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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 우주와 생명의 운율을 조각하다

김영호


문신 / 우주와 생명의 운율을 조각하다 

김영호 | 중앙대 교수, 미술사가

1. 프롤로그

  한국미술사에서 문신(1922-1995)은 조각가로 소개된다. 하지만 문신 예술의 성취는 회화와 조각의 장르 경계를 넘어설 때 보다 큰 가치가 주어진다. 잘 알려진 것처럼 문신이 주창한 시메트리 미학은 다양한 경향의 작품을 통해 심화되어 왔다. 문신의 예술세계를 ‘융합미학’이라는 개념으로 총괄하는 이유도 그가 남긴 작품들이 회화, 조각, 드로잉, 건축, 디자인, 공예 등의 장르와 기법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문신의 조각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조각 작품을 논의의 중심에 두되 연구의 방식은 회화를 포함한 다양한 장르를 함께 다루는 것으로 넓히려 한다. 시기는 문신이 일본으로 떠난 1938년부터 마산에서 영면한 1995년을 기준으로 삼아 연대기 방식으로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문신 조각의 재료적 특성에 대해서도 주목하려 한다.

  
2. 타고난 조형적 재능의 발견 1938~60년
  
  문신은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제 강점기에다 중일전쟁1)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시절, 일본으로의 밀항은 16세의 소년에게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일본인 어머니에 대한 낯선 그리움이거나 육신이 태어난 장소에 대한 치기 어린 호기심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일까? 이유는 도쿄의 일본미술학교 입학을 계기로 명확해진다. 문신의 도일은 미술가로서 길을 걷기 위한 유랑적 도전의 첫 행보였다. 
  어느 때든 자식을 둔 부모의 꿈은 큰 도시에서 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문신의 유학은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 부친에게도 알리지 않은 가출과 밀입국, 그것은 평생 동안 자립과 도전의 길을 걸었던 문신의 성격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문신은 일찍이 일본 규슈(九州)로 건너가 탄광촌에서 광부로 일했던 부친의 풍운아적 기질을 잇고 있었다.  
  문신은 1939년 도쿄의 일본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했다. 학교 근방에 자리 잡은 이케부쿠로 몽파르나스2)라는 첨단 예술인촌에 한동안 거주하면서 미술학교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몸에 익혔다. 당시 도쿄에는 공립이던 동경미술학교 외에도 문화학원, 제국미술학교, 태평양미술학교 등이 있었다. 문신이 입학한 일본미술학교는 별도의 선발 시험 없이 만 14세 이상의 남녀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었으며 수업료도 상대적으로 저렴했다고 전해진다.3)   
  일본미술학교 시절의 자료들은 전쟁 중 건물과 함께 소실되었고4) 재학시절에 대한 문신의 기록도 발견되고 있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이 시기에 그린 작품 <자화상>이 한 점이 남아 있어 당시 문신의 화풍을 연구할 수 있는 귀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그가 살았던 첨단 예술인촌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그림은 1943년에 그린 것으로 예술에 대한 작가의 의지와 조형 능력이 잘 드러난 대표작의 하나다. 사실주의에 기반한 인물 묘사에 인상주의의 재료적 물성을 가미한 아카데미 계열의 화풍을 보여준다. 
  1940년 당시 일본미술학교 양화과 교수 및 강사진의 작품 경향은 자유로운 재야의 입장에 있었고, 관전계 화가로 온건한 외광파적 화풍의 오쿠보와 사쿠라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표현주의와 야수주의 경향에 속한 작가들이었다.5) 문신의 <자화상>은 사쿠라다의 화풍을 따르고 있지만 귀국 후 그의 작품 경향은 표현주의와 야수주의적 경향이 주를 이루게 된다.   
  한편, 당시 일본미술학교에는 조소과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문신이 재학중이던 1941년 무렵 조소과 교수로는 요시다 규케이, 하세가와 에이사쿠, 히라쓰카 운이치 등이 있었다. 이들은 관전계 작가들로 정확한 인체표현에 기초하면서도 조형과 물성을 강조하는 인상파 풍의 인체묘사를 특징으로 삼고 있는 작가들로 알려져 있다. 이와 더불어 창원 출신 동향인이자 동경미술학교에 재학하던 김종영의 아틀리에를 빌려 썼다는 문신의 회고는 훗날 조각 세계로 천착하게 된 배경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6)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마산으로 귀국한 문신은 회화와 부조 작품을 제작하며 마산, 부산, 대구 등지에서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 시기의 작품전은 <회화와 부조 전시회>로 표기되고 있어 이미 조각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48년 문신은 서울 동화화랑(현재 신세계백화점)에서 1회 개인전을 개최하고, 이듬해에는 2회 개인전을 같은 장소에서 열었다.  
  이 시기에 제작된 <어부>(1946)는 해부학에 근거한 작가의 인체표현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전문적인 인체 모델링 연구와 실기학습의 결과로 평가되고 있다. <고기잡이>(1948)는 어부와 동일한 주제로 그물을 끌어 올리는 어부를 묘사한 것으로 그림을 두른 액자를 부조로 손수 조각한 점에서 작가의 융합적 실험과 역량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문신의 1949년 서울 동화화랑에서 가진 2회 개인전에 소개되었는데 이 전시회를 방문한 근원 김용준(1904~1967)은 200자 원고지 15매 분량의 장문 리뷰를 통해 그를 상찬하고 있다.7)   
  
