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고암 이응로(1904-1989)의 삶과 예술

김영호



고암 이응로(1904-1989)의 삶과 예술
<에콜 드 파리의 거장들> 9.7-11.21 


김영호 | 중앙대교수, 미술사가

1980년대 중반 필자가 파리 유학을 시작하던 시절, 이응로 화백은 프랑스 한인사회에서 ‘금기작가’ 였다. 그의 조카가 운영한다는 ‘김치식당’에는 북한 사람들이 들락거린다는 풍문이 교민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당시 해외여행은 한국반공연맹이 실시하는 소양교육을 받아야만 가능했고, 각종 언론은 유럽에서의 한국인 납북사례나 조총련 활동 등에 관한 보도를 경쟁적으로 하던 시절이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필자는 프랑스 생활 10년 동안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을 만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시간을 거슬러 오른 1967년 파리. 이응로 화백은 이른바 ‘동백림 간첩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한국으로 강제 연행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전쟁 때 북으로 간 아들의 소식을 듣기 위해 동베를린에 건너가 북한 공관을 방문한 일이 화근이 된 것이다. 200명에 가까운 유학생과 교민 등을 대상으로 한국 정부가 벌인 대규모 수사와 강제 연행은 외교적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서독과 프랑스 정부의 항의가 이어지고 국제미술평론가협회가 탄원을 내면서 실형을 살던 이응로 화백은 1969년 3월 석방되었다. 강제 연행의 트라우마를 얻고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과 아틀리에에 칩거하며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1970년대가 흐르는 동안 점차 그의 예술세계는 프랑스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았고 국내의 현대화랑, 신세계백화점 전시관, 문헌화랑 등에서 개인전도 열렸다. 

그러나 1977년 8월, 이응로 화백과 그의 가족은 다시 한번 충격적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윤정희 백건우 부부 납치미수 사건’이 발생하고 화백의 부인 박인경 여사를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프랑스 경시청은 이 사건이 프랑스 영토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언론은 이 사건을 미스테리로 다루며 온갖 추측 기사를 쏟아내었다. 화백 부부는 어느덧 친북인사가 되어 있었고 국내 화랑가에서 그의 작품전시와 유통이 전면 금지되었다. 결국 1983년 화백은 프랑스로 귀화했고 다시 고국과 생이별 상황이 되었으며 프랑스 한인사회부터도 고립되는 기구한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는 사필귀정이라 했던가. 1980년부터 한국에서 본격화된 민주화 운동은 이응로 화백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다. 1987년 급기야 군사정권의 통치가 종료되고 월북작가들이 해금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민족과 분단 상황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점차 달라지게 되었다. 그는 한국 근대사의 증언자이자 분단 시대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예술가로 부상했다. 1989년 1월 서울 호암미술관은 대규모 초대전을 열며 그간의 노정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시간은 화백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초대전이 열린지 열흘 만에 화백은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하고 페르 라세즈(Père Lachaise) 묘지에 안치되었다. 

화백이 이국땅에서 영면하고 30여년 세월이 다시 흐른 지금 우리는 묻는다. 그에게 파리는 무엇일까. 극동에서 찾아온 이방인 화가의 창작혼을 불사르게 했고, 정치적 이념에 억압받은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국적을 허락했으며 사망 후에는 공원묘지에 육신마저 품어 잠들게 한 파리였다. 교수라는 안정된 직업과 화가로서 구축한 명성을 뒤로하고 찾은 파리는 그에게 단순히 예술의 본향 이상이었다. 실험과 혁명의 도시 파리의 견인력은 비단 그에게 국한해 작동된 것만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유럽 모더니즘 운동의 꽃을 피운 곳이 예술가와 보헤미안이 모여들던 파리 몽마르트르(Montmartre)와 몽파르나스(Motparnasse) 거리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에콜 드 파리>의 신화는 그렇게 만들어 졌다. 
   
