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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의 채화 드로잉

김영호



문신의 채화 드로잉

김영호 | 중앙대교수, 미술사학 박사


“문군을 소개한다는 것은 너무나 주제넘은 일 같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의 회화가 그 작가의 사상과 구상(構想)으로부터 표현되는 작품 그것이 곧 그 작가의 품격과 교양에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낡은 사상과 양식의 허의(虛儀)와 화려한 화면이라는 것은 벌써 모조리 주워담어서 조각 배에 띄워버린지 오랜 작가다. (...) 따뜻한 마산이 낳아준 작가 문군을 해방 후에야 알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늦은 감이 있어 섭섭하다.”
길진섭

이 글은 1948년 문신이 서울 동화화랑에서 가진 첫 개인전 서문의 일부다. 당시 서울대 미술학부 교수였던 길진섭이 쓴 평문은 해방공간에서 활약하는 청년 화가에 대한 격려와 칭찬이 가득 담겨있다. 39점의 유화로 꾸며진 문신의 데뷔전에는 동경 유학 시절에 습득한 표현주의적 경향이 그대로 녹아있다. 이후에 전개되는 문신의 회화는 입체주의의 분석적 시각과 조형방식을 거쳐 추상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황소>(1957)는 이러한 모색의 노정을 거치며 성취한 하나의 결실이었다.

문신은 화가였다. 해방 1세대 화가로서 귀국 후 그가 남긴 일련의 작품들은 195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양상과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문신을 한국 현대회화사의 형성과 정착에 기여했던 선구자의 한사람으로 인정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1961년 프랑스로 건너간 문신은 현지 화단의 주류 경향이던 추상화 연구에 몰두했다. 1962년에 제작한 <사랑(L’amour)>이나 1965년 잠시 귀국해 홍익대에서 교편 활동하던 시기에 그린 <알타미라 인상>(1966)은 모두 프랑스 체류에서 얻은 추상화의 성취들이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고희동이 일본 유학을 통해 고전적 인상주의를 수용했다면, 문신은 이후 표현주의와 입체주의 그리고 추상미술의 국내 유입 과정을 반영하는 예술적 행보로 한국 화단사에 나름의 족적을 남기고 있다. 

1967년 재차 프랑스로 건너간 문신은 조각가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파리 화단은 변화의 파고가 높게 일던 때였다. 콘스탄틴 브랑쿠지나 헨리 무어가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가운데 오브제와 설치를 비롯한 실험적 경향들이 모더니즘의 전통을 위협하던 시기였다. 일차 프랑스 체류기간 4년 동안 문신은 파리 근교의 고성(古城)을 수리하며 3차원의 건축적 공간과 조형 방식이 주는 매력에 대한 경험을 몸으로 체득한 상태였다. 아울러 목재가 지닌 물성과 조각 행위에서 오는 신체적 경험은 그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했다. 조각가로서 문신의 노력은 1970년 지중해 연안의 휴양도시 포르 바카레(Port-Barcares)에서 열린 ‘국제조각심포지엄’에 초대되어 <태양의 인간>이라는 제목의 토템 조각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높이 13미터의 거대한 아프리카산 아비동 나무로 조각한 이 작품은 문신을 국제적인 조각가의 반열로 오르는데 기여했다. 

조각가로서의 노정은 문신에게 운명과도 같았다. 순수 추상을 향한 변증법적 모색만이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삶의 치열한 경험이 조형적 모색에 오버랩 되면서 얻어진 자연스런 결과였기 때문이다. 뒤에서 좀 더 살펴보겠지만 문신은 조각의 길에 들어선 이후에도 그림을 접지 않았다. 그림이나 조각이나 그에게는 조형 실험과 삶의 표현을 위한 실존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의 예술 노정 전반에 걸쳐 제작된 채색화와 드로잉들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부언하자면 문신은 회화와 조각이 지닌 특수성을 종합하며 특유의 생명 사상을 수립했다. 일찍이 2차원의 평면에서 3차원의 공간을 학습했고 조각의 길로 들어선 이후 3차원의 볼륨에서 2차원적 일루전의 세계를 발견했다고 할까. 문신은 이들 작품를 ‘채화’라 명명하며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세웠다. 문신의 예술에 있어 채화는 유화나 조각을 위한 밑그림의 차원을 넘어서 있었다.

문신이 채화에는 다양한 주제와 방법들이 동원된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미학 개념으로 제시될 수 있는 용어가 ‘모세혈관의 합창’이다. 문신의 채색 드로잉은 그의 조각에서와 마찬가지로 시메트리의 원리를 근간으로 삼고 있다. 모세혈관은 시메트리 형상의 내면에 자리잡은 세포질을 상징한다. 문신의 채화 드로잉은 형상으로서 시메트리의 표면에 생명 에너지를 돌게하는 줄기들로 설명될 수 있다. 경주를 마친 말의 몸통에 돌출된 혈관처럼 문신의 그림의 기반이 되는 시메트리 형상의 표면에는 그 볼륨을 진동하는 선율들이 숨쉬고 있다. 이러한 어법은 1970년의 조각 작품 <태양의 인간>에서 이미 시도되었던 방식이다. 이러한 ‘모세혈관의 합창’은 문신의 1970년대에 제작된 <에로스 드로잉> 시리즈에서 절정을 이룬다.   

문신 예술의 특징은 ‘조형적 견고성’과 ‘내재적 생명력’으로 규정된다. 주제적 측면에서 보면 문신의 채화와 조각에는 다양한 자연물이 연상된다. 해조(海鳥)나 개미 그리고 비둘기 따위의 이미지들이다. 그가 남긴 채화의 몇몇 작품에서 호랑이나 개미 혹은 인체 등의 구체적인 이미지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관객이 발견해 내는 자연물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업 태도는 비대상적 세계로 부터 연유된 것이라 작가노트를 통해 밝히고 있다. “나의 작품들은 선이 그어진 그 때부터 심적 형상을 의식할 수 있으나 그 작품이 그려지기 이전에 작품화하는 아무런 선입작용이 없다.”  

문신은 자연의 외관을 모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는 자연에서 연유된 어떤 세계가 존재한다. 자연과 생명의 원형이라 할 어떤 세계다. “오직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작업을 하는 동안에 이 형태들이 생명성을 가지게 되며, 궁극적으로 생명의 의미성을 가지게 되기 바랄 뿐이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그의 작품이 자연의 외관이 아닌 자연을 경영하는 법칙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표상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정 자연물의 외형이 아닌 자연의 법칙성를 표상해 내는 방식이 바로 시메트리 구조였다. 시메트리 구조가 조형적 견고성을 나타내는 요소라 한다면 그 시메트리의 표층 아래에 흐르고 있는 에너지가 내재적 생명성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특별전에 출품된 문신의 채화 작업들은 1968년에서 1987년까지 20여 년에 걸쳐 제작된 것들이다. 1980년에 영구 귀국을 한 것을 고려하면 채화는 그의 화력 전체와 함께해 온 장르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그의 조각들이 함께 전시된다. 이 역시 1968년 이후에 제작된 작품들로 흑단과 청동 그리고 스테인리스 스틸 등의 재료를 망라하고 있다. 조각과 채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이번 개인전은 문신의 시메트리 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기회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2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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