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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일 /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찾은 실존의 메시지

김영호


정용일 /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찾은 실존의 메시지 

김영호 | 예술감독, 중앙대교수

   화가 정용일은 오래전부터 설화와 무속 등 우리 민족 공동체와 삶의 현장에서 전승되어 온 초월적 세계를 작품의 주제로 삼아 작업해 왔다. 이승과 저승, 육신과 영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민간신앙의 세계가 작가의 창조적 영감을 자극하는 원천으로 작용했다고 할까. 작품의 형식은 시간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지만 설화와 무속의 초월성을 바탕으로 한 한국성의 표현은 정용일의 작품세계를 꾸준히 견인해 온 근간이었다. 늦은 프랑스 유학을 통해 유럽의 문화를 접하고 돌아온 후부터는 주제 선택과 형식 실험의 폭이 한층 심화되기 시작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회화적 초월성의 범주를 고대 희랍 신화의 영역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화가로서 정용일의 노정은 이제 보편적 신화의 해석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공존 방식을 모색하고 생(生)과 사(死)의 경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이번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기획초대전에 선보이는 십 수 점의 대작들은 신화에 기반한 실존적 삶의 문제를 에로스(사랑 Eros)와 타나토스(죽음 Thanatos)라는 화두를 통해 풀어낸 것이다. 고대 희랍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인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관계는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하나의 이론으로 체계화되었는데, 인간의 정신세계에는 삶에 대한 충동과 동시에 이와 반대되는 죽음에 대한 충동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즉 우리들 마음에는 생명과 사랑에 대한 충동 에너지인 에로스가 소멸과 죽음에 대한 충동 에너지인 타나토스와 공존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감정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강화와 집중의 상태는 결국 흥분이 소멸된 상태 즉 무를 전제한 개념이며, 따라서 사랑의 쾌락은 죽음을 향한 충동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역설적 공존 관계는 고대 희랍 이래 수많은 문학작품과 회화작품을 창작하는 원천이 되어 왔다. 

   정용일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키워드는 신라 시대의 설화에 등장하는 처용무(處容舞)다. 처용무는 궁중에서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추었던 춤으로 처용이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疫神) 또는 역병(疫病)을 물리쳤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 문화가 배어있는 처용무(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는 작가의 작품에서 가면의 이미지로 혹은 춤꾼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정용일의 작품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이상의 개념들을 종합해 보면, 최근 정용일의 회화는 설화나 신화의 줄거리와 그 시각적 도상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성찰하고 이것을 거친 붓질과 투박한 점의 형상으로 풀어내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설정한 에로스가 단지 연정과 성애의 차원을 넘어 대자연의 생명을 관장하는 원초적인 에너지로 이해되기를 바란다. 또한 타나토스도 단순히 죽음과 파괴의 차원을 넘어 생명이 없는 무기질로 환원시키려는 자연 현상의 메타포로 작품 속에 제시되고 있다. 


   이번 초대전의 포스터 이미지로 소개되는 <삶의 경계-생 : I>을 예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작품에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무엇보다 화면의 중심을 휘감아 도는 거대한 색띠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색띠의 상단에 보자기를 펼쳐 들고 서있는 나체의 여인, 그리고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우측 하단의 인물과 그 인물의 몸체에 오버랩되어 그려진 처용의 가면이 눈에 들어온다. 작가는 이 도상들이 연출하는 서사의 내용을 좀 더 보강하기 위해 화면에 다양한 풍경을 추가하고 있다. 그림의 왼쪽 하단에는 황량한 분위기의 숲이 표현되어 있는데 들개 무리가 그 안에 자리잡아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 짐승의 무리는 자신들 앞에 용트림하듯 솟아올라 화면을 지배하는 색띠(죽음을 지향하는 본능의 신 타나토스의 메타포)를 주시하고 있다. 밤과 낮으로 이분된 하늘에는 별들이 떠 있다. 화면에서 벌어지는 서사적 상황을 해석하는 키워드는 우측 하단에 그려진 처용의 가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결국 이 작품이 드러내는 메시지는 죽음과 생명이 함께 어우러진 삶과 이 삶의 기복을 중재하는 처용의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작품과 동일한 시리즈의 하나인 <삶의 경계-생 : II>는 삶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신화와 그 정신분석학적 적용 이론을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한 경우다. 화면의 좌측 하단에 자리 잡은 한 쌍의 인물은 (파괴와 죽음을 전제한 의미로서) 리비도적 성애를 나타내며  역설적인 생명 현상을 상징하듯 녹색의 불길이 하늘로 향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화면의 우측에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힘겨운 걸음을 걷고 있는 세 명의 군상들은 고난한 대중적 삶의 현실을 암시하고 있다. 이 두 인물군 사이에 자리잡은 거대한 붉은 색면은 생명의 유기적 현상의 은유적 표현으로 보인다. 화면의 좌측 상단에 뚫린 하늘 궁창에는 처용 가면을 배치해 이 상황을 주관하고 있다. 삶과 죽음 그리고 희열과 고통이 교차되는 인간 세상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모습이다. 설화의 내용에 따르면 처용의 아내를 범하려던 자가 역신, 즉 질병을 몰고다니는 요괴이므로 이 그림 속 좌측 하단의 남성은 역신의 메타포가 된다. 그리고 죽음과 무화의 도상으로 표현된 타나토스는 화면의 좌측 상단에서 시작해 화면의 군상 모두를 감싸며 다시 처용 가면으로 귀결되는 노랑색 점들의 띠로 그려져 있다.  