“전도가 요원(遙遠)한 예술인 문군(君)을 위하야 과찬일지는 모르나 문군의 예술은 확실히 현화단에 혜성같이 나타난 획기적인 존재다. 유화가 우리나라에 수입된지 삼사십년에 아직까지 필자는 진정한 조선의 예술을 발견치 못하였다. (...) 오직 문군의 화경만이 현재한 그대로 구석구석이 우리 민족의 민족적 방향을 풍기고 있는 것이다.” 

  김용준의 친필 원고는 문신 작품의 소재와 색채 그리고 구도 등을 세세하게 해부하고 있다. 이 글의 지면 관계상 소재와 구도를 다룬 문단만을 발췌해 옮겨보도록 하자.  
 
“그물을 끌어당기는 군상이 있고 승리를 환희하는 소씨름판이 있고 폭우 직전의 해경(海景)이 있고 농촌 생활을 직사(直寫)하는 지게만 그린 풍경이 있고 정물로는 애틋한 정취를 담은 딸기가 있을 뿐 군의 그림과 조각에는 화려함도 없고 사치함도 없고 극히 평평범범(平平凡凡)한 우리 민족이 나날이 보고 느끼고 당하고 하는 길바닥에 깔려 있는 소재이건만 이러한 평범한 소재들이 문군의 화면(畵眠)에 여과(濾過)될 때 다른 어느 작가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실감이 그대로 관자(觀者)의 심금을 따려 울리기도 하고 탄식케도 하는 것이다.” 

“군의 화면은 구도가 또한 참신하다. ‘해경’에서 조감하는 육지를 우편상부(右便上部)로 바짝 올려서 신월형(新月形)으로 위치를 정하는 것이며 ‘광풍노도’에서 닻을 잡으러 물결로 뛰어드는 인물을 파도의 배경에 숨겨서 은은하게 표현하여 화면의 폭을 넓게 보이도록 한 것이며 ‘폭우직전’에서 우편(右便)에 좌하(左下)로 검고 굵은 쏘낙비가 쏟아지고 그 뒤로 광선을 받은 비줄기가 밝게 우하(右下)로 쏟아지며 명암이 조응하게 하고, 원경으로 아직 해볕이 쪼이는 하늘과 산들이 남아 있어 곧 이것이 한편으로 비가 쏟기 시작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 등, 면밀한 계획하에 구도를 작성하였다.” 

  한 해 전인 1948년, 문신은 서울 동화화랑에서의 1회 개인전 서문을 통해 이미 길진섭(1907~1975)으로부터 ‘낡은 사상과 양식의 허의(虛儀)를 벗어버린 작가’라는 찬사를 받은 바 있다.8) 2회 개인전에 덧붙여지는 김용준의 평문은 문신이 당대의 선구적 화가와 평론가로부터 ‘혜성같이 나타난 신진작가’로 인정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들이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신의 작품은 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화면 구성이 입체주의 작가들이 사용했던 다시점에서 대상을 바라보고 하나의 화면에 펼치거나 재구성하는 방식이 일례가 될 것이다. <생선>(1950)과 <닭>(1953)에서 시도된 이러한 표현 방식은 <황소>(1957)에 이르러 심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대상의 형태가 해체되고 기하학적 패턴과 기본의 조형 요소들이 부각 되는 특성을 이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황소의 갈빗대를 연상케 하는 선묘나 펼쳐진 우산살처럼 조형화된 엉덩이는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전과 달라져 있음을 전해준다. 
  문신이 <황소>를 제작한 1957년은 모던아트협회9)가 창립된 해이기도 한다. 문신은 이듬해인 1958년에 열린 3회전에서 1960년의 마지막 전시였던 6회전까지 참여하며 이규상, 박고석, 유영국, 정규, 천경자 등과 함께 자신의 입지를 넓혀갔다. 하지만 문신은 국내 화단에 자족하지 못했다. 그는 1960년 프랑스로 건너갈 것을 결심하고 서울 미우만(美郵滿) 백화점 화랑에서 도불전을 가진 뒤 이듬해 프랑스로 떠나갔다.


