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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7)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원천, 동토를 밝히는 불빛 ‘이콘’

김영호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 특집 <7>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원천, 동토를 밝히는 불빛 ‘이콘’


김영호 | 중앙대 미술학부 교수



러시아 문화의 중심에는 이콘이 자리잡고 있다. 이콘은 동토 러시아와 러시아인들의 척박한 삶을 비추는 불빛이었다. 차르의 궁정이든 도심의 교회이든 농부의 집이든 러시아인들이 머무는 삶의 공간에는 예외 없이 이콘화가 걸려 있었다. 빅토르 위고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외벽을 ‘돌로 된 성서’라 부른 것처럼, 모스크바의 성 바실리 대성당의 이콘들은 ‘그림으로 된 성서’였다. 이콘은 러시아의 실험적 미술가들에게도 창작의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이었다. 1910년대에 등장한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이콘화에서 자양분을 섭취하며 저마다 독자적인 자신의 세계를 세웠다. 신원시주의를 창시한 미하일 라리오노프와 나탈리야 곤차로바 뿐만 아니라 쿠지마 페트로프-보트킨, 바질리 칸딘스키나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작품에서 이콘화의 형식이나 내용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페트로프-보트킨이 1912년에 그린 <붉은 말의 목욕>은 일견 이콘화를 연상케 한다. 붉은색과 초록색의 강렬한 대비와 대담한 구성 그리고 상징적 서사 방식에 의해 가장 러시아적인 작품의 하나가 되었다.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걸려 있는 이 그림은 다가올 혁명의 시대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그림으로 평가되었다. 칸딘스키는 이 붉은 색에서 ‘파이프 오르간’이나 ‘북소리’가 들린다고 칭송했다. 붉은색과 초록색은 러시아 이콘화뿐만 아니라 민속 공예품이나 민속화에서도 많이 쓰였다. 한편 그림의 소재로 그려진 말 역시 이콘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었다. 1600년경에 제작된 <미카엘 대천사의 기적>은 말을 소재로 삼은 이콘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 이콘화는 순교성인이자 말의 수호성인인 플로로와 라우로 형제가 미카엘 대천사로부터 말 고삐를 넘겨받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하단부에 물가로 내몰리는 말들의 역동적인 형태나 색상은 페트로프-보트킨의 작품과 긴밀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칸딘스키가 1911년에 그린 <성 게오르기우스>는 같은 주제의 이콘화를 비구상적 이미지로 번안해 표현한 사례다. 순수 추상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한 해 전에 그려진 이 그림에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정신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칸딘스키의 창작 의도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의 그림은 18세기의 이콘화 <용을 물리치는 성 게오르기우스>를 떠오르게 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한 이교도 도시 주민들은 매번 처녀를 산 제물로 용에게 바쳤는데 통치자의 딸 엘리사바의 차례가 되어 용이 사는 호숫가로 보내졌다. 이 때 게오르기우스가 나타나 용의 입에 창을 찔러넣고 엘리사바 공주는 자신의 허리띠로 괴물의 목을 동여매어 도시로 끌고간다. 칸딘스키의 그림을 보면 과연 게오르기우스가 거대한 황금색 창으로 우측 하단의 용을 찔러넣고 있다. 이 그림은 ‘실제 대상의 형상을 기억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육화된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내는 이콘화의 본질과 상통하고 있다.

말레비치는 기하학적 패턴으로 칸딘스키를 단숨에 가로질렀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의 탄생을 선언하며 현실에 기반한 추상 세계를 넘어 완전한 비대상의 세계로 단숨에 접어들었다. 여기에 두 개의 그림이 있다. 하나는 말레비치가 그린 <검은 원>이고 다른 하나는 노브고로드 화파의 작가가 12세기에 그린 이콘화 <손으로 그리지 않은 구세주>다. 이 두 점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공통점이 보인다. 우선 화면이 모두 정사각형이고 그 안에 그려진 도상에서 원이 자리잡고 있다. 말레비치는 구세주의 도상을 검은 원으로 대체한 것이다. 그는 1915년에 정사각형의 캔버스에 검은 사각형 하나를 그리며 삼차원적인 공간 세계를 넘어선 유토피아의 영역으로 나아갔다. 정사각의 화면은 러시아 이콘의 고유한 특징의 하나였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행진은 사각형과 원 그리고 십자가를 기반으로 다양한 색채로 변주되었다. 그는 자신의 절대주의가 ‘러시아 이콘의 현대적 발현’이라 주장했다. 말레비치가 말하는 절대란 종교적 도상으로서 이콘이 표상하는 절대와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시하 서울역 근처에 자리잡은 신생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는 <러시아 이콘: 어둠을 밝히는 빛>이 열리고 있다. 내년 2월 27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회에는 15세기에서 19세기에 제작된 러시아 이콘화 57점을 비롯해 성상과 성물 80여 점이 소개된다. <러시아 이콘: 어둠을 밝히는 빛> 전시회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금년 12월 31일에 개막하는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 전시회와 더불어 러시아 미술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더없는 기회가 될 것이다. 


1차 게재 : 한국일보, 2021.11.30.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

특집 <1> 지금, 여기...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

특집 <2> 20세기 예술혁명의 두 얼굴,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

특집 <3> 구미 모더니즘 계보의 중심엔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있다

특집 <4> 1910, 1920년대 도전정신의 결실, 러시아 아방가르드 네 줄기 

특집 <5> 죽음으로써 새 생명 탄생시킨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특집 <6> 퇴폐미술로 찍힌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은신처,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

특집 <7>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원천, 동토를 밝히는 불빛 ‘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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