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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의 뮤지올로지

김영호



이콘의 뮤지올로지
<러시아 이콘 - 어둠을 밝히는 빛>,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특별기획전    




   뮤지엄 전시실에 걸린 이콘화는 교회나 수도원의 벽면에 설치된 이콘화와는 다른 시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축성의 장소로서 뮤지엄은 사물을 인식적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물로서 이콘은 이른바 뮤지올로지(museology)의 맥락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뮤지올로지의 영역으로 들어온 이콘화는 관람객들에게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예술적 의미를 선사한다. 보는 사람의 견해에 따라서 경제적 가치나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발견해 낼 수도 있다. 하나의 이콘화가 이렇듯 다중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장소의 이동, 즉 전치(轉置)가 만들어 내는 효과 때문이다. 하나의 돌멩이가 강가에서는 무심한 사물이지만 집으로 옮겨와 응접실 선반에 놓였을 때 수석(壽石)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것은 자연물인 동시에 다양한 의미를 지닌 기호(記號)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뮤지엄에 들여온 이콘은 뮤지올로지의 질서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파생해 낸다. 뮤지올로지의 효과는 이렇고 저러한 의미들을 만들어 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의미들을 조합해 특수한 이념(理念)을 만들어 내는 단계로 나아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탄생된 이념은 지역 공동체의 결속을 높이며, 나아가 문화를 생산하는 동력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뮤지엄에 전시된 이콘화가 종교적 세계를 넘어 문화적 영역으로 확장되는 사연이 여기에 있다.    

   이번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특별기획전은 <러시아 이콘: 어둠을 밝히는 빛>이라는 제명을 내걸었다. 동방정교회의 종교적 결실인 러시아 이콘의 세계를 ‘빛의 이념’으로 안내하기 위한 의도에서 정한 것이다. 이러한 제명은 이콘을 둘러싼 종교적 메시지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치며 형성된 이콘의 도상학적 특수성, 나아가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을 타진하기 위한 길잡이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이 제명은 성서에 기반한 이콘화의 내용과 그 내용을 표상하는 상징과 은유의 형식들 그리고 이콘의 가치를 특정 이념으로 연결하기 위한 견인차로 작동한다. 한편, ‘어둠을 밝히는 빛’이라는 부제는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품고 있는 장소성과 역사성에 연동되면서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더해줄 것이다. 박물관이 자리한 이곳은 조선 후기의 사상사적 전환기를 맞아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숨결이 서려 있는 장소다. 따라서 보편적 진리의 빛을 밝히기 위한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염원이 이번 전시의 제명에 담겨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러시아 이콘: 어둠을 밝히는 빛>은 15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러시아 이콘 80여점을 선보인다. 러시아 이콘은 동로마제국의 수도 비잔틴 화파의 성화상을 기원으로 삼고 있다. 988년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동방정교회를 국교로 받아드리면서 러시아 이콘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16세기에 이르면 러시아 이콘의 황금기가 형성되는 가운데 러시아 특유의 성취를 거두게 된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고 1521년 모스크바 대공국이 러시아 지역 국가들을 통일하며 동방정교회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거둔 성취였다. 이 때부터 러시아 이콘은 비잔틴 규범을 준수하면서도 방대한 대륙의 다양한 문화적 특성을 수렴하며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게 되었다. 러시아 이콘이 서유럽에서 시작된 초기 기독교 시대의 성화상이나 비잔틴 제국의 이콘화와도 다른 점들이란 무엇일까? 이번 전시의 관전 포인트는 이러한 질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거대한 대륙의 다양한 지역에서 발전된 러시아 이콘의 지역적 특성을 서로 비교해 보는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러시아 이콘의 도상학적 특수성은 ‘인간적인 감정을 지닌 인물상’에서 발견된다. 동로마제국의 근엄하며 권위적인 위상을 지닌 그리스도의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슬프고 분노하고 사색에 잠긴 그리스도의 모습이 대신해 자리잡게 되었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손으로 만들지 않은 구세주>나 <성모 마리아>는 러시아 이콘의 전성기인 15~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러시아 이콘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좀 더 따지고 보자면 인간적인 감정과 관조의 분위기는 이보다 앞선 12세기의 <블라디미르의 성모>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슬픈 성모’로 소개되기도 하는 이 이콘화는 비잔틴 화파의 손에 의해 제작되었고, ‘승리자의 전리품’이 되어 키예프와 노브고로드 그리고 블라디미르를 거쳐 마지막으로 모스크바에 안착되었다. 앞서 잠깐 설명한 바와 같이 1521년 모스크바 대공국이 몽골을 격퇴하고 통일 러시아를 세우는데 기여한 기적의 <블라디미르 성모>는 각 지역의 무수한 복제품을 통해 러시아 이콘의 특성을 나타내는 도상으로 정착되어 온 것이다.

   17~19세기를 거치며 러시아 이콘은 뒤늦게 유입된 서방교회의 사실주의적 경향을 흡수하며 대중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번 전시회에서 지역과 시대에 따라 나타나는 러시아 이콘의 특성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인간적인 감정과 관조의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다면 관객 여러분은 나름의 성취를 거둔 셈이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무엇이 예수의 모습을 이처럼 분노하고 사색에 잠기도록 만들었을까? 슬픔에 찬 성모의 모습은 어디서 연유된 것일까? 일반적으로 러시아 미술의 공통적인 특성은 ‘치열한 삶의 표상으로서의 리얼리즘’으로 묘사되어 왔다. ‘피와 눈의 나라’로 소개되는 러시아와 러시아인들을 설명하는데 적합한 말이다. 혹한의 기후, 끊임없는 전쟁과 질병 그리고 이민족의 지배를 무수히 겪었던 러시아인들에게 이콘은 구원의 도상이자 어둠을 밝히는 빛이었다. 예술이 시대의 자식이고 환경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러시아 이콘은 척박한 시공을 극복하며 살았던 러시아인들의 가장 진솔하고 위대한 문화 유산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 이콘: 어둠을 밝히는 빛>은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개관 2주년을 맞아 기획한 두 번째 특별기획전이다. 첫 번째 특별기획전인 <현대불교미술전-공>에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설립목표와 정체성을 실천하기 위한 전시라는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설립자이신 염수정 추기경께서 정한 ‘가톨릭 교회가 정한 진리의 보편성을 추구하고 특정 이념과 사상을 넘어 모두에게 열린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문명사적 전환기로 불리는 오늘, 정신문화를 선도하는 뮤지엄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 그 어느때 보다 커지고 있다. 이러한 작금의 현실에서 신생 뮤지엄으로서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가야 할 길은 명확해 보인다. 새 시대가 요구하는 전시사업을 통해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고 소통하고 전파하는 일이다. <러시아 이콘: 어둠을 밝히는 빛>이 이러한 뮤지올로지의 소명을 실천하는 하나의 견인차가 되기를 바란다. 



김영호 |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예술감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20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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