3. 건축적 경험에서 입체조형으로 : 1960년대 

  1961년 39세의 나이로 파리에 도착한 문신은 김흥수의 소개로 파리 북쪽 8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라브넬 고성(古城)의 보수·개조 공사를 시작했다. 모던아트협회의 동인으로 참여하며 전위운동에 동참했던 문신이 돌연 파리행을 결정하게 된 계기는 나름 있겠으나, 내면에 자리잡은 독특한 유목적 기질과 도전 의욕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도불은 연고지 없는 모험이었으며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건 도발이었다. 
  문신이 맡았던 라브넬 고성의 보수·개조 작업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화가 문신이 조각가로 전향하기 위한 또 하나의 계기이자 후에 전개될 유기적 형상과 구축적 조각을 잉태하기 위한 실험실이기도 했다. 이 고성은 헝가리 출신 조각가 라즐로 자보10)의 소유로 16세기에 축조된 건물이었다. 문신은 이곳에서 3년 동안 석축 건물의 보수·개조 작업을 하면서 회화와 조각과 건축이 융합된 새로운 추상적 조형 세계에 천착하게 된다.   

“나는 이곳 파리에 온 그날부터 우선의 제작 생활을 위해 생계를 돕고자 옛 석축 건물의 헐은 돌을 들어내고 새롭게 돌 또는 시멘트에다 광물성 물감을 혼합하여 옛 돌과 같은 빛깔을 내어 붙여 굳은 뒤에 다듬고 쌓아 올리는 일을 했었다. (...) 이러한 작업 과정으로 나는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구축적 조각방식을 취하고 있다.”11)
 
  도불 직후 화가로서 문신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모더니즘 미술의 꽃이라 불리우는 추상미술의 순수한 포름이었다. 1963년 여름, 프랑스에 거주하는 한국인 화가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국내 일간지의 설문조사에서 문신은 당시 자신이 본 중요한 전시로 장 아틀랑(Jean-Michel Atlan) 의 회고전을 들었다.12) 아틀랑은 평론가 미쉘 라공(Michel Ragon)에 의해 1960년대에 제안된 ‘추상 자연주의’의 대표적 화가로서 소개된 인물이다. 이와 더불어 파리화단은 안토니 타피에스(Antoni Tapies) 등이 모래와 유화를 섞어 쓰는 기법을 도입하면서 표현주의적 추상(타시즘, 앵포르멜)으로 대변되는 전후 추상미술의 뒤를 잇고 있었다. 이 시기에 문신의 회화작품에 나타나는 생태와 생명 그리고 자연과 환경 등의 주제나, 모래나 석채를 도입한 유화 기법,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오브제의 사용은 이들의 영향으로부터 무관하지 않다.
  1960년대 초반 프랑스의 사회적 상황을 보자. 1959년에 출범한 샤를 드골 정부가 문화부를 신설해 초대 장관으로 앙드레 말로를 임명하면서 파격적인 문화정책 아래 현대미술의 극단적 경향들이 실험되고 있었다. 당대의 대표적인 전위미술의 사례를 들자면 1960년에 결성된 누보레알리즘(Nouveau Realisme)13)과 신구상(Nouvelle Figuration)14)이 있다. 이들 경향은 후기 소비산업사회의 단면을 산업 오브제나 서사적 이미지로 드러내며 모더니즘 시대 이후의 변화하는 시대상을 담아내었다. 하지만 문신은 이러한 전위적 경향보다 당시 파리화단을 주도하던 장 아틀랑의 ‘추상 자연주’와 같은 모더니즘 계열의 회화나 무어와 브랑쿠시의 뒤를 잇는 ‘생명주의 조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15)
  1965년, 프랑스 생활에 적응할 무렵 문신은 잠시 귀국한다. 한 해 전에 파리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난 마산의 초등학교 동창이자 의사로 활동하고 있던 여성과 재혼도 하고 이태원 지역에 정착했다. 귀국해 머무는 기간 동안 문신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강의도 맡았고 작가로서 작품 제작 활동을 왕성하게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그의 귀국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고 다시 이혼의 파경을 겪으며 1967년 8월 프랑스로 재차 떠나게 된다. 이 시기에 문신이 연구했던 작품의 경향은 서울의 신세계화랑에서 가진 도불 개인전 출품작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67년 2차 도불전 리플렛을 보면 유화 20점과 작가 스스로가 ‘플라스틱 아트’라 명명한 입체적인 조형물 7점이 소개되고 있다. 16)이 전시에 출품되었던 문신의 유화 작품들은 대부분 추상적 경향에 기반해 색면과 구성 그리고 마티에르가 강조된 것들이었다. <생태>, <알타미라의 인상>(1966), <와해하는 화석>과 같은 제명을 붙여 놓았다. 이 전시를 본 시인 이흥우는 ‘우주적 생명의 율동’이나 ‘태고의 생물들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것들이었다고 회고한다.17) 
  한편, 개인전에 출품된 입체 조형 작품들은 폴리에스테르를 재료로 사용한 것으로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각’, ‘추상 석고 조명 조각’, ‘플라스틱 아트’ 등의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이흥우는 “석고로 빚어져 갈피들이 겹치고 얽힌 듯한 추상적인 형태들은 넓은 잎의 선인장이나 넓다란 이파리를 가진 열대 바다속 식물, 혹은 동물”의 형태라 설명하고 있다. 입체 작품에 사용된 빛과 관련해 평론가 이구열은 “백색의 자유로운 곡면과 건축적 형체의 작품들은 내부공간에서 발산하는 빛과 더불어 신비롭고 강렬하며 매혹적인 일루전에 사로잡히게 했다”고 소견을 밝히고 있다.18) 도불과 임시귀국 시기를 아우르는 1960년대, 문신의 유화와 입체조형 작품들은 이후 우주와 자연 그리고 생명의 비밀을 품은 ‘구축적 조각’이라는 문신의 고유한 포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문신의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각>은 자보의 <살 수 있는 조각(Habitable Statures>과 자주 비교되고 있다는 것이다.19) 문신은 자신이 1차 프랑스 체류시절에 제작한 작품이 자보의 전시 도록에 자보의 작품으로 소개된 것에 대해 분노하기도 했다. 문신은 미술사학자 시즈롱의 입을 빌려 “다른 이의 작품을 자기 것 인양 행세하는 일은 도적질 이상으로 결코 묵인할 수 없는 일”이라고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1973년 문신이 자보의 고성을 관리하는 아들 초대로 고성을 방문했을 때 그가 묵고 있는 넓은 실내에 ‘문제의 조각’이 세워져 있음을 발견하고 당혹스러운 마음을 글로 남기기도 했다.20) 1차 프랑스 체류 시기의 여러 상황과 작품의 소장처를 고려해 보면 고성의 내부에 설치된 건축적 조각의 제작은 문신이 담당했으나, 이 작품에 대한 소유권은 자보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자보의 고성을 3여년 동안 보수·개조하고 그가 설립한 아카데미에서 가르쳤던 문신이 자보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1960년대 문신의 작품 세계에 내재되어 있는 환경과 자연에 기반한 조형적 개념들은 자보가 내세운 생명, 태양, 신, 태초, 동물 따위의 주제들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문신이 1972년부터 가입했던 도시환경미술 그룹인 <포름 에 비(Forme et Vie)> 역시 자보가 주도하던 단체로 회화와 조각 그리고 건축이 융합된 세계를 지향하는 집단이었다는 점에서도 두 조각가 사이의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다.21) 
  하지만 문신의 일구어낸 조각의 형태들은 문신의 고유한 삶과 예술적 노정 속에 생겨난 결실이었다. 마산과 동경과 파리를 오가며 겪었던 방랑자의 유목적 삶에서 얻은 것이 문신의 세계관이었으며, 유년 시절 남해의 온화한 햇볕 아래서 관찰했던 해조와 곤충의 기억을 추상적 형태로 응축해 나가는 가운데 등장한 것이 문신의 고유한 포름이었다. 1960년대 유럽을 풍미했던 생명주의 조각의 영향으로 구체화된 문신의 이 조형적 성취는 후에 시메트리 미학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미학의 성취는 자보나 무어 그리고 브랑쿠시의 작품과도 차별되는 문신의 고유한 결실이었다.

