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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묵 / 책 이미지로 표상된 실존적 자의식

김영호




양묵 / 책 이미지로 표상된 실존적 자의식   

 
김영호 | 중앙대 교수, 미술사가

양묵의 개인전에서 관객들은 일종의 당혹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전시실 벽면에 걸린 거대한 책 그림 신작들은 단일한 조형 방식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책의 기호적 의미를 해체하는 역설적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역사와 진리의 기표(記標)로서 다루어져 온 책의 도상과 텍스트의 기록 방식을 비틀어 표상함으로써 관객의 보편적 지각 경험을 끝없이 미끄러지게 만든다. 이러한 책 이미지의 구현 방식에 대해 작가는 ‘세상의 모든 텍스트와 정보 이미지의 이율배반적인 기능에 대한 사유의 몸짓’으로 규정하고 있다.
     
양묵이 개인전에 내놓은 신작들의 단일한 조형 방식이란 무엇일까. 펼쳐놓은 거대한 철판 재질의 책자 표면에 여러 개의 탄흔(彈痕)과 못으로 긁어낸 상흔(傷痕)을 나타낸 것들이다. 굳이 세분해 본다면 탄흔과 상흔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묘사된 시리즈, 문자 이미지를 지워낸 흔적으로 나타낸 시리즈, 화면에 올려진 이미지의 포커스를 흐리게 하여 모호한 기억상으로 제시한 시리즈 등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이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정보화된 텍스트가 지닌 인과 관계적 구조를 해체하려는 작가의 실험 의식’이라 하겠다.



History...Self-Exhistance. No.16 2022, 162x130.3cm, oil on canvas, Graphite


      

History...Self-Exhistance. No.4 2022, 116.7x91cm, oil on canvas


양묵의 책 그림은 개인의 삶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공공의 기능을 지닌 역사적 모뉴먼트로 다가온다. 철판 재질의 거대한 책자 도상들은 비문이나 표지석 따위의 기념비를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개인의 공적을 담은 비석이거나 공동체의 규범을 기록한 순수비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시간을 타고 내려오면 2001년 ‘9.11 테러’나 2011년 ‘5.3 빈 라덴의 사살’과 같은 사건을 담아낸 미디어의 표상으로도 여겨진다. 하지만 작가의 손으로 표현된 책자 모뉴먼트의 조형 방식은 구체적 내러티브가 부재한 정보의 상징적 도상으로 제시되고 있다.    

양묵은 자신의 책 그림이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대상으로 읽혀지기를 바란다. 구체적인 사건이 기록되고 있지 않지만 작가가 사용하는 암묵적 표현 방식은 이러한 사건의 본성에 대한 성찰을 허락해 준다. 탄흔이나 상흔이 언어적 기호로 작동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책의 도상 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탄환이나 상처의 도상 이미지가 파괴와 폭력 그리고 살상과 죽음의 상징적 기호로 제시되는 이치는 차가운 아연판 재질의 책자 표면이 주는 감각적 인식의 조건에 의해 의미 구조가 차원을 달리하게 되는 사연과 다르지 않다.  

덧붙여 추상하고 싶은 말이 있다. 작가의 책 이미지는 작품을 해석하는 관객의 특수한 기억이나 경험에 따라 신체 이미지로 대체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때 신체에 가해진 탄흔과 상흔은 살상과 폭력을 나타내는 기표로 읽혀질 수 있다. 종교적 차원의 의미가 가미된다면 해석의 가능성은 더욱 명료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책형과 고난이 그것이다. 하지만 양묵의 작품은 멀거나 가까운 시대의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서사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열린 해석의 가능성에 초점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양묵이 작가로서 개입하는 지점은 폭력과 권력 그리고 억압과 불균형으로 얼룩진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저항 의지가 작동하는 순간이라 한다. 이러한 모순과 역설의 순간들에 대한 저항 의지는 실존적 주체로서 작가 자신과 특정 사건과 기록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작가의 태도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으며, 이들 사이에 나타나는 정의나 가치가 특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규정될 수 있다는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결국 작가의 저항 의지는 주체와 객체가 뒤얽혀 존재하는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세계에 대한 성찰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양묵의 책 그림은 실존적 자의식의 표상으로 정리된다. 기호와 역사성 그리고 기념비는 작가의 작품을 해석하는 세 개의 키워드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하위 개념으로 책, 탄흔, 상흔, 비문, 흔적, 언어, 상징, 성찰과 같은 개념들이 따르고 있다. 이러한 키워드와 하위 개념들을 통괄하는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작가는 ‘자기 존재(Self-Existance)’라는 제명을 달았다.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의 시선으로 바라본 오늘의 세상은 상대적이고 불확정적 세계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문명사적 전환기로 불리는 오늘날 예술도 예외 없이 변화의 물결과 마주하고 있다. 아카데미즘이나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마저도 의심받는 상황에서 예술가들이 취해야 할 태도와 세계관은 다시 실험대 위에 올려져 있다. 양자 물리학을 포함한 현대과학이 내놓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해석 그리고 존재의 본성을 새롭게 헤아려 가는 것이 현실이라면 예술의 길을 여전히 열린 상태로 남아 있다. 화가로서 양묵은 이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성찰을 시도하며 함께 실마리를 풀어갈 것을 요청하고 있는 셈이다.

양묵이 시도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 모두로서 자신에 대한 성찰이자 상대적이고 불확정적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의식에 대한 성찰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예술은 21세기 문화현상의 한복판에 자리를 틀고 있다는 생각이다.

2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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