각은 우리에게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선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순간과 연속의 유기적 관계항’은 그의 사진과 드로잉 시리즈에서 어렵지 않게 설명된다. 펜을 쥔 손의 이미지를 사진으로 확보한 뒤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그 이미지를 연속적인 흐름으로 분절해 재현함으로써 손의 궤적을 나타낸 것이다. 뒤샹의 그림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를 통해서 익히 알려진 표현 기법이다. 작품 제목인 <네 번 돌려 엉키게 그리는 선>에서는 작가의 의도가 고정된 순간과 행위의 연속성을 하나의 화면 위에 함께 드러내는데 있음을 보여준다. 망치질하는 손의 궤적을 표현한 <유효타를 위하여>는 수직으로 내려 치는 망치의 속도와 힘을 잘 나타내고 있다. 순간과 연속의 유기적 관계를 동시성의 개념으로 풀어내는 실험은 그의 ‘촉지적 드로잉(Haptic Drawing)’ 시리즈에서도 적용된다. 주변의 사물을 응시하는 눈과 드로잉을 수행하는 손의 작업을 분리하면서 동시에 통합하는 실험적 작업이다. 마치 로봇이 입력된 프로그램에 의해 화면에 어떤 이미지를 그려내듯 작가는 시선과 드로잉 행위를 따로 분리시킨 채 드로잉을 완성시킨다. ‘촉지적인 드로잉’은 작가의 시선의 순간과 행위의 연속성을 화면 위에 통합하려는 시도에서 생겨난 기법 혹은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눈과 손의 기능이 분리된 것인 동시에 통합적으로 작동하는 신체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 강주헌의 조형 실험은 물질과 비물질, 고정과 유동, 순간과 연속 등의 현상적 맥락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자전적 메시지에 관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고난한 예술의 길을 걸어온 청년세대의 불안과 방황 그리고 혼돈의 메시지들이 담겨있다. 이러한 자전적 메시지는 그의 작품에 형식적 일관성을 유지케 해 온 요인이기도 하다. 하나의 얼굴을 네 개의 면으로 형상화한 작품 <예-아니오>는 현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자화상이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는 행동으로 현실을 진단하는 단편적인 심리적 상황에 대한 비판적 발언이라 할 수 있다. 내려치는 망치의 궤적을 나타낸 <유효타를 위하여>도 수없이 반복되는 도전과 시도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강주현의 4차원적 조각은 대립적인 것들로 인식되어 온 것들 사이의 관계항에 주목해 유기적인 세계를 지향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현대적 삶에 대한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이 동양의 반야사상(般若思想)과 연계를 지닌다는 생각 또한 필자만의 것이 아니다. 그의 직관적이고 유기적 세계관은 연기설을 공(空)의 입장에서 해명한 반야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1차 게재: 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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