잘 알려져 있듯이 <에콜 드 파리>는 1차대전 이후에 파리에서 활약했던 이방인 예술가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프랑스의 대표적 미술사가였던 베르나르 도리발(Bernard Dorival)이 2차대전 이후의 파리에 모여든 이방인 예술가들까지도 <에콜 드 파리>에 포함시켜 부르면서 그 범주는 한층 더 넓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이 새로운 집단은 전쟁과 혁명의 주체들과 상호 밀접한 관계 속에서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전쟁의 파괴는 언제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고 그 이합집산의 에너지가 모더니즘 운동으로 나타나 형성된 집단이 <에콜 드 파리>였다. 에콜 드 파리는 특정한 미술 사조나 조형 이념을 내세운 집단이 아니었다. 파리로 몰려든 다양한 개성의 이방인들 모두가 <에콜 드 파리>에 속하는 작가로 다루어질 가능성이 주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에콜 드 파리>가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의 상징으로 이해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에콜 드 파리는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되살린 20세기의 위대한 정신이었다.   

<에콜 드 파리>는 열린 세계였으나 파리를 찾은 이방인 모두에게 주어진 이름은 아닐 것이다. 단순 여행자를 이방인이라 부르지 않는 것처럼 <에콜 드 파리>의 작가들은 단순히 파리에 거주한 작가들이 아니었다. 파리에 일정 기간 체류하며 작품 창작 활동을 전개했고 동시대의 미술 사조나 경향들에 상호 교응함으로써 파리 화단의 특수한 문화 형성에 기여한 작가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제 강점기에 파리로 진출한 선각자들인 이종우, 배운성, 나혜석 같은 작가들을 에콜 드 파리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을 것이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이들의 활동은 제한될 수 밖에 없었을 뿐 아니라 이들의 역할은 서구미술의 국내 유입에 기여한 선구자 혹은 유학생으로서 평가되고 있다. 한국 작가들의 본격적인 프랑스 진출과 문화적 상호교류의 활동은 해방과 정부수립 그리고 전쟁을 모두 치루고 난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다. 

한국 전쟁의 포성이 멈추고 휴전이 되면서 한국의 화가들은 파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파리로 진출한 작가들은 이응로와 박인경 외에도 이성자, 남관, 손동진, 김흥수, 박영선, 김환기, 함대정, 권옥연, 이세득, 변종하, 한묵, 방혜자, 문신, 김기린, 김창렬, 정상화 등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일본 유학을 통해 접했던 유럽의 모더니즘 미술을 현지에서 직접 체험하고 자신의 어법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20세기 전반의 대표적 미술경향으로서 야수주의와 입체주의에서 추상미술을 거쳐 앵포르멜에 이르는 유럽 모더니즘 사조를 비롯해, 다다와 초현실주의로 대변되는 유럽 아방가르드의 언어들을 국내 화단에 소개하는 통로가 되었다. 파리 화단은 이들에게 독자적인 예술가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자유와 실험 그리고 개성에 있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식민과 분단과 전쟁으로 점철되었던 청년기의 기억을 실존과 현상학의 언어로 형상화 하면서 적응해 나갔다. 동양의 정신이 주는 형이상학적 세계와 연계하는 한편 현지의 살롱과 비엔날레 등의 국제미술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전개했다.    