        
4. 독창적 추상조각의 전개와 발전 1970년대 

  2차 도불 시기에 속한 1970년은 조각가로서 문신에게 중요한 해였다. 지중해 휴양도시 포르 바카레스(Port Barcares)의 백사장에서 열린 국제조각심포지엄에 거대한 통나무 조각 <태양의 인간>을 제작한 해였다. 지금도 인공위성 사진을 이용한 ‘구글 어스’ 프로그램을 통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크기의 <태양의 인간>은 문신이 국제적 조각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작가들과 네트워크를 다질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문신과 함께 국제조각심포지엄에 함께 참여했던 베라 세크리(Vera Szekely)는 문신이 파리에서 알게 된 리아 그랑빌러(Lia Grambilher)와 함께 문을 연 그랑빌러 화랑의 개관전을 장식했다.22) 
  <태양의 인간>은 이 시기의 대표작이자 조각가로서 문신의 인생 노정에 이정표를 세운 작품이다. 높이 13미터에다 직경 1미터 20센티의 아비통이라 불리는 거대한 아프리카산 통나무를 보는 위치에 따라 반구 24개, 공이 12개가 쌓여 올라가는 형국이다. 거대한 통나무를 전기톱과 끌과 망치로 조형해 낸 작가의 열정과 능력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의 조형 형식은 후에 문신의 환경 조각 작품으로 이어지면서 급기야 서울의 올림픽공원에 설치된 <올림픽1988>에 이르러 정점을 찍고 있다. 
  <태양의 인간>은 토템 조각으로서 신비적 상징성과 목재가 지닌 물성과 반구형 형상을 이용한 구축적 조형미를 보여준다. 이와 비교되는 <올림픽1988>은 스테인리스강을 재료로 삼은 것으로, 작품 표면의 거울효과를 이용해 조형물 주변의 풍경을 작품으로 끌어안고 있다는 점에서 도시 공공조형의 새로운 장을 마련해 주었다. 관객들은 야외에 세워진 거대한 진주알 모양의 조형물 속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과 주변 풍경을 보며 조각과 환경이 어우러진 특이한 세상을 체험하게 된다. 
  한편 <개미>는 문신의 추상조각에 생명과 자연의 의미소를 덧씌운 작품으로 1970년대가 낳은 또 하나의 대표작으로 소개된다. 문신은 자신의 친필 원고를 통해 자신의 작품은 특정한 동물이나 식물의 형상을 참고하여 구상되지 않았음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 자체의 현실을 가진 형태들이다. 즉 주제가 없지만 그들 자체의 실재를 가진 포름들이다. 오직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작업을 하는 동안에 이 형태들이 생명력을 가지게 되며 궁극적으로 생명의 의미성을 가지게 되길 바랄 뿐이다.”23) 

