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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태 / 융합과 통섭의 미

김영호



최종태 / 융합과 통섭의 미


김영호 중앙대 명예교수, 미술사가

최종태(1932~)의 조각 세계를 논할 때 떠오르는 중심 화두는 토착화(inculturation)일 것이다. 토착화란 외부에서 유입된 어떤 제도나 사상 따위가 해당 지역의 성질에 맞게 동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일명 ‘땅에 뿌리 내리기’로 해석되기도 하는 토착화의 개념에는 융합과 통섭의 원리가 숨 쉬고 있다.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 맺어지는 유기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관계와 소통의 원리로 이해되기도 한다. 최종태의 경우 토착화의 문제는 종교 조각을 중심으로 심화되어 왔으며 독보적인 결실을 거둔 경우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실은 장구한 역사를 지닌 한국인의 미의식과 서구의 조형 원리가 융합된 성취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듯 최종태의 조각 세계를 둘러싼 토착화 문제는 특정 개인을 넘어 근대 이후 한국 미술사의 얼개를 따져보는 보편적 화두라는 점에서 연구의 가치가 있다.

좀 더 멀리 가보자. 토착화의 문제는 20세기 중반 이후 가톨릭 교회가 내세운 개혁의 노정,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1962년에서 1965년까지 4회기에 걸쳐 열린 이 회의에서 가톨릭 교회는 교회 일치운동과 더불어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을 통해 교회는 비그리스도교의 생활양식과 행동방식 뿐만 아니라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한다고 선포하였다. 이는 가톨릭 교회가 비서구 국가들의 종교와 문화에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자세를 피력하면서, 지역 교회들의 토착화를 선언하는 사건이었다. 결국 토착화의 문제는 최종태의 조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길잡이이자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계보를 정립하고, 나아가 자율적으로 형성된 한국 가톨릭교회가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를 통해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근본 개념으로 다루어질 가능성도 주어진다.           

최종태는 1958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대전에서 세례를 받으며 가톨릭에 입교했다. 하지만 다종교 국가의 청년 지식인으로서 그는 대학 시절과 그 이후에도 줄곧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불교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팔순을 맞이하며 출간한 에세이집 <산다는 것 그린다는 것>(2011)에서는 “내 신앙적 본향은 가톨릭이지만 원천은 불교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그의 언변들은 조각가로서 최종태의 삶과 예술에 나타나는 토착화의 노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가 일구어낸 조각 세계의 독자적인 조형성과 미의식을 토착화의 맥락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최종태 조각의 특수성을 ‘간결한 선과 단순한 형상의 정신성’으로 규정하고 이를 전통과 근대의 유기적 융합이라는 차원으로 다루고자 한다.

최종태는 1954년 서울대 조소과에 입학해 김종영과 김세중으로부터 조각을 배웠다. 화가인 장욱진에게는 단순하고 원초적인 감성의 회화를 사사했다. 앞의 두 조각가는 모두 가톨릭 신자로서 전후 한국의 근현대 조각을 대표하는 독자적인 조형성을 일으켜 세운 예술가라는 점에서 그 영향을 받았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세중은 본교 출신의 첫 교수로, 최종태가 입학한 해와 같은 1954년에 부임한 이래 고전 조각이 주는 엄격한 조형 방식으로 서구 조각의 토착화를 위한 계보학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세중의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절제된 형태와 조형적 완결성’은 최종태의 작품이 지닌 ‘간결한 선과 단순한 형상’의 조형 방식과는 큰 차이를 보여준다. 서구 고전 조각의 규범에서 벗어나 근대 조각의 특성으로 형상의 본성과 물성에 주목하는 작업 태도는 순수조형의 세계에 관심을 가졌던 ‘불각(不刻)’의 조각가 김종영의 영향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최종태의 조각을 특징 지우는 ‘간결한 선과 단순한 형상의 미의식’은 불교와 가톨릭 사이의 융합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왔다.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이 최종태의 정신적 두 스승이었다는 사실은 세간에 잘 알려진 내용이다. 성모나 성가족 등 성상 조각으로 채워진 그의 작업실을 지나 내실에 들어서면 탁자 위에 백제와 고려 초기에 조성된 석조불상 이미지를 담은 책들이 차곡히 쌓여 있는 것을 나는 확인한 바 있다.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간결한 선과 단순한 형상의 미의식’은 다름 아닌 백제의 <반가사유상>과 고려의 <석조미륵불상>을 태동시킨 선조들의 미의식에서 연유된 것이었다. 혜화동 성당의 <성모상>(1996)과 길상사에 설치된 <관음보살상>(2000)은 작가의 ‘불이(不二)’ 사상이 두 종교의 성상을 통해 구현된 대표작들이다.  

최종태의 조각 세계는 전통적 미의식과 근대조각의 순수 형식 그리고 종교의 초월적 정신이 융합되고 일치되는 지점에서 독자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가 최종태의 작품에서 한데 어우러질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개인적 성품에 기인한 것이지만 근대라는 환경적 요인이 뒷받침해 주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 본질, 환원, 형식, 절대, 전위 등의 개념은 소위 서구 모더니즘 미술이 추구했던 조형 원리였다. 이러한 서구 모더니즘의 조형 원리가 한국의 전통적 미의식과 만나고 융합되면서 독자적인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최종태의 이러한 노정은 결국 서구 모더니즘의 조형 원리가 한국에 유입되어 한국의 토양과 만나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예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20세기 이후 한국 문화사 전반에 걸쳐 나타난 현상이었다. 앞서 소개한 1960년대 바티칸의 토착화 선언을 고려한다면 최종태의 예술 세계는 국제적으로 확산되어온 융합과 통섭 그리고 관계와 소통의 미학을 반영하고 있다.       
         
최종태에 있어 예술의 노정은 구도의 길이었다. 그는 이러한 노정이 가톨릭교회가 추구하는 보편적 진리의 세계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믿었다. 앞서 소개한 에세이집 <산다는 것 그린다는 것>에서 그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체험을 전하며 구도의 길을 걷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적고 있다. 팔순의 나이에 이르러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것은 종교와 예술이 한군데로 모였다는 사실이며 순결함과 순수함을 실천하는 일이 자신의 예술적 노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적 노정은 곧 그에게 있어 종교인으로서 행하는 구도의 길이라 믿었다. 최종태가 걸어온 구도의 길은 그가 남긴 예술 작품을 통해서 빛을 발휘하고 있다. 그 빛은 사유의 깊이와 진지함이 드러내는 광휘로 보는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이번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 기증되는 최종태의 작품은 조각과 회화 그리고 판화를 망라하고 있다. 조각가의 삶이 투영된 작품들이 제자리를 찾아 대중들과 만나게 된 것이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 자리한 서소문 밖 네거리 성지는 교황청 공식 국제 순례지이자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로 알려져 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가톨릭과 불교를 포함해 조선 후기 사상사의 전환기적 특성을 주제로 한 상설 전시실을 운영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종교적 진리의 보편성을 가톨릭의 교리 안에서 수용하면서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내부에 자리 잡은 최종태 갤러리는 방문객들에게 적지 않은 의미를 전해줄 것이다. 그 의미란 구도의 과정으로서 예술의 노정에 관한 것이자, 토착화의 힘과 정신이 획득한 보편적 가치에 관한 의미일 것이다. 아울러 최종태 작품을 품은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컬렉션은 향후 한국 종교미술의 계보와 향방을 세우는데 하나의 길을 제시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2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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