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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섭과 피파레티의 공명(Resonance) : 추상미술의 계보를 찾아서

김영호



황호섭과 피파레티의 공명(Resonance)
: 추상미술의 계보를 찾아서

김영호 | 중앙대교수, 미술사가 


추상미술이란 무엇인가? 요즘 이러한 질문을 하는 이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시간을 거슬러 100년 전으로 올라가면 질문의 무게는 달라진다. 추상미술이 유럽과 러시아에서 처음 등장했을 때 그 파장은 20세기 전체를 공명시킬 만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원근법과 명암법으로 재현된 세계가 시각적 한계의 표상이자 환영(Illusion)일 뿐이라는 사실에 회의를 느낀 화가들은 점차 자연과 존재의 본질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순수조형의 세계에서, 또 어떤 이들은 종교적 절대의 세계를 통해서 위대한 모험의 실마리를 풀어갔다. 전위 패러다임의 동력으로 성장한 추상미술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힘을 키워 지구촌의 주류 미술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른바 추상미술 2세대로 불리우는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의 이름으로 대륙의 경계를 넘어선 국제적 경향이 되었다. 미니멀아트에 이르러 이 위대한 추상미술의 노정은 스스로 종식을 고했지만 그 여진은 세계로 퍼져나갔다. 한국의 단색화와 일본의 모노하(物派) 운동은 구미 추상미술에 대한 동아시아의 응답이었다. 1970년대에 이르면 추상미술은 동·서양을 아우르는 조형 언어가 되었다. 그리고 밀려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에 영향을 받으며 또 한차례 변신을 시도했다. 이른바 추상미술 3세대의 등장이다. 1910년대에 발원하여 오늘에 이르는 추상미술의 계보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가나아트 보광에서 추상미술의 지속가능성을 타진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규모는 작지만 미술사를 끌어안아 되새길 기세의 전시회로 보인다. 1980년대 파리의 명문 장 푸르니에 갤러리(Galerie Jean Fournier) 소속이던 두 명의 작가를 소개하고 있다. 지금은 한국과 프랑스에서 각자의 노정을 걷고 있는 황호섭과 베르나르 피파레티(Bernard Piffaretti)가 만났다. 이들을 한데 모은 이유는 두 사람 모두 1955년생이며, 전설의 거상(巨商) 장 푸르니에가 발굴하고 생전에 아끼던 작가들이라는 사실 외에 추상회화의 경향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입지를 세운 세대의 작가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이 전시회에 내놓은 작품은 모더니즘의 꽃이라 불리우는 추상미술 3세대의 계보 속에 위치한다. 추상회화의 1세대를 1910년대의 칸딘스키와 말레비치로 보고 2세대가 전후 세대인 1950년대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피에르 술라주(Pierre Soulages)와 잭슨 폴록 등의 작가들이라면, 1980년대 이후를 살아가는 이들은 추상미술의 3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가나아트 보광의 전시는 이 두 작가가 1990년대와 그 이후의 시기에 제작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회가 추상회화의 계보와 그 지속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황호섭의 추상미술은 독자적인 조형 원리를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미술사의 계보 안에서 보편적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한 <무제(Untitled)> 연작은 전통적인 그림과는 사뭇 다른 조형 방식을 취하고 있다. 작가는 화면에 붓질을 가하지 않고 드리핑 기법을 이용해 물감을 흩뿌리는 것으로 작품을 시작한다. 미술사에 잘 알려진 기법이다. 그러나 그의 드리핑 기법이 추상표현주의 작가인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과 동일한 조형 방식이나 창작 원리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캔버스의 표면에 흩뿌려진 다양한 컬러의 아크릴릭 물감 알갱이들은 응고의 시간과 더불어 건조되기 시작하지만, 이내 작가가 분사하는 물줄기에 의해 중심이 씻기면서 실반지와 같은 원형의 무수한 색 띠 알갱이들로 변신한다. 반복되는 흩뿌리기와 응고의 기다림 그리고 씻김의 과정을 거치며 작품은 서서히 기호적 의미를 품은 실체로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작가는 캔버스 위에서 무당의 몸짓으로 물감을 흩뿌리고 물줄기를 휘둘러 흔적을 씻어내며 우주의 기운을 모으는 축성의 예식을 행한다. 화면에서 벌어지는 씻김굿 같은 일련의 퍼포먼스를 통해 얻어낸 결실에 작가는 ‘별의 먼지(Poussières d’étoiles)’라는 애칭을 붙였다. 헤아릴 수 없는 별들로 채워진 무한의 우주 공간이거나 에너지로 소용돌이치는 북극의 오로라(Aurora) 세계가 거기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황호섭의 작품 앞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무한 공간과 불가항력의 경험을 우리는 숭고(sublime)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알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세계를 대하며 얻게 되는 두려움 속의 쾌감이다. 구리, 사금, 망간, 운모 따위의 광물이 섞인 안료가 연출해 내는 신비로운 빛의 효과는 숭고의 감정에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 황호섭의 작품은 추상미술의 모험으로 불리는 모더니즘 미술사의 계보를 따르면서도 모더니즘 미술사가 쳐놓은 형식주의의 그물에서 벗어나 새로운 서사적 추상미술의 노정을 개척해 왔다. 드리핑 기법으로 화면에 얹혀진 물감이 마르는 적정의 순간들을 물줄기로 씻어내리며, 통제된 우연의 존재를 흔적으로 남기는 그의 작업은 바위에 석화(石花)를 피워내는 영겁의 시간을 축소해 놓은 듯 영험한 기운마저 맴돌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작가는 바람 에너지를 이용해 물감을 꽃처럼 퍼트리는 작업으로 조형 방법을 진전시키고 있다. 에러 브러시를 사용해 찾은 조형의 서사적 의미들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허공에 피어나는 꽃의 형상이자 우주 공간에 부유하는 행성들이다. 불가사이 하고 유기적인 대자연의 세계가 캔버스에 여전히 펼쳐진다.  