  문신 조각의 출발점은 순수 조형 그 자체였다. 하지만 결과로 나타난 형상에서 개미나 해조 따위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음에 대해 문신은 부인하지도 않았다. 그의 작품에 <개미>나 <해조> 라는 제명이 붙여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연 이미지와 추상 이미지 사이를 오가며 대자연의 질서나 법칙성을 표상하는 방식이 문신 작품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이러한 순수형상과 자연의 법칙성을 아우르는 미학 개념으로 탄생한 것이 문신의 ‘시메트리’ 개념이다.
  이상에서 보듯 문신의 작품은 추상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문신의 추상 세계는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며 비가시적인 법칙이 생명 현상을 지속시키는 원리로 표상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조형 의지와 형식을 통해 드러난 개미와 해조라면 그의 작품은 개미의 추상이자 해조의 추상이며 나아가 ‘자연과 생명 현상의 추상’이라 부를 수 있겠다.
   1970대 문신의 전시 활동은 주로 살롱전을 통해 이루어졌다. 살롱 아르 샤크레(Salon Art Sacres), 살롱 그랑 에 쥔느 도주르디(Salon Grands et Jeunes d’Aujourd’hui), 살롱 드 마르스(Salon de Mars), 살롱 드 메(Salon de Mai), 살롱 콩파레종(Salon Comparaisions) 등의 전시회에 참여하고 있다. 아울러 문신은 포름 에 비(Forme et Vie)24) 회원으로 가입해 정기적으로 작품을 선보였다. 1975년 문신은 파리 남쪽 30여 킬로미터에 떨어진 프레터(Fretay)에 농가 창고를 빌려 작업실로 개조하고 정착했다. 1976년 이후부터는 서울과 마산 등지에서 귀국을 준비하는 개인전도 열고 파리의 살롱전에는 지속적으로 작품을 보내며 프랑스 화단과 연을 이어나갔다. 급기야 1979년 화가 최성숙과 결혼은 문신의 노정 전환에 새로운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5. 시메트리 미학의 완성과 새로운 재료에의 도전 1980~90년대 

  1980년 영구 귀국하여 마산에 정착하면서 문신은 숙원사업인 문신미술관 건립에 착수하는 한편 자력으로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개인전을 개최하고 공공 조형물을 제작하는데도 관심을 보인다. 1984년에 제작된 <화>는 스테인리스강을 사용한 첫 작품이며 경남도청 조형물로 만들어졌다.25) 이렇게 시작된 공공미술 작품은 진주 남강대교, 한일구룹 사옥, 부산일보 사옥, 제일은행 본점 사옥 등의 조형물을 거쳐 드디어 1988년 서울올림픽 국제야외조각초대전에 설치된 <올림픽1988>으로 이어진다. 

