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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현과 닥터정 / 빛의 메타포 – 팬데믹 시대의 예술

김영호



채미현과 닥터정 / 빛의 메타포 – 팬데믹 시대의 예술


김영호 | 예술감독, 중앙대교수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그 빛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구약성서 창세기1장, 공동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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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결합은 이미 일상적 화두가 되었다. 국내외의 유명 뮤지엄이나 비엔날레 그리고 갤러리에서는 비디오·디지털·영상·설치 등의 과학기술 미디어에 기반한 전시가 줄을 잇고 있다. ‘인공지능(AI)과 로보테크놀로지’로 대변되기도 하는 산업혁명의 시대가 예술가들의 창조적 영감을 자극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시대의 아들’로서 예술은 언제나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대해 촉수를 세워 ‘시대 정신’을 형상화해 왔다는 점에서,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결합은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소명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바라보는 예술가들의 시선은 대중 일반의 그것과 차원을 달리한다는 사실이다. 산업에 기반한 혁명의 기술로서 테크놀로지를 철학적 성찰을 위한 도구적 개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른바 예술가들의 시선에는 과학 문명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스며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최근 지식사회 일각에서 부상하고 있는 ‘문명사적 전환기’라는 용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지구촌을 위협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야기한 팬데믹 상황은 이러한 ‘시대 정신’의 변화를 만든 직접적인 계기였다. 과학기술은 인간들에게 삶의 편리함과 물질의 풍요를 안겨주었으나 그 댓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다. 산업화의 구호 아래 자행된 생태와 환경의 파괴는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황사와 미세먼지로 채워진 육지는 호흡마저 곤란케 하며, 원자력발전소에서 흘려보내는 방사선 폐수는 바다의 생명체를 위협하고 있다. 급기야 역병이 전지구적으로 창궐하는 총체적 재앙의 시국에 예술가들이 테크놀로지에 거는 기대는 예전과 같지 않다. 자연과 환경 그리고 생태와 생명의 가치에 대한 성찰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지식의 한계와 불확정성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예술이 궁극으로 도달하게 되는 세계가 종교적 초월과 보편적 진리의 영역이다.

화가로서 데뷔한 채미현은 1990년대부터 테크놀로지 미디어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94년 《미술회관》의 개인전에서 처음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인공의 빛인 레이저(Laser)였다. 공학적 에너지 원천의 하나인 레이저 광선에서 자신의 실험적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 가능성이란 레이저 광선을 표현의 미디어로 사용해 은유적 사유의 공간을 창출해 내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1996년 《토탈미술관》에서 가진 개인전의 서문에서 평론가 박래경은 채미현의 작품을 둘러싼 주제 의식에 대해 ‘생명 발원의 에너지로서 레이저를 사용하는 것’이라 적고 있다. 차겁고 예리한 성질의 빛을 인간화된 의미의 전달 수단으로 채택해 생명, 탄생, 팽창, 죽음과 같은 인문학적 주제로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 아트’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는 백남준의 <TV 아트>나 <비디오 아트>가 정보의 독점과 권력화에 대응하는 비평적 관점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채미현의 레이저 아트도 시작에서부터 과학과 테크놀러지의 시대가 요구하는 인문학적 성찰에 기반하고 있었다. 채미현이 <레이저 아트>의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남편이자 기술 자문을 맡아왔던 정현기 박사의 역할이 있었다. 2004년 이후 ‘채미현과 닥터정’이라는 듀오 그룹이 탄생된다.      

이번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채미현과 닥터정’ 초대기획전은 (결과적으로) 팬데믹의 시대적 상황에서 치루어진 전시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테크놀로지 자원의 하나인 레이저를 생명과 자연의 유기적 생태를 성찰하는 메타포로 다루고 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비번 전시회에 시의성을 제공한다. 이 듀오 그룹은 이번 전시회에 <Hesed : Love 0.002Km>라는 제명을 달았다. 하지만 전시회의 준비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코로나 사태로 정부가 선포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개막식은 취소되고 전시회 자체도 개점 폐업의 상태로 대부분의 날들을 보냈다. 전시 기간을 연장하며 기다린 결과 일반에게 공개하기는 했으나 작가로서 작품의 설치와 전시의 과정에 심리적 고충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펜데믹 상황은 그 자체로 이번 전시회의 의미를 크게 반전시키는 효과를 파생시키고 있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과 ‘문명사적 전환기’로 불리는 오늘의 시대에 과학기술이 야기한 전지구적 재앙의 상황이 전시회의 준비와 설치 그리고 공개의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채미현과 닥터정’이 정한 전시회 제목 <Hesed : Love 0.002Km>는 팬데믹으로 처방된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패러디로서, 고립과 단절의 거리를 ‘자비와 사랑의 거리’로 은유한 것이다. 2미터를 나타내는 0.002킬로미터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겪고 있는 인간들 사이에 설정된 심리적 거리를 상징하고 있다. 작가들은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기획전시실》과 《기획소강당》을 이용해 사랑의 메시지를 펼쳐 놓았다.  
 