피파레티의 추상미술은 황호섭의 그것에 비해 보수적이다. 붓에 의해 물감이 올려진 화면은 보는 이에게 전형적 추상회화 세계의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캔버스를 수직과 수평으로 분할하며 그어진 색선들, 그 안에 가두어 칠해진 비정형의 화려한 색면들, 그리고 그 색선과 색면의 피부를 스크래치 하듯 그어놓은 붓질의 자취가 한데 어우러지면서 다채로운 시각적 정감을 선사하고 있다. 때로 화면에는 알약과 같은 타원의 형상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격자무늬를 이루는 단순한 사각형 혹은 삼각형의 색면들이 화면을 구축적 조형의 세계로 유도한다. 피파레티의 작품은 기하학적 패턴과 서정적 패턴이 함께 공존하며, 이 두 개의 영역을 융합한 색면추상의 형식으로 수렴되기도 한다.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추상미술의 오랜 경향들을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작품 세계가 추상의 계보학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파레티의 작품이 지닌 차별성은 독자적인 조형 형식에서 발견된다. 그의 화면은 ‘동어반복의 이중 구조’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캔버스의 중심을 관통하는 수직선으로 화면을 둘로 나누고 각각의 화면에 반복적 형상을 채워 넣는 것이다. 이른바 쌍둥이 그림이다. 이러한 조형 방식은 피파레티의 예술 노정 전체를 아우르는 고유한 특징이라 할 것이다. 

피파레티의 동어 반복적 그림에는 시간성이 존재한다. 반쪽의 그림을 완성하고 다른 하나의 그림을 순차적으로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인지적 개념으로서의 시간성이다. 나아가 이 시간성은 차이를 만들어 낸다. 하나의 화면 위에 두 개의 이미지가 순차적으로 복제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런 차이가 숨쉰다. 피파레티의 추상미술은 이렇듯 시간성과 차이의 개념을 파생시키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시간성과 차이는 추상미술 100여년을 축소해 담아낸 시간성이자 그 시간이 만들어 낸 동질의 존재들 간의 차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는 추상미술이 야기한 조형 방식과 표현의 원리들이 함축되어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전통을 복제 이미지의 통합적 화면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이른바 메타 회화(Meta-Painting)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작업은 추상미술의 계보 속에 머물러 있으며 동시에 그 조형 원리로부터 벗어난 실험의 노정에 위치하고 있다. 

가나아트 보광에서 열린 2인전은 추상미술의 계보를 되새김하는 하나의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40여년 전 파리에서 인연을 맺은 두 작가가 자신의 고유한 예술 노정을 걸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조합에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 사연은 바로 미술의 계보학이 지닌 효과 덕이라 할 수 있다. 계보학은 동질 속에서의 차이를 발견해 내는 학문이다. 추상미술을 정점으로 삼고 있는 모더니즘의 계보학은 20세기 후반 미니멀리즘에 의해 결실을 거두며 동시에 종말을 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모더니즘 미술의 뒤를 잇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이 다원성에 있다면 이 새로운 포용의 시작은 모더니즘 미술사를 포괄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프로젝트’라는 시선은 여전히 타당한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겨나는 차이는 비단 미술의 영역에 국한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대자연의 이치가 그렇고 우주의 질서가 그러할 것이다. 

다시 정리해 보자. 황호섭의 경우 캔버스에 무수하게 나타나고 사라지는 물감의 포말들은 물질계를 이루는 원소의 생성과 소멸 현상과 비교될 수 있다. 피파레티의 경우 동어 반복적 패턴의 듀얼 화면이 보여주는 시간성과 차이의 개념 또한 원형적 패턴 속에서 저마다 차이를 통해 존재의 특수성을 나타내는 대자연의 이치와 다르지 않다. 지구촌에는 80억의 인간이 살고 있으나 동일한 형상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 그 뿐일까. 호모사피엔스의 출현 이래 지속되어 온 영겁의 시간 속에 동일한 형상의 인간 역시 존재하지 않은 것이 대자연의 신비로운 속성이다. 추상미술 3세대의 작가들이 지닌 개체적 특성들은 개인의 범주를 넘어 동시대를 사는 추상미술 영역의 화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가나아트의 2인전 제목으로 붙여진 <공명하다(Resonner)>의 의미가 더없이 정겨운 사연이 여기에 있다.

2022.12


황호섭 무제 2006 


베르나르 피파레티 무제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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