  1980년대에 문신이 거둔 성과의 하나는 조각의 재료로서 스테인리스강의 도입이었다. 스테인리스강은 목재나 청동 그리고 석재와는 다른 물성과 효과를 발생시키는 매체다. 문신이 즐겨 다루었던 목재나 석고 그리고 폴리에스테르와도 다른 기능과 효과를 발생 시킨다. 스테인리스강의 가장 큰 특성은 부식으로부터 자유롭고 거울효과를 오랫동안 유지한다는 점이다. 주변을 비추어 품은 작품은 그 자신의 형태와 주변 환경 사이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최소화하고 서로의 이미지를 융합하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재질의 특징은 도시 환경미술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던 문신의 작업 의욕을 한층 더 자극했다. 1970년에 제작된 목조 <태양의 인간>이 품었던 토템과 축조의 구조가 감상자의 심연을 향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대상으로 작용했다면, 1980년대 후반에 제작된 스테인리스강 재질의 <올림픽1988>은 감상자의 시선을 외부로 향하게 하고 우주적 세계로 확대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1984년 경남도청에 조형물 <화>를 설치한 이후 문신은 같은 제목으로 다수의 시리즈를 제작했다. 1988년의 <화I>26)은 이전의 작품과 동일한 형태지만 크기를 좀 더 키워 만든 것이다.27) 한 쌍의 잣나무 씨앗 혹은 두 마리의 비둘기가 입맞춤하는 형상은 제목이 알려주듯이 화합과 조화와 통일의 상징이자 나아가 단일과 융합의 세계를 품은 작품으로 정리된다. 빛을 반사하는 금속 표면의 효과는 작품이 설치된 주변의 모든 것들을 품고 있다. 그것은 일루전의 세계이자 시메트리의 구조 안으로 들여온 자연의 추상이다. 이 시메트리 구조의 발견은 작품의 형식과 그 형식속에 투영된 자연 이미지를 예술적 차원으로 이끄는 근간이 된다. 동일한 것의 중복과 그 이중적 구조에 비친 하나의 세계에 대한 미학적 해석의 가능성, 이것이 형식과 내용의 일치를 이루는 문신의 작품 <화I>이 분출하는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신은 같은 해인 1988년에 <화II>를 제작했다. 이 작품은 이전의 작업과 동일한 미학 원리와 재료를 사용하고 있으나 형태는 크게 차이가 난다. 이른바 좌우 대칭의 구조 속에 펼쳐지는 비대칭의 미학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파격이 숨겨져 있다. 이른바 ‘비대칭적 균제미’라 할 수 있는 형상이 그것이다. 날카로운 직선과 부드러운 곡선이 융합되고 차가움과 따사로움이 서로 어우러지며 예리한 창끝과 하트의 열정이 교차되는 체험을 선사해 주는 작업이다. 이러한 이유로 <화II>는 시메트리 미학을 가장 대담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이 작품은 독일 작곡가들의 창조적 영감을 자극해 문신에 대한 헌사곡을 창작케 한 바로 그 작품이기도 하다. 
  문신은 1989년 스테인리스강으로 <화III>28) 을 제작했다. 이상의 I, II, III은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야외조각장에 설치되어 있다. 문신은 이 외에도 1991년에 <화>라는 제명의 대형 작품 2점을 제작했는데 스레인리스강 재질의 작품은 가나아트센터에, 브론즈 재질의 작품은 숙명여대 백주년기념관 앞에 각각 설치되어 있다.     

  ‘우주를 향하여’ 시리즈 역시 조각가로서 문신의 전성기인 1980년대를 장식하는 대표적 작품 연작이다. 1985년에 시리즈의 첫 작품 <우주를 향하여I>을 스테인리스강으로 제작한 후, 1988년에 <우주를 향하여II>를 같은 재료로, 1989년에는 브론즈 재질로 <우주를 향하여III>와 <우주를 향하여IV>를 연이어 제작했다. I. II, IV는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III은 유족이 소장하고 있다. 이 외에도 1979년에 흑단으로 조각한 작품과 같은 형태의 작품을 1989년에 브론즈 재질로 다시 제작한 작품에도 <우주를 향하여>라는 제명을 붙였는데, 이 작품은 현재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문신에 있어 우주는 생명과 대자연의 법칙성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된다. 문신의 작품은 좌우 대칭형을 이루고 있으나 언제나 자연이 개입하는 범위 안에서의 오차를 허용한다. 떡잎의 형상이 대자연의 지배 속에서 시메트리의 원리를 따르지만 세상의 풍파와 특수한 조건에 상응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형태로 변하는 것과도 같다. 이것이 단일성과 다양성 사이에 설정된 모순적이면서도 조화로운 관계이며 이는 곧 대자연의 이치를 파악하는 통합적 원리가 된다. ‘우주를 향하여’ 시리즈는 문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나타내며 ‘화’ 시리즈는 그 조형적 표상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신은 1990년에서 1992년까지 유럽 순회 회고전을 열었다. 파리아트센터를 서두로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 국립현대미술관, 사라예보 시립현대미술관,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국립역사박물관, 파리시청의 현대미술관인 살 생장에서 그의 대표작들이 전시하며 전성기를 구가한다. 하지만 세월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문신은 1992년 1월 초, 위암 진단을 받았고 1994년 숙원의 문신미술곤이 개관한 이듬해인 1995년 5월 24일 타계했다. 향년 72세였다.


