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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묘수 / 빛으로 채워진 공의 세계

김영호



강묘수 / 빛으로 채워진 공의 세계

김영호 | 미술평론가, 중앙대교수


전환의 시대. ‘문명사적 전환기’로 불리우는 21세기의 환경은 예술가들을 새로운 길로 이끌고 있다. 변화의 기류는 수도권에 제한되지 않고 전국의 미술계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모더니즘 미술의 덕목으로 여겨져 왔던 본질과 환원, 절대와 불변의 가치는 무너지고 다원과 확산, 상대와 불확실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른바 자유로운 눈과 정신을 지닌 작가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러한 변혁을 야기한 것은 ‘포스트 코로나’로 대변되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이다. 

돌아보면 회화의 역사는 전환의 역사였다. 전통적인 회화는 재현을 목표로 삼아 종이나 캔버스라는 평면에 3차원의 일루전을 표상하는데 주력해 왔다. 뒤이어 등장한 모더니즘의 시대는 평면적 일루전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캔버스의 물성과 구조 자체에 관심을 두었던 때였다. 하지만 이성과 합리의 형식에 기반한 모더니즘의 행보는 예술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새로운 물결은 상대적이고 불확실한 것의 가치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고, 유기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묘수의 경우 최근 작업에 나타나는 새로운 조형 방식은 우선 ‘평면성의 확장’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회화의 근간인 캔버스를 유지하면서도 2차원의 평면적 일루전 세계를 넘어선 3차원의 물리적 공간으로 확장시키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일견 그의 작품은 형식 실험에 기반한 모더니즘 미술의 연속선상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작가의 창작 의도는 본질과 환원, 절대와 불변의 가치를 넘어선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그의 최근 작업에서 발견되는 것은 유기적 자연과 숭고의 영역이라 할 어떤 것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강묘수의 근작들은 아사천(Linen) 캔버스에 천연재료인 먹을 기조로 삼고 있다. 좀 더 살펴보면 그가 사용하는 아사천은 짜임새가 헐거운 중목(Medium Texture) 원단이다. 캔버스의 표면은 밑칠이 되어 있지 않아 그물망처럼 공기의 흐름이 안과 밖을 원만하게 이어준다. 작가는 올이 숭숭한 표면에 물감을 올리고 먹물로 덧칠의 과정을 반복하며 작업을 완성해 간다. 이 과정에서 아사천 캔버스가 팽팽한 텐션을 갖게 되는 것은 먹물이 품고 있는 아교 성분 덕이다. 수축된 캔버스의 표면이 안료를 받아드려 응고시키며 작품이 마무리 되는 것이다. 작가가 뿌리고 칠하는 행위를 하고 나면 캔버스의 물감은 빛을 머금은 이슬처럼 굳게 될 것이다. 먹물이 응고되면서 나타나는  광택은 일반 안료의 그것과 다른 미적 경험을 선사해 준다. 작가는 빛의 효과를 더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금박을 붙이기도 한다.

강묘수는 자신의 작업 발상을 ‘인타라망’의 개념에서 얻은 것이라 밝히고 있다. 인타라망은 불교의 수호신 인타라가 사는 궁전을 장식하는 거대한 보석 그물인데 각각의 그물코마다 걸린 구슬이 주변의 다른 구슬을 비추고 자신의 빛을 나누며 일체화된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인타라망은 유기적 질서와 관계 속에서 유지되는 생명 현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강묘수의 그림에 도입된 인타라망은 수평과 수직으로 짜여진 아사천의 그물망 바탕에 물감과 먹물의 점들을 흩뿌려 올림으로서 빛의 구조를 만들어 낸다. 캔버스에 몰입하는 작가의 행위에는 인타라망의 세계가 내면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서 유기적으로 짜여진 연기의 세계가 느껴진다면 우리는 작가와 암묵적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강묘수가 선택한 그물망 캔버스와 그 위에 얹혀진 색점들, 그리고 이 모두를 긴장시키는 수평과 수직의 붓질들은 결국 자연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도달한 조형 방식과 이념은 작가로서 지내온 개별적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던 자신의 유년기와 이에 따른 극심한 심리적 방황의 경험을 뒤로하고 있다는 점은 남다른 진정성을 이해하기 위한 대목이다. 치열한 삶의 노정에서 작가가 남긴 다양한 작품 시리즈로 <산책>, <그래픽> 그리고 <신 세한도>는 결국 인타라망의 세계로 다가서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산책> 시리즈는 작가의 자전적 세계를 보여준다. 작품에 등장하는 나비들은 호접몽의 메타포이자 초현실적인 풍경이나 철장 속에 갇혀있는 거대한 알은 우주를 배영하는 작가의 심상을 암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그래픽> 시리즈에서 지속해온 수직선의 조형 방식은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요인들이다. 구름이 덮힌 황혼 무렵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빛줄기처럼 그어진 빛기둥은 숭고의 자연을 떠오르게 한다. 이와 더불어 <신 세한도> 시리즈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점묘의 풍경이자 전통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는 작가의 실험 정신이다. 이렇듯 작가가 그동안 일구어낸 일련의 시리즈는 작가가 걸어온 실험과 모색의 과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정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인타라망 개념을 도입한 <천개의 空-光> 시리즈라 할 수 있다. 작가가 지향하는 세계는 빛으로 충만한 공의 세계다. 
       
강묘수의 <천개의 空-光> 작업은 작가가 걸어온 예술 노정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채택하고 있는 작품의 형식은 모더니즘과 그 이후의 미술사적 계보 속에서 자리를 매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모험과 도전의 결실이라는 차원을 넘어 작가가 거친 삶의 경험을 통해 얻어낸 성취라는 점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향후 작가의 길이 어느 곳으로 향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저간의 작품 시리즈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열정과 진정성을 고려할 때 작가에 거는 기대가 사뭇 크다. 

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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