우선 《기획전시실》의 좌측면을 따라 세워진 붉은 벽돌 벽면에는 길이 30cm의 플라스틱 재질의 원통형 튜브 90여개가 수직으로 돌출해 있다. 그리고 벽면 하부에 레이저를 생성하는 기기들을 설치해 빛을 발사하도록 장치를 해 놓았다. 아날로그 모터의 기계장치를 떠난 레이저 광선이 원통형 튜브를 만나 굴절되고 산란 현상을 연출해 내도록 한 것이다. 투명의 원통형 튜브를 통과한 빛은 마치 샘의 수면 위에 뛰어노는 물방개의 흔적처럼 벽면에 크고 작은 파동을 일으키며 어두운 공간에 울림을 만들어 낸다. 한편, 작가는 《기획전시실》 공간 전체를 넘나드는 하나의 레이저 광선을 작동시켜 놓았다. 벽과 천정을 유영하는 한 줄기 빛은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샛별처럼 환상적인 시각체험을 선사하고 있다. 이외에도 작가는 사랑의 거리로 정한 2미터를 나타내기 위해 전시장 바닥과 벽에 동그란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채미현과 닥터정’의 작품은 이렇듯 레이저 광선이 지닌 특수성을 이용해 전시장을 감각의 공간으로 연출하며 대재앙의 시대의 사랑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선사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두 번째 공간으로 사용한 《기획소강당》의 작품은 레이저 아트의 가능성을 한 단계 더 높여 보여주었다. 레이저 스케너 시스템을 통한 ‘디지털의 아날로그적 표출’을 통해 심미적이고 은유적인 작가의 작품 컨셉을 좀 더 구체적으로 구현했다고 할까. 작가는 대나무 재질의 막대로 마름모꼴 입방체를 만들어 전시장의 공중과 바닥에 각각 설치해 놓았다. 속이 텅 빈 입방체의 모서리들은 동그란 목재 구슬로 결속되어 있어, 입방체들의 전체적인 형상은 점과 선으로 구성된 기하학적 도형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제작된 입방체의 공간에 레이저 스케너가 광선을 발사하면서 빛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공간의 좌우를 일정한 수직선으로 스케닝 하는 빛의 막대는 공간에 매달린 입방체의 대나무 선과 목재 구슬의 표면을 지나치면서 보석과 같은 섬광을 만들어 낸다. 그 빛의 파노라마는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거나 그 별을 이루는 원자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허공을 비추는 레이저 빛에 의해 포착된 점과 선의 울림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색다른 차원의 영역으로 의식을 전환시키고 있다. 이 색다른 차원의 세계가 바로 작가가 구현해 오고 있는 생명과 탄생 그리고 팽창과 죽음의 세계일 것이다. 이러한 메타포의 세계에 작가는 자비(Hesed)라는 종교적 메시지를 담아 놓았다.     
        
이외에도 이번 초대기획전에는 두 점의 평면작업이 함께 소개되었다. 《기획전시실》 입구 왼쪽 벽면에 설치된 연작의 하나에는 수많은 면도날들이 날을 세운채 화면에 부착되어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 <오컴의 면도날(Ockam’s Razor)>이라는 제명을 붙였다. 이와 더불어 작가는 신발을 오브제로 도입해 바닥에 설치한 작품 <무제>를 맞은 편 벽면에 한점 더 선보였다. 화면은 여러 곳이 구멍이 뚫려 있고 그림 아래에는 한 켤레의 물감 입힌 슬리퍼를 배치해 놓는 작품이다. 관객들에게 면도날과 슬리퍼 같은 오브제가 제공하는 의미는 다양할 것이다. 작가의 입장에서 제목으로 사용한 <오컴의 면도날>은 이번 전시회의 개념과 연결되는 직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14세기 영국의 프란치스코회 수사였던 오컴의 에피소드에서 채택한 <오컴의 면도날>은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다. 현대의 과학이론을 구성하는 기본 지침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이 말은 ‘필요없는 가설을 잘라내 버린다는 사고 절약의 원리’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작가가 <오컴의 면도날>을 이번 전시장의 초입에 설치할 것을 원했던 이유가 납득이 되는 대목이다.     

이상과 같은 전시의 취지와 작품의 의미를 종합해 보면 이번 ‘채미현과 닥터정’의 초대기획전은 레이저의 메타포를 명확히 제시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보여준다. 과학이 지닌 논리적 정합성과 기하학적 개념들이 예술이라는 유기적이고 감각적인 형식들과 만나게 하여, 이 접점에서 자비와 사랑의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닥터정이 작가노트롤 통해 이번 전시의 공간을 ‘더할 수 없는 아픔의 장소’에 빗대는 것은 이 작품의 제작 의도가 대재앙시대의 팬데믹을 겪고 있는 지구촌의 메타포임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번 ‘채미현과 닥터정’의 레이저아트 프로젝트를 통해 인간의 삶 속에 흐르고 있는 자비와 사랑의 가치들을 발견해 나가기를 원한다. 레이저라는 인공의 빛이 팬데믹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메시아의 빛으로 읽힐 수 있다면 작가 두 분 뿐만 아니라 이번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기획하고 실행한 모든 분들의 노고에 더없는 보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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