6. 에필로그  

  문신이 세상을 떠난 지 12년째로 접어드는 2006년 여름, 독일의 남서부에 자리 잡은 세계적인 휴양도시 바덴바덴에서 전대미문의 아름다운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2006 독일월드컵 개최를 계기로 바덴바덴시가 문신초대전을 열고 작품 10점을 레오폴트 광장 일대에 설치했는데 이를 본 현지 음악인들이 문신에 대한 헌사곡을 줄지어 창작하게 된 것이다. 문신의 시메트리 미학이 국경을 넘어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니 아름답고도 경이로운 사건이었다.29) 이를 계기로 2007년에는 앙상블 시메트리 탄생하고 마산, 장흥, 서울 등지에서 대규모 내한 공연이 실연되었다. 
  2010년에는 마산시가 제1회 문신국제조각심포지엄을 기획해 세계 각국의 유명조각가 10명30)을 초청해 마산 문신미술관이 자리한 추산공원 일대에 국제조각공원을 조성했고, 이를 계기로 창원조각비엔날레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문신미술관은 창원, 마산, 진해가 통합되면서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개관했고 석고원형을 위한 전시시설도 보강되었다. 2020년에는 문신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사업회가 출범되었고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대규모 문신회고전 <우주를 향하여>가 개최되었으니 문신의 예술의 여정은 국가적 차원의 역사로 편입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문신은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예술가 문신을 기억해야 하는가? 일본 규수에서 광부로 일하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혼혈로 태어나 일본과 마산 그리고 프랑스를 유목하며 고독과 도전의 삶을 살았던 예술가. 문신의 예술적 노정은 격변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노정과 다르지 않다. 그의 작품은 그 역사를 품은 증거물로 다가온다. 그는 식민과 해방 그리고 전쟁과 재건의 세월 속에서 굴하지 않고 스스로를 세웠던 한국인의 초상이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예술의 가치로서 시메트리는 그 격변의 우주에서 찾은 생명의 운율이었다. 문신의 예술은 우리의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었으며 그 거울 속에서 우리들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다.

2022.10
  


1)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과 일본제국 사이의 대규모 전쟁. 연합국에 대한 일본의 항복으로 종결되었고 전사자 300만여 명을 포함해 2,000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2)  이케부쿠로 몽파르나스는 일본 지명인 이케부쿠로에 파리의 몽파르나스 지명을 합해 만든 예술인촌의 이름으로 문신의 거주했던 시마나치(椎名町)를 포함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3)  일본미술학교는 1918년에 설립된 사립학교. 1940년대 일본미술학교의 전공은 서양화, 일본화, 조소, 도안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문신이 재학 당시 조선인 유학생으로는 곽인식(서양화), 배정례(일본화), 김정수(조소) 등이 확인되고 있다. 김지영, <문신의 초기 작품에 대한 일고찰: 일본 유학을 단서로 하여>, 문신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심포지엄 자료집, 국립현대미술관, 2022, pp.7~8.

4)  일본미술학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교사가 파괴되어 학적부를 비롯한 자료들이 소실되었고 2018년 폐교되어 재학 사실이나 수학 내용 등 공식자료를 통한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위의 글, pp.5-7

5)  위의 글, pp.10-11.

6)  위의 글, p.16.

7)  김용준, ‘문신군의 예술, 혜성같이 빛나는 그의 개인전을 보고’, 숙명여대문신미술관 소장 친필원고, 1949.

8)  길진섭, ‘문신군의 작품’, 제1회 개인전 브로슈어 서문, 1948. in 김영호, <우주를 조각하다: 문신의 예술세계>, 한길사, 2022 pp..131-133.

9)  모던아트협회는 국전에 거리를 두고 활동하던 30~40대 중견작가들이 조직한 재야 미술단체. 이규상, 박고석, 유영국, 황염수, 한묵에 의해 1957년 1월 설립되었고, 같은해 4월 동화화랑에서 창립전을 연 이래 1960년까지 총 6회의 협회전을 개최하였다. 1957년 11월 2회전을 거쳐 1958년 6월 3회전부터 문신, 정규, 정점식이 가입했고, 같은해 11월의 4회전부터 김경, 1960년 7월 마지막 6회전에는 천경자, 임완규가 참여했다. .

10)  라즐로 자보(Laszlo Szabo, 1917~1984)는 헝가리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전쟁을 피해 스위스로 떠나온 후 미술을 익힌 조각가. 1947년 파리에 도착해 헨리 무어와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영향을 받은 유기적 형태의 추상 조각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1950년에는 불의 아카데미(Academie du Feu)를 설립하고,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건축-조각을 제작하며 프랑스로 건너온 각국의 청년 작가들에게 제공했다 그의 작품은 생명의 나무, 태양의 신, 태초의 동물 등을 주제로 삼고 있어 1961년 입국해 3여년 동안 자보의 고성을 보수·개조했던 문신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주었음을 짐작케 한다. 

11)  문신, 작가노트, <Moon Shin ; Drawings>, pp.27-28 ???

12)  <재불 화가들의 발언>, 조선일보, 1963년 8월 2일자.