   정용일의 화면에 등장하는 다양한 타나토스의 형상들은 자신이 10여년 째 거주하는 옥천의 숲에서 발견한 칡넝쿨과 개심사 사찰의 기둥에 새겨진 용무늬 장식에서 빌어온 것이라 한다. 뒤엉켜 얽혀진 칡넝쿨과 상상의 동물로서 용의 이미지는 작가의 화면에 다층적 삶의 메타포로 쓰이고 있다. 물론 화면에는 언제나 처용이 등장해 삶과 죽음으로 짜여진 인생과 그 회화적 표현에 대해 성찰하도록 관객들을 안내하고 있기도 하다. 앞서 우리는 정용일의 작품이 ‘초월적 세계로 표현된 실존적 삶의 메시지’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이 때 실존적 삶이란 생명과 죽음이 불가분적 현상으로 이해되는 현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모순과 역설의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부여된 창조적 삶의 책무에 대한 성찰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의 다층적 서사 구조는 정용일의 역작 <삶의 경계-생 : III>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다.


   정용일의 작품 세계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작가가 사용하고 있는 조형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그의 캔버스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점들로 채워져 있다. 원색 기조의 점으로 덮힌 캔버스는 보색 대비가 주는 맑고 청명한 빛의 효과를 드러낸다. 보색 관계인 적색과 녹색은 뒤섞으면 탁색이 되지만, 병치되어 있을 때 색상의 순도와 채도는 최상의 상태에 달한다. 점묘의 방식은 인상주의 이후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화법이기도 하지만 정용일의 작품에서는 특수한 효과와 메시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작가는 서구 모더니즘 회화에서 추구했던 순수 형식의 차원을 넘어 전설과 무속 그리고 신화를 둘러싼 초월적 세계를 표상하기 위해 점묘법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시도하고 있는 환상적인 숲의 표현에서 점묘의 효과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점묘법에 의해 작가가 그려낸 숲은 이승과 저승의 중간적 세계이자 초월적 영역으로 변주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초월적 세계가 현세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사랑과 욕망으로 채워진 실존적 세계임을 또한 잊지 않고 화면에 그려낸다. 

   점묘의 형식을 적극 도입한 <자연의 신전 I>은 빛으로 채워진 숲이자 몽환적 신비의 숲으로 표현된 대표작의 하나다. 최근 작가는 이 숲 풍경 시리즈에 인물을 조심스럽게 등장시키고 있다. 고개를 들어 숲의 서정을 홀로 즐기거나, 사랑하는 여인과 아쉬운 이별의 상황을 나타내는 인물들이다. 작가는 화폭에 자신의 조형적 개성을 세우기 위해 다양한 붓과 일상적 도구들을 사용하여 점의 표정을 색다르게 연출하고 있다. 그가 일구어 낸 숲은 원근과 명암에 얽매이지 않고 산과 시내가 나무와 오버랩 되는 꿈의 공간이다. 화면에 올려진 점들은 연속적인 리듬을 만들어 횡으로 종으로 화면에 정겨운 선율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번 초대전에 선보이는 신작들에서는 조형 방식의 변화가 보인다. 점묘의 형식이 자유분방한 붓질로 대체되고 있다. 캔버스의 표면은 거칠고 투박한 붓질과 선들이 강조되며 표현적인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점묘의 형식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빛과 색에 의한 몽환적 세계로부터 벗어나 실존적 삶의 내러티브를 강조하려는 의도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설화와 무속 그리고 신화의 세계로 작가의 주제가 되돌아 온 것도 이러한 조형 방식의 변화를 설명하는 근거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작가는 작업 노트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이제 나의 작품세계는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월적인 한국성의 신화와, 현실에서 생사가 함께 펼쳐지는 공존의 삶인 희랍 신화의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함께 어우러짐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변화의 이유를 바이러스로 야기된 작금의 펜데믹 현실에서 찾고있다 : “지금의 코로나 현실은 인간에게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생명을 이어갈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을 조성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용일의 작품세계는 신화에 기반하면서도 현실을 직시하며 동시대적 삶의 리얼리티를 모색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지고 보면 신화는 공동체적 삶의 현실로부터 유래된 허구적 실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욕망과 시대적 조건 사이의 충돌로서 생겨난 것이 신화라는 말이다. 꿈이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현실적 금기 사이의 충돌을 완충하는 정신 능력인 것처럼, 신화는 인간의 집단적 욕망과 제도적 금기의 현실 사이를 중재하는 시대적 산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신화는 신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빌어 억압된 본능을 순화하는 문화적 장치로 나름의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이다. 예술가들이 신화에서 창조적 영감을 발견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고대 희랍의 신화에 등장하는 근친상간과 부친살해 등의 내용은 서구 예술 작품의 백미를 이루고 있다.   

   무속과 전설에서 시작되어 신화에 이르는 초월적 세계를 꾸준히 탐구해 온 정용일의 작품이 현실적 욕망과 역설의 메타포를 도구로 삼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로 보인다. 신화가 지닌 메타포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면 정용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의미들을 발견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덧붙여야 될 말이 있다.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도상들과 그 의미들이 반드시 메타포의 언어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작품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주체로서 관객은 도상학적 은유의 체계를 넘어 스스로 의미를 세우고 경험하기 때문이다. 가령 백합이 순결을 의미하고 비둘기가 평화를 의미하는 고정적 해석의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한 것이 아니다. A를 A’로 해석하는 방식과는 달리 A를 B로 해석하는 암시적 비유 방식을 우리는 알레고리(Allegory)라 부른다. 

   정용일의 신작들은 최근 지구촌을 재앙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 속에서 제작되었다 한다. 그의 작품세계는 오래전부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속과 전설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고 인류 보편 문화 장치로서 신화에 이르며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작가의 이러한 예술 노정은 시의성이 주어진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재앙의 상황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월적인 세계관을 새롭게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모더니즘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넘어 초월적이고 유기적이며 동시에 실존적인 세계관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정용일의 작품세계가 주는 의미는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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