이응로 화백은 54세가 되던 1958년 12월에 도불, 1년간의 독일 체류 기간을 거쳐 1960년 1월에 파리에 정착했다. 국제미술평론가협회 프랑스 지부장이던 자크 라센느(Jacques Lassaigne)의 초청에 응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도불의 배경은 작가 특유의 도전과 모험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파리에 도착한 그는 주변에서 얻은 낡은 잡지를 사용한 콜라주 작업을 시작했다. 콜라주는 1910년대에 피카소와 브라크가 창발한 이래 다다와 초현실주의에서 본격화되며 유럽 화단에서 사용되어 온 오래된 기법이었다. 하지만 이응로 화백의 경우는 한지에 먹과 물감등 동양의 전통적인 재료를 자신의 콜라주 작업에 도입하면서 물성과 질감이 다른 현대적 조형미를 새롭게 창조해 내었다. 그의 작품은 파리 화단의 긍적적인 반응을 이끌어 1962년 폴 파케티 갤러리(Galerie Paul Facchetti)에서 ‘이응로, 콜라주 초대전’을 거치며 전속 계약을 맺게 되었다. 이른바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는 수식어가 그의 콜라주 작업에 따라다니면서 유럽과 미국에서 전시회를 잇따라 열게 되었다. 파리의 대표적인 미술전람회의 하나인 살롱 콩파레종(Le Salon Comparaison)에 참가하는 한편 당대 최고의 평론가 미셸 라공(Michel Ragon) 등과 친교를 맻으며 자신의 위상을 구축해 나갔다. 회갑이 되는 1964년 11월에는 파리의 세르누쉬 미술관(Musée Cernuschi)에 파리동양미술학교(Académie de Peinture Orientale de Paris)를 설립해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묵화기법을 지도하며 수많은 프랑스인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이듬해인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은상 수상하면서 그의 이름은 국제적인 화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파리 화단에서의 성공은 중견 동양화가로서의 화력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이응로 화백은 충남에서 태어나 일찍이 해강 김규진의 문하에서 서예와 묵화 사군자를 배웠다. 20세가 되던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의 입선을 통해 등단했으며 32세가 되는 1935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수학하며 유화와 소묘기법을 익혔다. 1938년 17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이왕직상을 수상하는 등 화가로서의 경력을 인정받았고 1939년 화신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했다. 42세가 되는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해 서울에 정착해 1948년에서 1954년까지 홍익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1954년 경주 서라벌예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로 취임했다. 50대 중반의 나이로 안정된 직업과 화가로서의 위상을 구축한 이응로 화백은 돌연 파리행을 결심하게 된다. 일설에 따르면 나혜석과의 인연이 도불을 결정하는 하나의 계기였다 한다. 이응로는 파리에 다녀온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5년간 머물며 그림 그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찾아 유럽 소식을 접했다.  

도불 이후 파리에서 이응로가 일구어 낸 대표적 작품 시리즈는 ‘문자추상’과 ‘군상’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문자추상’ 시리즈는 한자와 한글의 형상을 평면에 도입해 구성한 작업인데 수묵, 유화, 콜라주, 태피스트리 등 다양한 재료와 경향의 작품들을 남겼다. 동양과 서양의 특정 화법에 치우치지 않고 장르와 매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독자적인 세계를 일군 작가의 열정은 국내외의 미술계에 인정받게 되었다. 1980년대로 접어들어서면 이응로 화백의 실험은 ‘군상’ 시리즈로 이어진다. 추상적 이미지에 국한하지 않고 군중이 어울려 춤추는듯한 기호적 풍경은 서체적 붓놀림이 주는 조형미와 더불어 화백의 예술에 절정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군상이 문자화와 결합된 경향을 보여주었으며 1980년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군상 시리즈를 제작했다. 이른바 1980년 5월 광주혁명 이후 구상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1985년경부터 대량의 군중화가 전개되면서 자신의 화력에 획기적 변화를 시도했다.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20세기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탄생한 군중 시리즈에 작가는 ‘통일무(統一舞)’라는 이름을 부여하기도 했다. 

이상에서 보듯이 이응로 화백의 예술은 <에콜 드 파리>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자유와 실험 그리고 도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그의 작업은 전통 한국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동양과 서양의 융합을 시도했으며 주어진 당대의 삶에 실존적 가치를 부여하는 길을 제시했다. 2차 세계대전이 재정비해 놓은 새로운 조형 질서 속에서 그의 예술은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해 주었다. 이른바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미니멀과 개념미술로 근대의 종말이 선언되고 있을 때 문자와 동양화 추상화를 결합한 새로운 미술은 한글과 한자의 조형적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전통 한지의 질감을 이용한 문자추상의 세계는 이응로 화백이 세계무대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조형적 결실이었다.     

이응로 화백이 떠난 1989년 이후 지구촌의 정치환경은 전에 없이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었고,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지구촌의 질서는 재편되기 시작했다. 격변하는 세월 속에 화백을 기리는 작업도 차분히 진행되었다. 유족인 박인경 여사는 1992년 프랑스 보 쉬르 센(Vaux-sur-Seine)에 ‘고암 아카데미’를 설립해 이응로 화백의 작품과 발자취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2007년 대전광역시는 이러한 노력에 화답하며 이응로미술관을 건립했고 2012년에는 고암미술문화재단이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7년부터 시작된 2년 6개월의 수감 생활 중 밥풀과 고추장과 간장으로 장식해 만든 300여 점의 작품들은 이응로 화백이 이데올로기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는 증거물이 되고 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