13)  1950년대 유럽 미술계를 풍미했던 추상미술에 비판적 시각을 갖고 후기 산업사회의 현실에 주목했던 그룹. 일상적 오브제를 차용해 생경하게 제시하며 기존의 회화와 조각의 개념을 확장시키는데 기여했다. 대표작가로 이브 클랭, 아르망, 장 팅겔리, 크리스토, 세자르, 앵즈 등이 있다. 

14)  전후 추상미술에 대립하여 1960년대 초에 새롭게 부활한 구상회화 경향을 나타내는 용어. 일상적 현실과 신화 사이의 숨겨진 관계를 분석하고 미디어와 정치 등 동시대적 상황을 드러내는데 주력했다. 대표작가로 아다미, 에로, 모노리, 텔레마크 등이 있다.

15)  이윤수, <1960~1970년대 자료를 통해 본 조각가 문신의 조형관>, 문신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심포지엄 자료집, 국립현대미술관, 2022. p.55

16)  문신 도불 작품전, 신세계 전시장, 1967.6.23.~6.30

17)  이흥우, <내재하며 비상하는 생명력>(1994), 『문신의 삶과 예술 세계』, 종문화사, 2008, p.123.

18)  이구열, <시메트리의 변환>(1981), 『문신의 삶과 예술 세계』, 종문화사, 2008, p.64.

19)  1968년 자보는 자신의 유럽 순회 개인전 도록에 문신이 1960년대 초반에 제작한 건축적 조각 <살 수 있는 조각>을 자신의 1950년 작품으로 소개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도록에 실린 작품 사진 속에는 문신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1961년에 프랑스 땅을 처음 밟은 문신이고 보면 연도 표기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자보 소유의 라브넬 고성에 축조되어 있어 이 건축물의 수리·보수를 맡았던 문신이 자보의 의뢰를 받고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문신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각> 시리즈를 일시 귀국한 후에 제작했고 1967년 신세계화랑에서 가진 2차 도불전에 출품했다.  

20)  문신은 조각가이자 자보의 성을 관리하고 있는 큰아들 초대를 받아 고성에 머물며 브론즈 제작을 위한 용광로 설치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문신 <마에스트로 문신 1: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평가 받는다>, 미인, 2009, p.213. 

21)  <포름 에 비>는 ‘형상과 삶’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로서 도시와 환경 그리고 미술의 통합을 지향하는 그룹이었다. 자보와 문신을 비롯한 이 그룹의 작가들은 ‘살롱 드 라 존느 스컬프튀르’나 ‘살롱 드 메’ 등의 전시를 통해 조각 작품이 실내 공간을 벗어나 도시 공간의 공공 영역에 배치되는 것을 지향했다. 

22)  헝가리 출신 미술가로 1940년대에 프랑스로 건너와 조각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세크리는 후에 조각 외에도 도자기, 모자이크, 태피스트리, 스테인드 글래스 등의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했다. 1950년대에는 금속, 나무, 밧줄, 직물, 철 등의 재료를 사용했던 융합형 작가로 이름을 알리는 등 문신의 노정과 유사한 부분이 적지 않다. 세크리는 1980년대에는 파리시립근대미술관(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 de Paris)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23)  김명숙, <20세기 한국이 낳은 조각가>(2005), 『문신의 삶과 예술 세계』, 종문화사, 2008, p.166.

24)  프랑스에서 결성된 회화, 판화, 조각, 건축을 함께 전시하는 도시환경미술 그룹으로 문신은 1972년부터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25)  이 작품은 현재 경남도립미술관 야외조각장으로 옮겨져 설치되어 있다. 

26)  이 작품 <화I>의 영어 표기는 <UnityI>, 불어 <UnitéI이다. 하지만 유럽 순회 회고전의 자료에는 <Concorde(화)>(1990년 유고슬라비아 전시) 또는 <ConcordeI(화I))>(1991년 헝가리 전시) 등으로 되어 있어 혼란을 야기시킨다.

27)  경남도립미술관에 설치된 <화>의 크기는 191x269x65cm이고,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에 설치된 <화I>은 276x400x92cm이다.

28)  이 작품의 외국어명 표기는 <UniteIII>이다. 하지만 유럽 순회 회고전의 자료에는 <Unité>(1990년 유고슬라비아 전시) 혹은 <UniteI(화I)>(1991년 헝가리 전시) 등으로 되어 있어 역시 혼란을 야기시킨다. 

29)  김영호, <우주를 조각하다: 문신의 예술세계>, 한길사, 2022, pp.51~92, ‘제2장 조각이 만들어낸 음악’에서 세 명의 독일 작곡가, 보리스 요페, 안드레아스 케르슈팅, 그리고 볼프강 마르슈너와 그들의 헌정곡을 만든 경위를 소개하고 있다.  

30)  데니스 오펜하임, 로버트 모리스, 피터 버크, 장 뤽 빌무스, 세키네 노부오, 가와마타 타다시, 왕루엔, 쉬빙, 박종배, 박석원 등 10명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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